제46화. 몰락
“누가 둘째 장로를 죽였어?”
가후는 한참 동안 숨을 고르다 쉬어터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자는 검은색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하얀색 불꽃을 다루고 있었고…둘째 장로도 그 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흠 장로님께서는 전력으로 해일창을 사용했지만…그의 공격을 1초도 견뎌내지 못하고 재가 되셨습니다…”
“검은 망토? 하얀 불을 지배한다고?”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가후의 낯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불로 적을 물리치는 방법은, 연금술사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가씨 가문의 적이면서 가흠을 쉽게 죽일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연금술사…가후의 머릿속에는 경매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검은색 망토의 연금술사가 스쳐지나갔다.
‘그래…주희와 곡니가 묘하게 그 작자한테 공손하게 대했지.’
경매장에서 그가 이씨 가문에게 보인 호의, 곡니와 주희의 깍듯한 태도, 갑자기 나타난 이씨 가문의 상처 치유약, 경매장의 거래 중단 선언까지…그의 머릿속에서 단서들이 하나하나 짜 맞춰지자, 그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빌어먹을 유석…멍청한 새끼…연금술사 축에도 못 드는 애송이를 데리고 온 거라고?’
가후는 고통스럽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 금빛성에 갚아야 할 30만 골드의 빚 말고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에잇! 약재도 없고, 약을 만들 병신도 없어져버렸잖아! 30만 골드를 어디서 구해!’
본래는 재가 되어버린 약재로 약을 정제하여 판매한 후 잔액을 지불했어야했다. 하지만 약재도, 연금술사도 모두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가씨 가문과 협력한 가문은 금빛성에서 제법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만일 이 정보가 그들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그들은 당장이라도 빚 독촉을 시작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들의 자금력으로는 30만 골드를 갚는 것은 꿈같은 소리였다.
“젠장!”
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30만 골드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남은 것은 파산뿐이었다.
쾅!
가후는 분을 참지 못해 책상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검은색 책상이 산산조각나 나무 조각이 호위무사의 얼굴에 튀었지만, 호위무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 이었다.
가씨 가문의 수장은 초조하게 손가락을 탁탁 두드리며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창고에 있는 남은 상처 치유약을 각 시장에 전부 뿌려. 그리고 오늘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입단속 잘하라고 전해. 만일 이 이야기가 은빛성에 퍼지는 날이면, 입을 연 놈을 반드시 찾아내서 사지를 찢어준다고도 전하고.”
“알겠습니다 촌장님.”
호위무사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뒤, 즉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가후는 피곤이 몰려와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이번 일을 어찌어찌 잘 넘긴다고 해도, 이제 이씨 가문과의 격차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될 것은 자명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며칠 전 이씨 가문과의 불화가 다시금 그의 뒷골을 당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 늦은 후회였다.
* * *
계획한 일들을 모두 마무리 한 이준은 마을로 돌아와 약로에게 원기를 회복하는 연금비약을 정제해달라고 부탁한 뒤, 서둘러 그 연금비약을 이은에게로 가져갔다.
이은은 선물을 받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준을 올려다보았다.
* * *
이준이 가씨 가문의 약재를 전부 태워버린 이후, 은빛성은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이씨 가문의 시장에서 늘 행패를 부리던 가씨 가문의 사람들이 사라졌고, 언제나 거만한 태도로 성을 누비고 다니던 가온도, 가씨 가문에 들어온 호색한 연금술사도, 3성 투사인 가흠도, 심지어 촌장인 가후 조차도 모두 한 날 한 시에 죽기라도 한 것처럼, 성안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가씨 가문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요?”
이한은 며칠간 가씨 가문이 미동조차 하지 않자,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세 장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 장로도 머리를 절레절레 저을 뿐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조용한 게 더 이상합니다. 가후 그 노인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게 분명하니, 각별히 주의를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 장로의 분석에 이한도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해 날뛰던 가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종적을 감추기라도 한 듯 조용해지자 이한은 더욱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이한은 고개에 돌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들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큰 시장을 맡기기까지 했는데, 준은 도무지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준이야, 최근에 그 스승님을 만난 적이 있느냐?”
이한의 질문에 세 장로도 이준한테 눈길을 돌렸다.
“네, 만났어요.”
준은 아버지의 질문에 눈을 부비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 분이 저를 제자로 삼으시겠다는 데요?”
아들의 말에 찻잔을 들던 이한의 손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아들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분이…… 너를 제자로 삼고 싶어 하신다고?”
세 장로는 어찌나 분했는지 볼살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소년은 세 장로를 한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좋아……”
이한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차를 벌컥벌컥 들이킨 뒤, 흥분을 이기지 못 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손을 비벼댔다.
“푸하하! 그래! 역시 내 아들이다! 감히 누가 우리 준이를 폐물이라고 불렀지?”
이한이 흥분한 모습에 이준이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혼잣말을 하듯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보름 뒤에 스승님과 수행하러 먼 곳으로 떠나야 해요. 아마 1년이나 그 이상은 지나야 다시 성에 올 것 같아요.”
“어?”
아들의 갑작스런 통보에 이한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가람 아카데미는? 거기는 투기대륙에서 유명한 학원이다. 그것도 놓치기 아까운 기회잖니.”
“등록할 거에요. 하지만 1~2년 정도 휴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가람 아카데미가 아주 훌륭한 건 알지만, 가람 아카데미에서 뭘 배워도 2년 안에는 나설아를 못 이겨요.”
나설아라는 이름 석자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그 날의 모욕을 아직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욕을 갚아줄 수만 있다면 가람 아카데미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날 그 여자와 약속을 했으니, 당연히 그 약속을 지키러 가야죠.”
* * *
이한의 예상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가씨 가문의 세력은 나날이 약해지기만 할 뿐 이었다.
결국 이씨 문중 사람들이 대책회의를 한 보람조차 없이, 이미 ‘활기의 물약’의 재고가 바닥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가씨 가문에서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고 며칠이 흘렀다.
결국 가씨 가문의 상처 치유약이 판매가 종료 되었다는 소문이 은빛성 전역에 파다했지만, 여전히 가씨 가문은 속수무책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이었다.
* * *
이씨 가문, 회의실.
“가씨 가문의 상처 치유약 공급이 끊겼다고?”
이한은 흥분한 얼굴로 세 장로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실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그 유석이라는 연금술사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준 도련님과 마찰이 생긴 이튿날부터 아예 종적을 감췄답니다.
수하의 보고에 이한과 세 장로는 동시에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이준은 또 다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준과 관계가 없다면 왜 하필 그와 마찰이 생긴 이후, 종적을 감추었단 말인가.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또 있습니다, 촌장님. 가씨 가문의 둘째 장로인 가흠이 약재를 운송하는 도중에 검은 망토의 신비한 인물에게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합니다.”
가흠이라면 은빛성의 이름난 고수가 아니던가. 이한은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보고를 마친 수하를 내보낸 뒤, 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준아, 3성 대투사 가흠을 쉽게 죽일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자는 은빛성에 많지 않다. 이것도 스승님이 하신 일이더냐?”
준은 아버지의 추궁에 마지못해 입을 뗐다.
“가흠은 확실히 죽었어요.”
아들의 확언에 이한은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씨 가문과의 길고 긴 싸움이 이렇게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너의 그 스승님이 우리 가문을 돕는 것은 모두 너 때문이겠지. 기회가 된다면 우리 이씨 가문을 대표해서, 꼭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거라. 우리가 너무 많은 신세를 졌구나.”
이준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머리를 끄덕이자, 이한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콧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렸다.
* * *
두 가문의 패권 다툼이 이씨 가문의 완승으로 일단락 된 지 불과 일주일, 금빛성의 약재 가문에서 대투사 두 명과 부하들을 보내, 가씨 가문에게 빚독촉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은빛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들은 가씨 가문에게 사흘의 말미를 주었고, 가후는 여기저기서 돈을 긁어모아 보았지만 결국 마련한 것은 10만 골드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결국 가후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여기저기에 돈을 구하러 다녔지만, 지금 가씨 가문을 돕는다는 것은 이씨 가문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행동이었으니, 어느 누구도 선뜻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 * *
다시 이틀 뒤, 가씨 가문에서 가지고 있던 시장 중 가장 인기가 많고 수익이 높은 두 개의 시장을 판매한다는 소식이 은빛성을 다시 한번 뒤집어 놓았다.
두 시장의 수입은 가씨 가문 전체 수입의 5할에 달했으니, 사실상 완전한 파산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은빛성의 10여개의 시장 중 절반은 이씨 가문이, 절반은 가씨 가문이 차지하고 있었고, 박씨 가문은 시장이 아닌 도박장과 기생집이 수입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한쪽이 완전히 백기를 들어버렸으니 이제 은빛성은 거진 이씨 가문이 지배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가씨 가문의 시장을 인수할 다른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장을 인수한다는 것은 가씨 가문을 대신해 이씨 가문과 한판 붙어보겠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일이니, 누구도 감히 시장을 인수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이런 빌어먹을! 대체 왜 안 팔리는거야!”
시장을 판다는 말이 나가면 매입자들이 물 밀듯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후의 예상은 결국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결국 빚을 갚아야 할 시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가후는 여전히 빚을 갚을 돈을 구하지 못하고, 쓰레기를 뒤지는 길고양이 새끼마냥 온 은빛성 안을 쏘다니며 돈을 구걸하고 다녔다.
그리고 3일 째 되는 날 저녁…낯선 사람 하나가 찾아와 몇 시간이나 가후와 신경전을 벌인 끝에 20만 골드라는 헐값에 노른자위 같은 시장 두 개를 꿀꺽하고 사라졌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 돼서야 간신히 나머지 20만 골드를 마련한 가후는 해가 밝자마자, 가문의 전 재산을 금빛성의 약재 가문에게 고스란히 내어주고 비참한 표정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빚쟁이들이 떠나고 비통한 심정으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가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20만 골드에 시장을 사간 자가 아무래도 이씨 가문 쪽의 사람인 것 같다는 보고였다.
이 소식을 들은 가후는 화가 치밀어 올라,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끝내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