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뒷일을 처리하다.
준은 뒷마당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유석의 침대 위에 쓰러져있는 여자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왔구나.”
약로가 반지 속에서 유석의 출현을 알리자, 준은 구석진 곳에 다시 몸을 숨기고 방안을 훔쳐보았다.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유석은 급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예쁜이, 일어나. 오늘도 이 유석님과 뜨거운 밤을 보내야지!”
준은 유석을 당장이라도 쳐 죽이고 싶은 마음에 급히 머릿속으로 약로에게 말을 걸었다.
“미친놈, 스승님! 어서 손을 쓰시죠.”
“음…… 잠깐! 왼쪽을 봐라.”
그러나 약로가 다급한 목소리로 준을 제지했다.
“어서, 왼쪽을 봐!”
마음속에서 약로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지자, 준은 천천히 돌려 방 왼쪽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꽉 닫혀있던 창문이 활짝 열리며 창가에 금색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이 소녀의 얼굴을 비추자 여신처럼 신비로운 자태가 드러났다.
“으…은아?”
“은이가 왜…”
“허허, 보아 하니 너랑 같은 목적으로 온 것 같구나.”
준은 미간을 찌푸린 뒤 몸을 숨기고 약로를 다그쳤다.
“스승님, 이상해요. 은이가 갑자기 세진 것 같은데요? 지금 저 정도면…대투사 정도 수준이잖아요. 실력을 감추고 있던 건가요?”
약로는 여유롭게 웃으며 준의 추측을 바로 잡아주었다.
“아니다, 저 아이의 실력은 네가 평소에 생각하던 정도가 맞다. 하지만 뭔가 특수한 방법을 동원한 것 같구나. 저 아이의 신분이라면 놀라운 일은 아니지.”
스승의 대답에 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체 은이의 집안은 얼마나 대단한 걸까…’
유석은 아직 이은을 발견하지 못한 듯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껌뻑거리는 여인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그 역시 5성 투사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갑자기 나타난 강력한 기운을 눈치 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알아차린 유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창가에는 금빛 옷을 입은 소녀가 창틀에 반쯤 기댄 채 금색 불꽃이 반짝이는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녀의 작은 손 위에서는 금색 불길이 신비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전신을 관통하는 살기에 식은 땀을 흘렸다. 지금 이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강대한 염력은 그에게 죽음을 직감하게 할 만한 것 이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방문을 향해 달려 갔다. 일단 문만 열리면 가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과 가후가 득달처럼 달려올 것이다.
“어억…”
그러나 그가 문 밖으로 달려 나가려는 찰나, 두 다리에서 뜨거운 통증이 전해져왔다.
유석은 갑자기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져, 추한 몰골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어찌나 세게 넘어졌던지 그가 넘어지는 순간, 새하얀 이빨 두 세개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아아아악!”
그의 다리에는 어느 샌가 주먹 만한 구멍이 두 개 뚫려있었고, 구멍 주위에서는 살이 타들어가며 고약한 노린내가 피어나고 있었다.
“사람 살려! 자객이 나타났다!”
유석은 극심한 통증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온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소용없어. 이 방은 이미 내 기로 감싸서 누구도 못 들을 거야.”
소녀가 차분한 말투로 설명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금색 불꽃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손끝에 모였다. 아마도 유석의 다리에 바람구멍을 낸 것은 바로 그 금색 불꽃인 듯 했다.
“너…너 대체 무슨 짓이야? 원하는 게 뭐야? 돈? 연금비약? 내가 다 줄게. 목숨만 살려줘!”
유석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개처럼 발버둥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은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깃털처럼 가볍게 창틀에서 내려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뿐 이었다.
‘음…?’
준은 은의 머리가 평소보다 길어져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은의 머리는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머리카락은 거의 엉덩이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스승님이 말한 특별한 수단 때문에 생기는 변화인가…?’
소녀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살랑살랑 우아하게 걸음을 옮겨 유석의 코앞까지 다가선 뒤, 머리를 숙여 차분한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사람을 시켜 나를 붙잡아 오라고 하지 않았어?”
마치 책이라도 읽는 듯 담담하고 온화한 말투에 유석은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사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걸 아주 싫어해…”
소녀가 차분한 말투로 한숨을 내쉬자, 유석의 눈동자에 희망의 불꽃이 스쳐갔다.
“말했다시피…나는 사람을 죽이는 걸 싫어해. 그래서 나에게 음흉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어지간하면 참고 넘어갈 수 있지…하지만 오라버니를 모욕하는건 얘기가 달라.”
말을 마친 이은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손가락 끝에 날카로운 금색 불꽃을 일으켰다.
“컥…”
그리고…유석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금색 불길이 금색 번개로 변해 사내의 왼쪽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을 만들었다.
비명 한번 지르지 못 하고 혀를 길게 뺀 채 절명한 유석을 바라보며, 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라버니가 참견한다고 뭐라고 하지만 않았다면…가씨 가문은 진즉에 없어졌을 텐데…그럼 이런 귀찮을 일도 없을 거고.”
그녀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안을 한번 둘러보고는 바람처럼 몸을 날려 창을 통해 모습을 감췄다.
“허허허…평소에 워낙 차분하고 얌전해서 무른 아이인 줄 알았더니, 제법 결단력이 있는 아이구나.”
약로는 은이의 이런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덕분에 오늘 헛걸음을 했네요.”
제자도 허탈한 듯 웃음을 짓자, 약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흠…그건 아닌 것 같다. 저 아이가 독하게 손을 쓴다고 썼지만, 아직 애는 애구나.”
준은 스승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뜻이에요?”
“뒷처리가 무르다는 뜻이야. 한번 가만히 지켜보거라.”
준은 아직도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승의 명대로 유석을 가만히 지켜본 뒤 10여분…소년의 시야에 전신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오싹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석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가슴팍에서 작은 옥병을 하나 꺼내 그 속의 하얀 분말을 상처 부위에 끼얹고는 연한 청색의 연금비약을 꺼내 삼켰다.
“이번 상처는 아마 반년은 있어야 회복이 가능하겠어… 내일 촌장에게 부탁해서 스승님을 만나러 가야겠군…스승님의 도움만 있으면 이런 주먹만한 성의 가문 따위야…으으…그리고 그 년에게는 죽을 때까지 생지옥을 맛보여주지…아니 아니, 천국인가…큭큭큭…”
고통스러운 듯 이를 악물고 있는, 유석의 창백한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미안하지만 너는 돌아 갈 기회가 없을 거야……”
그가 또 다시 음흉한 상상에 잠겨있을 동안, 방안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유석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납덩이처럼 굳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사내 하나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내가 뒷일을 책임져야겠군.”
검은 망토 사이로 소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손바닥을 뻗자 하얗고 신기한 불꽃이 천천히 타올랐다.
“처…천지의 불꽃?”
“정답.”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가 웃으며 손을 쳐들자, 하얀 불꽃이 그의 손 끝에서 벗어나 번개처럼 유석에게 향하더니 이내 유석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결국 유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정체불명의 사내가 손을 흔들자, 신비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바닥의 재를 흔적도 없이 쓸어 없애버렸다. 그는 뒤처리가 깔끔하게 끝나자 느릿느릿 창문으로 걸어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의 한 지붕 위… 금색 옷을 입은 소녀가 다리를 꼬고 앉아, 반짝이는 눈동자로 지붕 위에 서 있는 검은 망토의 그림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 *
“당신은 대체 누구시죠?”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사내는 어깨를 한번 으쓱한 뒤 입을 뗐다. 물론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약로였다.
“이씨 가문에서 봤던 꼬마 아가씨군.”
이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새하얀 다리를 흔들며,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가씨 가문에서 뭘 하신 거죠?”
“흠…누군가의의 부탁을 받고, 가벼운 문제를 좀 해결했지.”
“부탁이요…?”
이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 하지만 자세한 얘기는 못 해주겠군.”
사내가 팔을 벌리며 여유롭게 웃자, 이은은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알고 싶다면요?”
질문을 던지는 이은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자, 작은 회오리모양의 불꽃이 이은의 손 위에 빠르게 모여들었다.
“허허…… 얘야, 네가 강해진 건 알겠는데, 아직 나를 막기에는 부족하단다.”
약로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그녀를 타이르자, 이은은 눈썹을 치켜뜨며 손가락을 튕겨 금색 불꽃을 만들어냈다.
“허허…이거야 원…대답을 듣지 않고는 멈출 생각이 없나보구나.”
이은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고, 준과 약로 모두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약로는 준의 동의를 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꼬마 아가씨, 나는 너랑 겨룰 수가 없단다. 만약 널 다치게 하면 어떤 녀석이 아주 불같이 화를 낼 거거든. 하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니 말을 해주마.”
사내는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어갔다.
“이 노친네에게는 아주 중요한 친구가 하나있단다. 그런데 오늘 그 친구가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녀를 능욕하려는 겁 없는 애송이가 하나 있었다며, 그 친구가 이 늙은이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더구나. 아이고…나이가 들면 이런 일을 할 체력이 없다고 그렇게 말을 해줘도 아주 한사코 애원을 하는 통에…이렇게 밤 산책을 나선 것이지. 이제 만족하느냐?”
약로의 말에 날카롭게 치켜 뜬 그녀의 눈썹이 조금씩 내려오더니,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던 뺨에 봄기운이 내려앉은 듯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스승님! 역시 준 오라버니랑 아는 사이셨군요!”
이은의 급변한 태도에 약로는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허허…이 녀석, 호칭이 너무 빨리 바뀌는 것 아니냐? 너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지 않았더냐?”
“그냥 그럴지도 모르겠다…하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이었어요.”
준과 관계가 있다는 말에 그녀는 금세 순수한 소녀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약로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준 오라버니가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스승님의 도움이 있었던 거 맞죠?”
약로가 웃으면서 대답을 피하자, 이은은 눈을 반짝거리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스승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오라버니와 가까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라버니한테 나쁜 목적은 없기를 바랄게요. 만약 그렇다면 저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스승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노인은 소녀의 귀여운 협박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저는 단지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이은은 다시 한 번 공손하게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밤이 늦어서…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리고…오늘 스승님께서 본 일은 오라버니에게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걱정 말거라. 한 글자도 꺼내지 않을 테니.”
약로의 대답을 들은 이은은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얘야, 잠깐!”
하지만 약로는 자리를 뜨려는 이은을 불러 세우더니 작은 약병 하나를 그녀에게 천천히 날려 보냈다. 이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약병을 받아들었다.
“네가 쓴 비법 때문에 앞으로 며칠은 몸이 아주 허해질 게다. 이것은 몸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금비약이니, 가지고 가거라. 회복에 도움이 될게야, 비실비실한 모습을 보면, 어떤 녀석이 마음 아파할까봐 주는 것이니 개의치 말고 받거라.”
약로의 짓궂은 말에 소녀는 볼을 붉히며 약병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