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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43화 (43/818)

제43화. 폐막

준은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가온에게 다가가더니,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가온은 평소에 점잖고 차분하기 그지 없던 소년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새끼……. 죽어!”

이윽고 가온의 눈에서 소년의 새하얀 치아가 사라지고, 시꺼면 몽둥이가 날아드는 모습이 아찔하게 시야를 덮쳐왔다.

시꺼먼 쇠몽둥이가 그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자, 가온은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람들은 불과 17 세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보여주는 칼 같은 냉정함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옥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제자리에서서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 준과 투닥거리던 그녀는 자신이 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선 사내는. 그동안 자신이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였다.

그를 잘 안다고 믿었던 만큼. 그녀는 주위의 그 누구보다도 큰 공포감에 휩싸여. 얼굴이 창백해질 지경이었다.

“네 이놈!”

가온의 머리통이 짓이겨지려는 찰나, 벽력같은 호통 소리가 시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준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가온의 머리를 향해 힘있게 움직일 뿐 이었다.

쾅!

하지만 장내에 울려 퍼진 것은, 가온의 골통이 뭉개지는 소리가 아니라, 쇠몽둥이가 박살나는 소리였다. 소리를 지른 장본인에게서 날아든 예리한 청색 섬광이 준의 몽둥이를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그러나 준은 손잡이 밖에 남지 않은 쇠몽둥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태연하게 날카롭게 쪼개진 쇠 조각으로 가온의 목구멍을 찌르려 들었다.

“네 이놈!”

다시 한 번 벽력같은 호통 소리와 함께 폭풍이 몰아치며 준의 손을 막아섰다.

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손에 든 날카로운 쇳조각을 화살처럼 날려 보냈다.

“흥!”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날아드는 쇳조각을 보며 콧방귀를 끼더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자 푸른색의 염력이 독수리의 발톱 같은 형상을 띠더니, 폭풍이 몰아쳐 날아든 쇳조각을 깔끔하게 박살내버렸다.

“어린 놈이 이토록 악랄하다니, 내가 오늘 네 아비를 대신해 버릇을 고쳐주마!”

사내가 손을 휘젓자 다시 한 번 폭풍이 일며 그를 공중으로 띄우고, 가온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주위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모두 날려 보냈다.

“나를 혼낸다고? 당신이 뭔데! 당신 아들이나 잘 건사하시지.”

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바닥으로 향한 채 척력장을 사용해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쾅!

소년이 몸을 날리자마자 방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곳이 청색 회오리로 인해 짓뭉개졌다.

“아버지, 죽여 버려요!”

공중에서 내려오는 사내의 그림자를 본 가온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가후는 아들의 팔을 보자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염력을 끌어올려 준을 향해 몸을 날릴 준비를 했다.

“흥…한심하군. 대투사에 한 가문의 수장이라는 인간이 나 같은 어린애에게 직접 손을 쓰려하다니. 가온의 파렴치한 성정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가씨 문중의 가풍 이었나 보지?”

준이 당당하게 가후를 비난하자,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대투사 씩이나 되는 가씨 문중의 장이, 17살 먹은 소년을 상대로 살수를 쓰는 것은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러나 가후는 이미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네놈이 우리 아들 손을 저 꼴로 만들어놓고 무사하길 바라느냐!”

가후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청색 염력이 다시 한번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준은 자신을 에워싸는 폭풍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손으로 자신의 손에 끼워진 검은색 반지를 어루만졌다.

* * *

가후의 등장에 이번에는 이은도 전처럼 여유로운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 차갑게 굳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금빛 불꽃이 타오르자, 그녀의 손에 금색 섬광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사자와도 같은 목소리가 군중을 꿰뚫고 거리에 울려 퍼졌다.

“감히 누가 나 이한의 아들을 혼내겠다고 나서는 것이냐!”

구경꾼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울려 퍼진 곳으로 향하기도 전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형체 하나가 지붕을 타고 준의 앞까지 날아들었다.

“사자의 맹습!”

이한은 등장과 동시에 성난 사자처럼 가후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쾅!

푸른색과 붉은 색의 염력이 어지러이 뒤엉키며 폭발하며 굉음을 토해내고,이한은 가후와 맞부딪히자마자 즉시 몸을 날려 준을 끌어당겼다.

두 강자가 충돌한 곳 주변은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듯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가후! 이런 어린 아이에게 손을 쓸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개만도 못 한놈 이구나!”

가후는 입꼬리를 부르르 떨며 땅에 누운 가온을 가리켰다.

“저 자식이 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었다! 이 일을 어찌 책임질테냐!”

“흥! 웃기는 소리! 네 아들이 시작한 싸움에서 네 아들이 졌다고 상대를 죽이겠다고? 그럼 네 아들은 아무에게나 싸움을 걸고 다녀도 되겠구나! 자신이 지면 아버지가 어디든 나타나 상대를 쳐죽여 줄테니!”

“너……”

이한의 통쾌한 한마디에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상황이 이쯤되자 가후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한과 자신은 호각이라 치더라도 주위에는 온통 이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로 가득했다.

“이한…이 일은 잊지 않겠다.”

“나도 잊지 않지.”

두 촌장은 살기 등등한 눈으로 한참을 노려보다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잠시 후 가후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들을 부축하며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유석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가후는 유석의 한심한 꼬라지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석선생, 갑시다!”

“어? 저 여자애는……”

유석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이은을 바라보았다.

가후는 이 상황에서도 여자를 찾는 유석을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서 다시 상의합시다.”

“에잇! 그래요.”

유석은 다시 한번 음흉한 표정으로 이은을 훑어보더니, 예의 그 거만한 걸음걸이로 가후를 따라 시장을 나섰다.

가후 일행이 시장을 떠나는 것을 본 이한은 차갑게 웃음을 짓고는 주위를 둘러보고 이준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드렸다.

“쯧쯧, 이놈아. 가후 놈의 외동아들을 정말 시체로 만들었더라면, 저 노인네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랬느냐.”

준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 하자, 이한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쉽구나! 정말 그랬더라면 저 놈이 미쳐서 널 죽이려고 달려 들었을 테고, 그럼 밖에 잠복해있던 세 장로와 함께 가후 놈도 쳐죽였을 텐데 말이야!”

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버지를 바라보다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번일로 주위에 있던 용병들과 시장의 상인들은 두 부자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를 뼛속깊이 새기게 되었다.

* * *

한줄기 빛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속…은은한 달빛만이 천지를 조용히 감싸 안고 있었다.

낮에 있었던 대사건이 거짓말인 것처럼 심야의 은빛성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준은 낮에 있던 일을 되새기며 한참을 방안에 누워 있다가 약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 영혼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의 힘을 내실 수 있죠?”

“음…영혼 상태로도 대투사나 투령급은 손쉽게 이길 수 있다.”

스승의 단호한 답변을 듣자 준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낮에 그 녀석을 죽이러 가려고?”

약로가 조금 놀란 듯한 말투로 반문하자, 준은 고개를 저었다.

“가온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유석이라는 연금술사놈이에요. 그 놈만 사라지면 가씨 가문도 끝장이겠죠. 어찌됐든 그놈이 돈줄이니까요.”

그러나 약로는 귀신같이 준의 거짓말을 알아차렸다.

“흠…이상하구나. 내 제자가 이렇게 인내심이 없는 놈이 아니었는데…그 꼬마 계집을 걱정하는 게 아니고? 네가 떠났을 때 그 유석이라는 놈이 그 꼬마 계집을 어떻게 할까봐 그러는 게 아니더냐?”

정곡을 찔린 준은 버럭 화를 내며 약로의 말을 받아쳤다.

“아이 참, 그게 아니라! 저는 곧 있으면 수행을 떠나야 하잖아요! 어차피 오늘 그 자식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뭔가 손을 쓸 생각 이었다구요!”

속이 빤히 보이는 변명에 약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그래그래, 그렇다 치자꾸나. 하지만 나는 영혼상태이니 너의 손을 빌려야 한다.”

스승의 말에 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자신의 저장반지를 꺼내 검은 망토를 뒤집어썼다.

“그래, 가자꾸나. 이 스승님이 너의 몸을 지배하게 될테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준은 힘차게 머리를 끄덕인 뒤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자신의 몸을 뒤덮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이 새처럼 날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 *

가씨 가문 회의실 안.

“유석님 정말로 다른 연금비약을 정제할 수 있습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석을 찢어죽이고 싶어 하던 가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유석은 언제나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거리며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처치유약 말고도 용병들에게 꼭 필요한 연금비약을 정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제할 수 있는 비약의 이름은 ‘힘의 결정’이라는 것으로, 약을 복용한 후 짧은 시간동안 1할~2할 정도 힘이 세지지요.”

가후는 흥분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다시 한 번 은빛성의 패권을 노려볼 만 했다.

“하지만 힘의 결정은 대량으로 정제하기가 어렵고, 지금 제 실력으로는 하루에 20알 정도가 끝입니다.”

“허허, 그럼 저희도 경매 같은 형식으로 가격을 높이 부른 자한테 팔면 되지요. 활기의 물약을 주력으로 하고, 이 힘의 결정으로 다시 한번 인기를 끌어보지요!”

“하하, 촌장님…하지만 저는 이번에도 계약대로 연금비약의 정제만 책임을 질 것입니다.”

가후는 유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럼 이번에는…”

“하하, 아니요. 이번에는 막무가내로 돈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그 이은이라는 여자아이를 데려다 주세요.”

가후는 머릿속으로 얼마를 줘야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석은 발정난 개처럼 낮의 그 여자아이를 원할 뿐 이었다.

‘정말 미친 자식이군…’

들떴던 마음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낮에 그 사단을 내놓고도 또 다시 이은을 찾는 유석을 보자, 가후는 다시 한 번 그를 쳐 죽이고 싶어졌다.

“유석님…하지만 그 아이를 납치라도 하는 날에는 이씨 가문과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이건 시장의 이권 다툼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 아이를 납치하는 순간, 정말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판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가후가 한숨을 내쉬며 설득해보았지만 유석은 막무가내였다.

“그건 제 사정이 아니지요. 촌장님이 그 아이를 납치를 하든, 협박을 하든, 기절을 시켜서 끌고 오든, 그 아이가 있어야 새로운 연금비약이 가씨 가문의 상품으로 출시될 수 있습니다.”

이쯤 되자 가후는 속이 뒤틀려 당장이라도 이놈을 찢어죽이고, 이씨 가문에 항복 선언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일 뿐 결코 현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간신히 화를 삼키며 다시 한 번 유석을 달랬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지요. 내일 확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후의 답변에 유석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하…편한 대로 하세요. 하지만 말입니다. 지금 두 가문의 사이에 원한 하나 보태진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나요?”

유석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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