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정면대결
‘젠장…용병들은 실력이 천차만별이라 얼마나 강한 사람이 껴있는지 알 수 없는데…게다가 저 자리에 있는 자들이 모두 1성 투사라고 해도 저 정도 수라면…’
그러나 지금은 준을 도발하는 것이 살길 이었다. 가온은 멈추지 않고 이준의 심기를 건드렸다.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니, 그럼 됐어. 갑시다, 유석 형님. 내가 저놈을 사내로 본 게 잘못이지.”
유석은 가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이은의 전신을 훑어보다가 시선을 돌려 이준을 바라보았다.
“너 이새끼…기다려. 곧 너희 가문에서 알아서 저 두 년을 나에게 갖다 바치게 해주지. 아니, 하는 김에 이씨 가문에서 괜찮은 년들은 모두 불러다가 돌아가며 밤 시중을 들게 해주겠어.”
가온과 유석은 말을 마치자마자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 때…준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어이, 형님. 도전을 해놓고 왜 내 답은 안 듣고 가.”
준의 대답을 들은 가온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유석 형님, 저 녀석이랑 한번 놀아 봐도 될까요?”
가온이 비열한 웃음을 띠고 묻자, 유석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기회가 되면 아예 보내 버려.”
가온은 얼마 전 준의 실력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만약 언젠가 가문의 그 꼬맹이가 너의 도전을 받아들이면,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말고 강하게 밀어 붙이거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제일 좋고…그게 아니라면, 팔이나 다리 하나를 병신을 만들어 놓거라. 그놈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뭐든지 위험해지기 전에 싹수를 자르는 것이 제일이니까.”
……
‘큭큭…잘 됐군. 오늘 이 새끼를 죽여 버려야겠어. 정당한 대결이니 뒷 탈도 없겠지.’
그는 이미 3성 투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격 상 수준의 수련법인 ‘바람의 노래’를 수련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몇 가지 무투기를 상당히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으니, 내심 자신은 3성 투사라도 어줍잖은 5성 투사와도 맞설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차였기에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상태였다.
반면 준의 재능이 돌아왔다고는 해도, 몇 달 전 성인식에서 투사는커녕 염력 8단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몇 개월간 실력이 아무리 빠른 속도로 늘었다 해도, 자신과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준이 가온의 도전을 받아들이자 이혁, 이옥과 주위의 용병들, 이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까지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준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으나, 몇 달 전까지 투사도 되지 못 했던 아이가 3성 투사를 이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리에 있는 용병들은 꼬마 주인님이 아직 어려 도발에 넘어갔다고 생각하며,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 도전을 왜 받아 들여? 죽고 싶어?”
이옥은 험악한 표정으로 준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그를 나무랐다. 그러나 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을 뿐 이었다.
“너…”
고집을 부리는 이준을 보며 이옥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채찍을 움켜쥐고 준의 앞을 막아섰다.
“안 돼. 네가 대단한건 알지만, 지금은 아니야.”
준은 채찍을 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이옥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에는 죽일 것처럼 욕을 하고 쫓아다니더니 가씨 가문과 싸움이 붙자 이토록 다른 모습을 보이니, 고맙기도 하고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던 것 이다.
소년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일부러 이옥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까지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뭐…전에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면서?”
뜨거운 숨결이 귀를 간지럽히자 이옥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그녀는 귓불까지 빨개진 얼굴로 준을 쏘아보며 나지막하게 준을 다그쳤다.
“흥…어쨌든 넌 이제 우리 가문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야. 함부로 다치거나 죽으면 안 된다고. 게다가 아무리 미워도 가족이야.”
“치…”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준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도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 한 행동이니, 지금 이옥의 행동은 방해밖에 되지 않았다.
“됐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여자들은 뒤로 빠져.”
준은 자신만만한 말투로 쇠몽둥이를 손에 쥐고 앞으로 나서더니, 번개처럼 몸을 날려 가온을 향해 돌진했다.
“야!”
이옥은 사색이 되어 채찍을 움켜잡았다. 그 때, 이은이 차분한 목소리로 이옥에게 말을 걸어왔다.
“언니, 괜찮아요. 오라버니를 믿어 봐요. 준 오라버니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니, 뭔가 계산이 있겠죠.”
“그게 무슨…”
평상시에도 하얗던 이옥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사라져 백지장 같은 상태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이은은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옥은 몇 번이나 이준에 대한 이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했던 터라, 결국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여전히 채찍을 꼭 잡고 있었다.
* * *
“푸하하, 좋아 좋아.”
가온은 쇠뭉둥이를 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준을 보며, 빠르게 염력을 끌어올렸다.
그가 제자리에 꼿꼿하게 선 채 두 손을 안으로 모아 새의 발톱 같은 형상을 취하자, 손가락 끝에서 희미하게 청색 염력이 피어올랐다.
전력을 다해 가온에게 달려들던 준은 그 모습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갑자기 왼손을 앞으로 뻗어 척력장을 사용했다.
밀어내는 힘으로 인해 갑자기 준이 멈춰서는 장면을 보고는 주위에 있던 용병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슨 무투기인지까지는 알지 못 했지만,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은 17살 밖에 되지 않는 소년이 지금 어떤 종류의 무투기를 막힘없이 사용한다는 것 정도는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번개처럼 날아가던 준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서 멈춰 서자, 그의 손에 있던 쇠몽둥이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와 가온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가온은 대수롭지 않은 듯 청색 염력에 휩싸인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주위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며 연한 청색의 회오리가 소용돌이치며 쇠몽둥이를 막아냈다.
“아…”
소년의 기발한 공격이 상대에게 가볍게 제압당하자, 주위 사람들이 아쉬운 듯 일제히 탄식을 내질렀다.
“누나…이준이 불리해 보이는데…”
무기를 잃은 이준을 보며 이혁이 불안한 표정을 짓자, 이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죽든 말든 상관하지 말라잖아… 혼자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옥은 어두운 표정으로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 가온 저 새끼 표정을 보니, 오늘 뭔가 일을 치러도 단단히 치를 기세야.”
그러나 두 사람과 달리 이은은 여전히 태연하게 싱글벙글 웃으며 준을 바라볼 뿐, 전혀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
가온의 공격을 피한 이준이 몸을 뒤로 빼자마자, 가온은 다시 한 번 바람 속성의 염력을 이용해 빠르게 준을 추격했다.
3성 투사인 가온이 주먹을 휘둘러 연달아 공격하자, 준은 순식간에 벽으로 몰리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은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가온의 주먹이 다시 서너 번 정도 허공을 가르고, 이준의 손바닥 위에서 노란 염력이 솟구치자, 소년은 벽력같은 기세로 몸을 날려 정면으로 적을 향해 돌진했다.
3성 투사를 상대로 정면대결을 택한 준을 보며, 구경꾼들이 모두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눈에 둘 사이에는 척 보기에도 상당한 전력차가 있는 만큼, 정면승부라면 이준에게 조금도 승산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준의 패배를 예감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소년의 손바닥에서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와 가온의 왼쪽 가슴을 후렸다.
“큭!”
정면에서 이준을 박살내기 위해 돌진하던 가온은 예상치 못 한 강력한 반격에 자기도 모르게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구경꾼들은 공중에서 무언가에 밀려난 듯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는 가온을 보며,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소년은 아직도 보여줄 것이 남아있었다.
“흡장!”
소년이 뒤로 날아가는 가온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자, 놀랍게도 자석에 끌리듯 가온의 몸이 다시 이준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몸을 가누지도 못 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가온은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푸른 빛이 그의 주먹을 감싸며 작은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질풍권!”
푸른색의 염력이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소년을 향해 날아가자, 강풍이 일며 소년의 주위에 있던 잡동사니들이 끌려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즉시 몸을 돌려 오른발로 벽을 차고 날아올랐다.
“태초의 힘!”
바람의 힘을 역이용해 더욱 빠르게 날아오른 준은 사력을 다해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투기를 사용했다. 그러자 준의 오른발이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사냥감을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가온의 주먹을 향해 날아갔다.
쾅!
주먹과 발이 맞닿은 순간 준의 다리에서 노란 염력이 폭발하자, 가온의 표정이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으드득…
노란 염력과 청색 염력이 뒤엉키며 뼈가 끊어지는 섬칫한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지고, 두 사내의 몸이 거의 동시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준은 자신이 딛고 날아올랐던 벽에 부딪히며 그대로 입에서 피를 토했다.
“아아…”
꼬마 주인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흘러나오자, 주위의 용병들은 모두 아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으아아아악!”
그러나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은 바로 가온이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발광을 하는 가온의 팔은, 망가진 쇠꼬챙이마냥 기이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이 놀라운 광경에 거리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다가, 이내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구경꾼들 중 가장 놀란 것은 아마도 이옥인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손끝을 가늘게 떨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어어…이, 이준 녀석이…이…이겼다고?
“아마도…저 녀석 손이 이준한테 맞아 부러진 같아……”
이혁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성인식에서 자신이 받았던 공격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가온의 상태는 자신이 당했던 부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가온의 팔은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기묘한 각도로 힘없이 꺾여 있었고, 살 밖으로는 새하얀 뼈가 튀어나와, 이미 그의 팔은 되돌릴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이옥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이 광경을 바라보다, 이마를 만지며 탄식을 내뱉었다.
“말도 안 돼…그 사이에 또 더 강해져서 투사가 됐다고?”
* * *
이준은 대결을 마친 후 십 여분 정도를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소년은 눈이 휘둥그레진 유석을 살기 등등하게 노려보며 쇠몽둥이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가온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준은 방금 전의 일격으로 가온이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 자비를 베풀 마음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땅에 누운 자신을 향해 몽둥이를 들고, 끝장을 보려고 다가오는 이준을 본 가온은 식은땀을 흘리며 팔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내가 졌어. 항복할게!”
그러나 이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쇠몽둥이를 더욱 세게 움켜쥘 뿐 이었다.
작은 주인님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용병들은 모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이준은 평소 그들과 장난을 치고 농을 주고받던 그 서글서글한 소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