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도전장
“저 여자는 누구야?”
가온은 잠시 망설이다가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이은이라는 아이입니다.”
“이름도 예쁘구만?”
유석은 웃음을 머금은 채 머리를 끄덕이며 이은에게 다가섰다.
“저는 유석이라고 합니다. 오늘 두 분과 함께 시장을 구경하고 싶은데요. 하하! 맘에 드는 물건이 있다면 뭐든지 말만 하시지요!”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팔을 벌려 왼쪽 가슴에 달린 연금술사의 휘장을 드러냈다. 그가 살짝 가슴을 내밀자, 은색 파도무늬가 그려진 휘장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1레벨 연금술사?”
주위의 사람들은 연금술사의 휘장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느낀 유석은 더욱 능글맞은 웃음을 띠며, 이은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휘장을 본 이옥은 잠시 놀랐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시간 없어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이옥은 말을 마친 후, 즉시 이은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돌리자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장정들이 뛰어나와 길을 막아섰다.
둘의 앞을 막아선 장정들을 바라보던 이옥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가온을 향해 경고했다.
“여기는 우리 가문 구역이야. 나대지마라.”
“하, 이씨 가문? 그게 그렇게 대단해? 고작 ‘생명의 물약’ 따위로 잠깐 인기를 다시 되찾았을 뿐이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너희 이씨 가문을 짓밟을 수 있어. ‘활기의 물약’ 따위는 가볍게 심심풀이로 만드는 거라구.”
유석이 새하얀 옷을 만지작거리며 비아냥거리자, 이옥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진작에 달려들어 묵사발을 내주고 싶었지만, 연금술사를 건드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이은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1레벨의 연금술사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만도 못 한 존재였다.
이은은 왠 개뼈다귀 같은 놈이 나타나, 준을 만나러 가는 것을 방해하는 통에 심기가 불편해져 있을 뿐 이었다.
“연금술사 휘장을 달고 있어도, 쓰레기는 쓰레기지…하, 1레벨 연금술사? 풋, 웃기지도 않네. 누가 보면 당신이 단왕 고하라도 되는 줄 알겠네요. 남들보다 조금 잘난거 가지고, 시건방 떨지 마시죠. 세상 넓은 줄 모르는 쓰레기씨.”
1레벨 연금술사를 앞에 두고도 대수롭지 않게 독설을 날리는 소녀의 태도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게다가 그런 살벌한 독설을 날린 것이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리여리한 소녀라는 것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이은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이옥은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동생에게 귓속말을 했다.
“내가 그랬지…저, 그 녀석이랑 어울려 다니면 못된 것만 배울 거라고…은이가 저런 아이가 아닌데…”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 유석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감히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네 년이 처음이야.”
“다들 속으로는 그렇게 얘기할걸요?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당신 같은 쓰레기를 못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 아니, 눈이 멀어도 온 몸에서 진동하는 역겨운 냄새로,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겠네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돌하게 독설을 퍼붓는 이은의 태도에, 유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씨 가문의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쳇, 가온. 시작해! 아직 경험이 없을 것 같아서 적당히 달래가며 가르치려 했지만, 내 배려를 받아들여주질 않는군.”
“어……”
가온은 차마 그 명을 받들지 못 하고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미친 새끼…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버지 말씀이 하나 틀린게 없군. 약을 정제하는 것 말고는 정말 벌레만도 못한 자식이야. 어떻게 이런 녀석이 연금술사가 될 수 있지?’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난처한 표정으로 유석을 달랬다.
“유석 형님, 지금으로서는 우리 가문에서 이씨 가문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이씨 가문?”
유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 여자만 데려올 수 있으면, 당신 가문을 도와 내일이라도 당장 이씨 가문을 무너뜨려주지. ‘활기의 물약’ 외에도 두 세 종류의 연금비약을 정제할 수 있으니, 그렇게만 되면 이씨 가문을 다시 밟아줄 수 있겠지.”
가온은 유석의 태도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겨우 계집 아이 하나에 연금술사가 자기 밑천을 드러내며 거래를 하다니…하지만 멍청이라도 상관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다시 가씨 가문의 천하가 찾아올 것 이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손을 들었다.
“저 여자들을 잡아!”
가온이 입을 열자 뒤에 있던 십여 명의 장정들이 흉악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 태세를 갖추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평소에도 성품이 불 같은 이옥이 참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허리춤에 찬 채찍을 뽑아 매섭게 휘둘렀다.
짝!
번개처럼 날아든 채찍이 허공을 가르자, 제일 앞에 선 사내의 얼굴에서 선혈이 낭자했다.
“저년이! 잡아! 오늘 저년을 후식으로 밤새 회포를 풀어야겠다!”
이옥이 3성 투사라고는 해도 상대편도 모두 투사였고, 개 중에는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투사들도 있었다.
결국 이옥은 두세 명의 장정을 쓰러뜨린 후 숨을 헐떡이며 상대의 공격을 피하느라 급급해지고 말았다.
짝!
다시 한 번 채찍이 허공을 가르자, 또 한명의 장정이 피를 토하며 자리에 쓰러졌다. 이옥은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며, 동생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빨리 은이 데리고 가서 이준 그 새끼 불러와!”
이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다, 갑자기 안색이 새파래져 소리를 질렀다.
“누나 조심해!”
동생의 경고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의 채찍에 맞은 사내가 몸을 일으켜 그녀의 가슴팍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제길!’
퍽!
이옥의 가슴에 주먹이 닿으려는 찰나,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어 장정의 얼굴을 걷어찼다. 갑작스런 공격에 사내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못 하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나가 떨어졌다.
“저 새끼들 전부 병신으로 만들어.”
소년이 쇠몽둥이를 들고 명령을 내리자, 순식간에 똑같은 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골목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쇠몽둥이를 든 4성 투사들이 뛰쳐나오자,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기고만장하던 가씨 가문의 호위무사들은 새하얗게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채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이씨 가문 호위 무사들의 시커먼 쇠몽둥이가 그들을 가차 없이 내리쳤다.
“아악!”
“으악! 살려줘!”
“아아악!”
순식간에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고, 준은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이옥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누나? 올 거면 나한테 미리 말을 하지 좀…요즘 가씨 가문 녀석들이 트집 잡으려고 난리인 거 알면서…”
만나기만 하면 철천지 원수처럼 굴던 준이, 생전 처음 듣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이옥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올 때 은이를 만났는데…은이가 너 보러 가자고 하도 보채서…갑자기 온거야.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
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개를 돌려 은과 눈을 마주쳤다.
“너…그렇게 안봤는데 입이 험하더라.”
준의 농담에 이은은 억울하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해도 너무 하잖아요! 고작 1레벨 연금술사가 무슨…그리고 오라버니는 내 걱정은 하지도 않고 그런 것부터 물어봐요?”
뜻밖의 반격에 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하! 이게 누구야? 이씨 가문의 도련님이군. 1년 내내 안보이더니, 이제 좀 사람 구실을 한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집안 꼬라지가 개판이긴 한가보군. 너 같은 놈에게 시장을 맡기다니.”
가온이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자, 유석이 차가운 눈빛으로 준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저놈은 또 누구야?”
“하하…유석 형님, 저 애송이는 이씨 가문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이준이라는 놈입니다. 10여년 동안 밤낮없이 수련을 해도 염력이 3~4단에 머물러있다가, 최근 무슨 개수작을 부렸는지 1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염력이 8단이 되었다는데, 그걸 믿고 저렇게 기고만장 한가 봅니다.”
가온의 설명에 유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푸하하! 어이가 없군. 투사도 못된 새끼가 무슨 천재야. 이씨 가문도 정말이지 볼 장 다 본 가문인가보군.”
유석의 말을 들은 이은의 눈에서 금색 불꽃이 일자 , 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은 뒤 유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활기의 물약’을 정제한 사람?”
준의 질문에 유석은 왼쪽 가슴의 배지를 앞으로 내밀며,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흥,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병신이군.”
유석의 말을 들은 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더니, 대단하다는 듯 박수까지 치며 환히 웃었다.
“정말 대단해요. 그렇게 효능이 낮은 연금비약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는데…! 당신 하는 짓을 보니까, 왜 그런 얼치기 같은 약이 나왔는지 바로 알 수 있겠어요!”
준의 비아냥에 주위에서 구경하던 용병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씨 가문은 이미 인심을 잃은 상태인데다가, 준은 용병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으니, 자리에 있는 용병들은 대부분의 꼬마 주인의 편이었다.
앳된 얼굴을 가진 소년에게 놀림을 받은 유석은 얼굴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이준을 노려보았다.
“너…지금 누굴 건드리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거냐?”
유석의 살기등등한 태도에 준은 다시 한 번 박수를 치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우와…실제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군요. 대단해요. 누가 들으면 당신이 투황급 강자나 대단한 레벨의 연금술사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1레벨 연금술사가 저런 말을 하다니…게다가 지금 상황이 어떤지 이해를 못 하나보군요? 얼간이 짓도 도를 넘으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에요.”
준은 한숨을 내쉬며 이은을 바라보았다. 늘 침착하고 차분한 은이가 왜 그러는지 단박에 이해가 갔던 것이다.
이준은 유석과 말을 섞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듯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뒤에 서있는 이씨 가문의 호위무사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때려, 주인도 같이. 감히 우리 이씨 가문 구역에 와서 행패를 부리니 우리도 봐줄 것 없어 ”
가온은 이준이 설마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적지아니 당황했지만 태연한척 거만한 말투로 준을 도발했다.
“비겁한 새끼. 역시 부하들 덕을 봐야 하는 폐물이구나.”
“매를 버네 , 매를 벌어.”
준은 가온의 얕은 수작에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너 같은 새끼는 은이랑 같이 붙어 있을 자격도 없는 놈이야. 성인식은 했겠지? 그러니 내가 너한테 도전장을 내밀어도 거절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너도 사내라면…”
가온의 도발에 이옥이 발끈하며 성을 냈다.
“뻔뻔한 새끼. 23살이나 먹은 놈이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아이한테 도전장을 내미는 게 사내야? 힘자랑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리와. 내가 오늘 송장 하나 치워주지.”
이옥이 채찍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서자 가온의 비아냥이 더욱 심해졌다.
“여자 복은 많네. 또 여자가 지켜주는 거냐? 부하에 여자에…지켜줄 사람이 많아서 좋겠군.”
바로 그 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용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이, 너, 너무 나대는 거 아니냐?”
“꼬마주인님, 저 애송이 새끼 손 좀 봐줘도 되는 거요?”
잠시 후 용병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가온은 적지않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용병들을 ‘활기의 물약’을 팔아먹을 호구로 밖에 보지 않던 그로써는, 이런 거친 자들이 준을 싸고도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