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꼬마주인님
주희는 준의 정체뿐 아니라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도 남자들이 싫어해요.”
소년은 지금까지 늘 마음속에 품어왔던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지나친 총명함과 영악함은 언제나 그를 불안하고 무섭게 했었다.
“그건 남자들의 고지식한 생각일 뿐이야.”
주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속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히 약간의 불쾌감이 숨어있었다.
“제가 왜 당신을 따라 나왔는지 잘 아시죠? 제 신분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는게, 서로에게 이익이라는 건 누나도 잘 알거에요. 누나는 똑똑하니까요.”
이준은 더 이상 그녀와 입씨름을 하기 싫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물론 이걸로 저를 협박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죠?”
“하…맹랑한 꼬마구나. 네 눈엔 내가 그렇게 가슴만 크고 머리는 텅텅 빈 여자로 보이나보지?”
소년은 그녀의 터질 듯 풍만한 가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가슴은 확실히 크네요. 굉장해요. 하지만 머리가 비었는지 아닌지는 가슴처럼 딱 본다고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게다가 전 가슴 크고 멍청한 여자라는 말은 한 적도 없어요. 혹시 평소에 그런 말 자주 들어요?”
“……”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소년한테 이런 말을 들은 주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이렇게 짓궂고 뻔뻔한, 그리고 영민한 소년이 이전의 그 순수한 소년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럼 전에 말한 우리 사이의 약속은?”
주희가 긴장한 듯 이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문제없어요. 가씨 가문에게 약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약속만 지켜주세요. 제 정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구요.”
준의 시원스런 대답에 주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손을 내밀었다.
“호호, 잘해보자! 기대되는 걸?”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준은 지저분한 것이라도 만지는 듯, 살짝 그녀의 손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즉시 손을 뗐다.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년의 행동에 주희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너 정말 17살 맞아? 지금 천하의 주희가 너한테 질질 끌려가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나 이번에도 준의 대답을 그녀의 예상을 멋지게 빗나갔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앞으로도 절대 티내지 말고 예전과 똑같이 대해줘요.”
주희는 할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코를 찡긋거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시간 나면 너의 배후에 있는 그 연금술사 스승님한테 언제든 유씨 경매장에 방문하시라고 해줘. 우리는 언제나 환영이야.”
“시간되면요.”
소년은 용건을 마치자마자 심드렁하게 짤막한 대답을 내뱉고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
멀어지는 준의 뒷모습을 보며 주희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참 알 수 없는 녀석이야. 나씨 가문의 그 꼬맹이는 무슨 생각으로 저 아이와 파혼을 했을까나…분명 몇 년 뒤면 땅을 치고 후회 할 텐데 말이야.”
* * *
‘생명의 물약’이 시장에 풀린지 한 달, 은빛성 약재 시장의 7할은 이미 이씨 가문에 넘어간 상태였다. 이제는 잠시 발길이 끊어졌던 다른 세력들은 물론이고, 이전부터 이씨 가문과 별 관계가 없었던 가문들까지 매일 같이 이씨 문중에 줄을 대러 문정성시를 이루었다.
반면 가씨 가문의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활기의 물약’이 약효와 가격 면에서도 딱히 경쟁력이 있지도 않은데다가, ‘활기의 물약’의 가격을 세 배나 올리며 폭리를 취했던 것이 결정타였다.
물론 3할이라고는 해도 수익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더 이상 약재를 구하기가 마땅치 않다는 것 이었다.
은빛성 최고의 재료 공급처인 유씨 경매장이 거래를 끊어 버렸으니,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은빛성의 조그마한 가문 따위가 가한 제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는 세력을 가진 유씨 가문에게 불만을 토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경매장에서 약을 얻지 못 한 가씨 가문은 웃돈을 주고라도 이곳저곳 발품을 팔며 간신히 필요한 약재를 얻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황은 점차 나빠지기만 해서, 은빛성의 패자로 떠오르고 있는 이씨 가문의 눈치를 보느라 점점 더 많은 상인들이 그들에게 등을 돌렸고, 약재 상인들도 당한게 있는지라, 가씨 가문의 물건을 팔아주는 것은 커녕 ‘활기의 물약’의 원료가 될 약재 판매를 거부하는 상인까지 속출하고 있었다.
‘생명의 물약’이 출시되고 32일째…마침내 가씨 가문의 원료 공급은 8할 이상이 끊기자, 기존의 2할 밖에 되지 않는 약재로는 도저히 물량을 짜낼 수가 없었다. 상인들과의 거래가 뜸해지며, 마지막에 남은 상인들이 앙갚음이라도 하듯 폭리를 취하기 시작하자, 그나마 근근이 유지되던 수입도 점차 줄어들 뿐, 더 이상 이씨 가문과는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은빛성의 패자로 군림할 단꿈에 젖어있던 가씨 가문은 이제 파산을 걱정해야 했다.
* * *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씨 문중 관할의 시장.
준은 이씨 가문의 건장한 호위무사들과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씨 가문의 부활한 천재를 호위하는 사람들은 모두 4성 투사 이상의 강자들이었다.
“아이고, 꼬마 주인님! 또 순찰을 나오셨군요!”
준은 ‘꼬마 주인’ 이라는 말에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 전 이한은 갑자기 ‘이런 것도 수련의 일환’ 이라면서 이 시장 하나를 준에게 관리하라고 명령했다.
물론 이제 갓 성인식을 치른 준에게 그런 큰 일을 맡기는 것은 무리라며, 이씨 가문의 고위 인사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고갔지만, 이준의 천재성과 정체불명의 연금술사와의 관계 때문에, 결국 이 시장을 준이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앳된 소년이 시장을 관리하게 되자, 상인이나 용병들은 모두 그를 ‘꼬마 주인님’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놀리거나 비아냥거린다기보다는 그를 귀엽게 생각한 호칭이었지만, 준은 그 말이 그리 달갑지 만은 않았다.
어쨌든 시장은 규모가 상당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관리가 썩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복잡한 구획 구분과 상인들 사이에서의 가격 분쟁 등 골치 아픈 문제는 모두 집사가 해결하고 있었고, 준이 신경 쓸 것은 오로지 시장의 치안 뿐 이었다.
그리고 시장 관리에는 나름대로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용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완성한 모험담, 천둥산, 어느 비밀스런 동굴에 남겨졌다는 전설의 수련법, 요수와 요괴 이야기는 준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했다.
준은 시장에서 보름만에 상당한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불과 몇 달전 은빛성 전체를 달군 천재 소년, 준수한 외모와 서글서글한 성품, 겸손한 태도까지…그는 상인과 용병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말이 잘 통하고, 기분이 좋으면 용병들에게 상처 치유약을 선물하기도 하다 보니, 용병들은 이 꼬마 주인님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용병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더 많은 용병들이 준이 관리하는 시장에 모이고, 많은 용병들이 이씨 가문의 다른 시장에 들르기 전에 꼭 이 시장부터 들리게 되면서, 꼬마 주인님의 구역은 보름 만에 가문에서 가장 큰 매출을 올리는 곳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상처약 뿐 아니라, 다양한 물품들이 모두 전보다 갑절은 팔리게 되었고, 상인들 역시 그런 꼬마 주인님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지난 보름간의 일을 생각하니 준은 수련을 떠나기가 조금 아쉬울 지경이었다. 이제 한 달 뒤면 약로와 함께 수행을 떠날 것이고, 1~2년 사이에는 돌아오지 못 할 것이다.
준은 아쉬운 마음을 떨쳐내고는 머리를 들었다.
그 때 , 왜소하고 작은 체격의 그림자 하나가,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여 빠져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치타, 일 안하고 여기서 뭐해요?”
준의 눈앞에 선 왜소한 남자는 시장에서 유명한 소매치기였다. 하지만 준은 그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고, 소매치기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쓸모가 있다는 점 이었다. 그는 은빛성 최고의 정보통 중 하나로, 시장의 관리자로서 어줍잖은 정의감으로 쫓아내기보다는 정보통으로 활용하는 것이 나았다.
“하하, 꼬마 도련님. 도련님께 알려 드릴게 있어서 왔습니다. 제 부하한테서 직접 들은 건데, 이은 아가씨 일행한테 낯선 남자가 치근덕거리고 있다고 해서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뛰어왔지 뭡니까.”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맞다! 가온, 가온도 그 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왠 으리으리한 옷을 입은 작자랑 같이 나타났다는데, 그가 사람을 꽤 많이 데리고 있대요.”
치타의 말을 들은 이준은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즉시 호위 무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소. 사람을 불러요. 살아 있는 사람이면 전부 데려와요!”
“네!”
준의 명을 들은 호위 무사 이소는 즉시 몸을 돌려 번개처럼 시장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길을 안내해요.”
시장의 인기인인 ‘꼬마 주인’의 살벌한 표정에 사내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의 준은 그간 시장의 많은 사람들이 보아왔던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은 꼬마가 아니었다. 치타는 그런 준의 태도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유석은 눈 앞에 있는 소녀를 보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소녀는 깨끗하고 우아한 푸른 옷을 입고 있었고, 분 하나 찍어 바르지 않은 어여쁜 얼굴에서는 그간 자신이 상대해온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청초하고 맑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자신을 흥분시키는 여자를 본적이 없었다.
초록색 끈으로 깔끔하게 동여맨 하늘하늘한 긴 머리가 날리며 드러나는 부러질 듯 가녀린 허리가 더욱 그를 설레게 만들었다.
그는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져야 하는 사내였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눈 앞에 있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청초한 소녀에게 한 눈에 반한 그는, 결국 이씨 가문의 시장에서 소녀에게 추근대다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나선 용감한 소년을 단박에 때려눕히며, 소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미인을 보호하려면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지. 아직 멀었어.”
유석에게 얻어맞은 소년은 바로 이혁이었다. 이혁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돌진할 태세였다.
“혁아, 가만 있어. 네 상대가 아니야.”
이옥이 차가운 표정으로 동생을 말리자, 이혁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며 자리로 돌아왔다.
이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이옥의 다리를 보자 당장이라도 둘을 납치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여자도 아주 좋군…오늘 운이 아주 좋은데…흐흐…”
“하하, 유석 형님, 저 사람들은 모두 이씨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저 여자는 이옥이라고, 아주 미친 개 같은 여자로 성내에 명성이 자자하죠.”
가온이 간사하게 웃으며 이옥에 대해 설명을 하자, 유석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런 여자가 더 매력 있는 거야! 동생은 아직 저런 여자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재미를 모르는구만!”
그러나 역시 유석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청색 옷을 입은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