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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39화 (39/818)

제39화. 느낌

“그럼 이제 어떡하죠? 약재가 충분하지 못하면 ‘활기의 물약’은 곧 판매가 중단 될 텐데…”

가헌은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짓기까지 했다.

“아직 우리 편에 선 약재 가게가 적지 않게 있다.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 손에 있는 약재들을 전부 끌어 모으면 당분간은 어떻게든 되겠지. 만약 그것도 안되면 다른 도시에 가서 고가로 약재를 사오는 수밖에, 이씨 가문에서 다른 도시에까지 손을 쓰지는 못했을게야”

가후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찻잔으로 향하는 그의 손끝은 불안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 *

천둥산맥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은빛성은 본래 용병들의 쉼터 같은 곳 이었으므로, 은빛성의 경제는 용병들의 씀씀이로 유지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용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상품이야말로 은빛성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물건이라 할 수 있었고, 이번에 이씨 가문에서 선보인 생명의 물약은 단 며칠 만에 그야말로 은빛성을 들었다 놨다 하는 상품으로 자리를 잡고 말았다.

가씨 가문에서는 생명의 물약에 대응하기 위해 활기의 물약의 가격을 급히 원래대로 되돌렸지만, 예전의 인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활기의 물약은 그저 생명의 물약의 대체제로, 최고 인기 상품을 구하지 못한 몇 몇 용병들이 마지못해 사는 상품에 불과했다.

* * *

이씨 가문의 회의실은 단 3일 만에 초상집에서 잔칫집 분위기로 급변해있었다.

완전히 부활한 것도 모자라 예전 이상의 수익을 누리게 되자, 회의실에서는 늘 서로를 경계하던 이한과 세 장로가 화기애애한 웃음을 지으며 담소를 나눌 지경이었다.

“하하, ‘생명의 물약’이 날개 돋힌 듯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오전에 다시 나타나 대량의 ‘생명의 물약’을 두고 가지 않았다면, 오늘은 재고가 하나도 없을 뻔 했어요.”

이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에 든 초록색 옥병을 어루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네네, 예전에 이씨 가문의 매출이 최고일 때보다도 두 배 이상이에요 두 배 이상!”

늘 침착함을 잃지 않던 큰 장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한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이며 머리를 돌려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 그 분이 오실 때 마다 널 만날 수가 없구나. 좀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는냐?”

‘내가 안 움직이면 그 약이 어디서 나와요…’

준은 억울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버지에게 그 약이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자, 앞으로 약재는 우리가 좀 더 신경을 씁시다. 우리가 그 분한테 너무 많은 신세를 졌는데, 계속 욕심만 부리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어요.”

이한은 흥분한 장로들을 진정시키며, 가슴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럼요.”

“그럼 그럼.”

이한의 말에 세 장로도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한이 아니었다면 역대 최고의 수입 앞에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막대한 이익 앞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다니. 네 아버지는 가문의 수장으로 상당히 훌륭한 분인 것 같구나.”

약로가 자신의 아버지를 칭찬하자, 준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약로와 자신이 가문에 부를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결국 가문이 강대해지려면 지도자의 능력이 가장 중요했다.

사공이 아무리 유능해도 선장이 배를 산으로 몰면, 배가 제대로 나갈 리가 없는 것이다. 약로는 이번 일로 인해 이한이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촌장님, 장로님들, 유씨 경매장의 주희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약로와 준이 둘만의 대화로 이한을 칭찬하고 있는 사이, 이씨 가문의 호위 무사 하나가 주희가 왔음을 알렸다.

“주희…?”

이한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지시를 내렸다.

“빨리 모시거라.”

얼마 되지 않아, 여왕같이 도도한 자태를 뽐내는 고혹적인 몸매의 여인 하나가 좌중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호호, 촌장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시네요?”

주희는 오늘도 빨간색의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이한과 이준을 번갈아가며 바라본 뒤 걸음을 옮겼다.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는 짧은 치마덕에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하얀 다리가 아찔하게 역동하며 사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에헴.”

이한은 헛기침을 하며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우리 가문의 일 년 수입이라 해 봤자, 유씨 가문의 경매장에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허허.”

“호호, 촌장님도 참…요즘 이씨 가문 시장의 인기가 경매장을 뛰어 넘어서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요. 겸손한 말씀을!”

주희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준을 바라보다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도련님은 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은데요?”

“하하…누님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도련님은 조금 민망하네요.”

준은 속으로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짐짓 소년 같은 순수함을 가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허허…그런데 주희 아가씨께서 어쩐 일로 이씨 가문에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한이 점잖게 질문을 던지자 주희는 새하얀 다리를 우아하게 뻗으며 의자 위에 몸을 올렸다.

“촌장님, 앞으로 저희 유씨 경매장에서는 가씨 문중에 약재를 제공해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이 사실을 알려드리러 온 것이구요.”

주희의 의미심장한 말에 이한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약로는 또 다시 이한의 그릇이 보통이 아님을 느꼈다.

이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본래 유씨 경매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중립을 유지하지 않았나요?”

이한은 분명히 경매장 측에서 무언가를 요구할 것 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희는 그저 도톰하고 색기 넘치는 입술을 빙긋이 올릴 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흠…저희에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하지만 이번에도 주희는 뜻 모를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한이 그녀의 이런 태도에 불안감을 느낄 때쯤…드디어 주희가 입을 뗐다.

“아니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

뜻 밖의 상황에 이한과 세 장로는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은 일도 너무 잇달아 일어나면, 사람의 마음에는 의혹이 일기 마련이다.

유씨 가문이 은빛성 같은 작은 성의 패권 다툼에 개입해 얻을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들이 아무 이득도 없이 괜히 귀찮은 일만 만들 리가 없었다.

그 때, 이한의 머릿속에 퍼뜩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유씨 가문이 얻고 싶어할만한 무언가…이씨 문중은 분명히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혹시…그 스승님께서…”

이한의 추측은 정확했다. 주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께서 이미 충분한 보답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촌장님께서는 저희에게 무엇을 제공할지 고민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실히 말씀드리죠. 이번 일에 대해 저희 경매장 측은 이씨 가문의 편입니다. 그 말을 드리러 왔습니다.”

“허, 하하…… 하하하!!!”

이한은 주희의 선언에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결국 세 장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치를 주자, 이한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이 모습을 보던 준이 웃음을 터뜨리자, 이한은 애꿎은 아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녀석, 뭘 웃어! 얼른 주희 아가씨에게 차라도 내드려라!”

준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더니, 책상에서 찻잔을 집어 두 손으로 공손하게 주희에게 가져다주었다.

주희는 예의 그 상냥하고 유혹적인 태도로 찻잔을 받으려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돌처럼 굳고 말았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은 준의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색 반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준은 주희의 시선이 반지를 향하자 무언가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주희 역시 준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잠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주희는 이씨 가문의 사람들과 조금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준은 주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열정적으로 그녀를 배웅하겠다고 자처했다.

* * *

준은 성문을 나서고도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한참동안 주희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소년처럼 열정적으로 그녀를 바래다 주겠다던 태도와 달리, 준은 말 한마디 없이 그녀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길 뿐, 여태까지 입 한번 벙긋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긴장하고 있는 것은 주희였다. 꽉 잡은 그녀의 가녀린 두 손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검은 망토를 두른 정체불명의 연금술사의 소년 같은 하얀 손과 그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던 검은 반지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반지…분명 그렇게 흔히 파는 물건은 아니었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자신의 옆에 있는 소년을 훑어보았다.

“실컷 봤어요?”

주희가 씁쓸하게 웃음을 짓자, 드디어 소년이 입을 열었다.

준의 의미심장한 표정은 주희에게 어떤 종류의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선…아니…뭐라고 불러야할까요?”

지금까지 주희 앞에서 늘 수줍고 순수한 소년을 연기하던 준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서 전해지는 알 수 없는 박력에 식은땀이 흘렀다.

“들어가요.”

소년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왼쪽을 바라보았다.

주희는 이준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곳은 은빛성내에서 연인들이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을 꺼내보려 했지만, 소년은 이미 성큼성큼 걸어가 버드나무 아래에 있는 기다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희는 수많은 남자를 쥐락펴락하던 자신이, 아직 볼에 홍조도 가시지 않은 어린 소년에게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것 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었다.

‘하하…천하의 주희가…’

그녀는 당혹감과 흥분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이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알아봤어요?”

준이 심드렁한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묻자, 그녀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애써 태연한척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알았다고 믿고 싶어.”

그러나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볼 뿐 이었다. 소년의 그런 태도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소용돌이 쳤다.

“설마 나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건 아니지?”

주희는 태연한 척 농을 건네 보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안색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글쎄요…그러기에는 누나는 너무 미인이죠. 입을 막는 김에 은빛성 최고 미녀의 몸이 소문대로인지 맛이나 보고 죽일까요?”

너무나 달라진 소년의 무시무시한 농담에, 주희는 등골이 다 서늘해졌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흘겨보았다.

“어린 애가 어디서 그런 못된 말을 배웠어?”

준은 겁을 먹었음에도 강하게 나오는 그녀에 태도에, 그만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

“에휴…그러게, 왜 그렇게 눈치가 빨라요.”

소년의 말은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연금비약을 정제한 건 네가 아니지?”

준의 태도가 조금 풀어지자 주희는 조금 안심이 된 듯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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