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이씨 가문의 반격
가씨 가문에서 관리하는 가장 큰 시장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한 건물 위, 비대한 몸집의 사내하나가 이 광경을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가헌이라는 인물로, 실로 가씨 문중의 핵심 인사 중 하나였다.
은빛성의 삼대 가문 중 두 가문이 힘없이 주저 앉자, 가씨 가문은 활기의 물약 가격을 어느새 세 배까지 올린 상태였다. 당연히 수익도 며칠 사이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올랐다.
물론 가격을 올렸을 때 많은 용병들이 불만을 표시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약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세 배나 되는 값을 치르고 활기의 물약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가헌은 이 광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래도 사겠다는 사람투성이군. 큭큭… 그나저나 이놈의 날씨는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아무래도 저녁에는 술집에 가서 열이나 좀 식혀야겠군. 쯧쯧! 저번에 그 계집애가 참 예뻤는데 말이야. 개미허리만큼 가느다란 허리로 아주 사람을 죽였어.”
돼지 같은 사내는 그날 밤 자신을 빠져나올 수 없는 쾌락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여인을 떠올리며 욕정으로 눈을 번들거렸다.
그 때, 가헌의 눈에 길 끝자락에 잔뜩 몰린 한 무리의 용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에 보이는 용병들은 상처 치유약을 얻기 위해 서로 밀치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 가씨 가문의 시장에서는 언제나 이런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손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끊임없이 불평을 해댔다.
“쯧쯧, 이 놈의 용병들은 몸만 좋았지 생각이 없는 놈들이야. 매일 같이 난동을 부리다 쫓겨나도 다음 날이면 또 싸움질을 하니 원…”
그가 막 가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을 향해 손짓을 하려는 순간, 또 다시 짜증스러운 소리가 그의 뒷등을 때렸다.
“이씨 가문 시장에서도 상처 치유약을 판매합니다!”
그 소리에 북적거리던 거리가 잠시 조용해 졌다.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다가 잇달아 욕을 퍼부었다.
“이런 고리타분한 수단으로 내가 반나절을 기다린 자리를 빼앗으려고?”
이런 일은 활기의 물약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면서, 그간 몇 번이나 있었던 일 이었다.
결국 거짓말에 속은 손님이 빠지면 뒷자리에 있던 사람이 앞줄로 옮겨가고, 거짓말이 밝혀지면 주먹이 오고 가고…요 며칠사이 가씨 가문의 시장에서 매일 같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장을 장악하자마자, 가격을 올리고 무례하게 구는 가씨 가문의 태도에 진력이 난 일부 용병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씨 가문의 시장으로 투덜대며 발길을 옮기기도 했다.
가헌은 몇 몇 용병들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풋…이씨 가문? 언제 적 이씨 가문을 찾고 있어. 이제 은빛성 3대 세력 따위는 없어. 오직 우리 가씨 문중이 지배할 뿐이지.”
결국 앞서 들린 큰 외침소리는 북적거리는 소리 속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묻혀버리고, 가씨 가문 시장에서는 여전히 활기의 물약을 구하기 위한 용병들의 고함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가헌의 달콤한 꿈은 얼마 가지 못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몇 몇 용병이 가씨 가문의 시장을 벗어난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십여 명의 용병이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손에 들고 나타난 물건은 가씨 가문에게는 악몽의 시작과도 같은 재앙의 씨앗이었다.
“이씨 가문에서도 상처 치유 약을 팔아요!”
일제히 들리는 외침소리에 시장통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지자, 가장 먼저 뛰어 들어온 사내 하나가 즉시 가판대 위로 올라가 허리춤에 찬 장검을 꺼내들어 자신의 팔을 그어버렸다. 그러자 검이 스쳐간 자리에서 순식간에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잠시 후 자신의 팔을 그은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초록색 옥병을 기울였다.
이윽고 옥병에서 나온 붉은색 점액이 상처를 덮자 상처가 서서히 굳어가며 얇은 보호막이 생겼다.
이 장면을 본 용병들은 눈이 시뻘개져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씨 가문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생명의 물약’입니다! 약효가 좋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활기의 물약’보다 저렴하다구요! 뭘 꾸물거려요? 계속 이놈들한테 바가지나 뒤집어쓰고 있으려구요?”
가씨 가문의 바가지에 울분이 쌓였던 용병들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냅다 이씨 가문의 시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한편, 바위 위에서 팔에 상처를 냈던 용병은 미친 듯이 빠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함소리와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던 가씨 가문의 영업장에서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시장의 상인들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 있던 상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거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가헌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꿈과 음탕한 상상으로 눈을 번들거리던 사내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사라져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 * *
며칠 뒤, 가씨 가문의 회의실로 문중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소집되었다.
음침한 등불이 일렁이는 회의실의 책상 위에는 문제의 초록병이 있었고, 가헌은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연신 다리를 떨어댔다.
회의실의 가장 상석 중 한자리에는 하얀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사내는 거만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는데, 꽤나 준수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거만함과 음흉함으로 인해 썩 보기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이게 바로 이씨 가문에서 판매하는 ‘생명의 물약’입니다. 이 물건 덕분에 지금 우리 시장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가후는 애써 청년의 무례한 행동을 본체 만체하며, 책상 위의 옥병을 가리켰다.
“이씨 가문에서 어떻게 상처 치유약을 만든 거죠? 그들도 연금술사를 구했다는 건가요?”
이준의 숙적 가온이 옆에 앉은 흰색 옷을 입은 청년을 흘깃 보고는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가후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번에 경매장에서 만난 그 신비스런 연금술사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그때 그 자가 이씨 가문에 관심이 있는 듯 말을 하던데…이 ’생명의 물약’이 그 사람 손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좀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곡니가 굽실거리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3레벨 연금술사는 되어 보이던데요.”
3레벨 연금술사라는 말에 청년은 시녀 옷 안에서 움직이던 손을 아쉬운 듯 빼더니 앞으로 걸어가 옥병을 잡아 쥐었다. 그는 코 끝에 대고 옥병의 냄새를 맡더니 코웃음을 쳤다.
“개똥같은 소리…3레벨 연금술사? 이 ‘생명의 물약’이라는 것이 ‘활기의 물약’보다 약효가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약의 색을 보니 약을 정제한 놈은 생초짜군요. 연금술사 지망생이라면 모를까…제대로 된 놈이 아니에요. 다만 약재 조합표가 조금 특별하니 이 정도 효과가 나는 것뿐입니다.”
청년의 말에 가씨 가문 사람들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정말 3레벨의 연금술사라면 가씨 가문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흥…어쩌다 버러지 같은 놈이 좋은 처방하나 얻어서 만든 것 뿐이라구요.”
청년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허허…역시 유석님이군요. 단번에 이 약물의 수준을 꿰뚫어보다니…!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가온은 품평이 끝나자마자,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유석이라는 청년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하하, 그냥 감이죠 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유석은 겸손한척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거만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저의 ‘활기의 물약’이 이 물건보다 약효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차이가 심하지는 않습니다.”
가후는 청년의 말을 듣고는 불쾌한 듯 이마를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 ‘활기의 물약’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아마도 가격 때문이겠지요. 이씨 가문과 경쟁을 하려면 가격을 다시 조정하는 수 밖에 없겠군요.”
“가격을 조정한다고요?”
가후의 말에 유석은 이마를 찌푸리며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미 ‘활기의 물약’을 고가로 판매하면서 생긴 수입에 취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가격조정이 맘에 들지 않았다.
청년의 표정을 본 가후는 속으로 유석을 무례하고 생각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가씨 가문의 수장답게 여유로운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유석님, 지금 시장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예전 같으면 은빛성의 상처 치유 약의 시장을 우리가 모두 잡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우리도 가격을 낮춰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석은 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는 가씨 가문의 큰 어른이나 주위의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신의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저에게 약속한 마진은 그대로 유지하셔야 합니다.”
이쯤 되자 가후도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유석을 잃게 되면, 그야말로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될 것이 눈에 선했다.
“허허, 당연하지요. 유석님의 것은 저희가 꼭 약속대로 드리겠습니다.”
“네.”
유석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아, 유석님. 이제 ‘활기의 물약’이 거의 다 떨어져 갑니다. 그래서 수하를 시켜 경매장에서 약재를 구입해 오라고 해두었으니…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가후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 앉히며,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유석의 추잡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운 좋게 타르사막에서 기가 막힌 기집 하나 구했습니다. 이미 유석님의 방에 넣어두었으니 가서 마음껏 회포를 푸시지요.”
약을 정제해야 한다는 말에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던 유석은 타르사막의 여자라는 말에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정난 개새끼 같은 애송이가 무례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약만 아니라면 네놈의 수족을 잘라 개먹이로 주고 싶을 정도야.’
가후는 어른들 앞에서 수치도, 겸손도 모르고 욕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유석을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씨 가문을 이길 수만 있다면 똥물에라도 뛰어들 판에…결국 가후는 더럽고 치사해도 유석의 기분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 * *
잠시 후, 가씨 가문의 수하 하나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와, 가후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어색하나마 웃음을 띠고 있던 가후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감히 나에게 이따위 농간을 부려?”
가후가 살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의 몸에서 염력이 방출되어 작은 회오리가 형성되고,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가후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가온은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온 강력한 기운에, 급히 몸을 뒤로 빼며 아버지를 말렸다.
“아버지!”
가후는 가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염력을 거두며 자리에 쾅하고 주저앉았다.
“경매장에서 우리 가씨 가문에 약재를 판매하지 않기로 했다는구나!”
지금까지 유씨 가문의 경매장은 언제나 중립을 지켜왔던 터라, 이 소식은 상당히 놀라운 것 이었다. 가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후에게 다그치듯 질문을 던졌다.
“그럴 리가요. 유씨 경매장은 여태 중립 태도를 보이지 않았어요?”
“이씨 가문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무슨 능력으로 유씨 경매장에서 우리한테 약재를 판매하지 못하게 해요?”
가온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가후는 이를 앙다물고 짜증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빌어먹을…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