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37화 (37/818)

제37화. 횡재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지고, 사내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주희는 초조한 듯 자꾸만 입술을 핥았다.

“흠…제가 그렇게 많은 약재를 사서 어디에 썼는지는 대충 짐작을 하고 계시겠지요?”

사내의 말에 주희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그녀는 이 사내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 가슴을 졸이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마도…상처 치유약을 정제해 이씨 가문을 도우려고 하신게 아닐지…”

정체불명의 연금술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이틀이 지나면 이씨 가문과 가씨 가문이 서로 상처 치유약을 내놓으며 경쟁을 시작할겁니다. 일반적으로 상처 치유약은 아주 낮은 레벨의 약재들을 필요로 하지요. 하지만 은빛성에서 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의 양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경매장 뿐 일겁니다. 앞으로 이 두 가문의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약의 가격과 품질…그리고 약재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앞으로 유씨 가문의 경매장에서 가씨 가문에게 어떤 약재도 주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약로가 말을 마치자 준은 검은 망토 사이로 주희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자신은 이제 수련을 떠나야하니, 길으면 두 달정도 이 곳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수련을 떠난다면, 도저히 마음 놓고 수련에 몰두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이 거래는 그가 수련을 떠나기 전 완수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주희도 시원스럽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승님…죄송하지만 저희 경매장에는 가문간의 경쟁에는 끼어들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저희가 스승님의 요구를 들어드리는 것은 간접적으로나마 두 가문의 경쟁에서 한 쪽 가문에 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무료로 용의 정수 두 알을 정제해 드리지요.”

약로의 짤막한 한마디에 주희의 동공이 흔들렸다.

“스승님, 이건 연금비약문제가 아니라……”

“세 알”

“스승님……”

이쯤 되자 주희와 곡니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알.”

결국 둘은 약로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용의 정수 5알이면 수십만 골드는 될 것이다.

이 정도 제안이라면 제국 전체에서 별 볼 것 없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씨 가문 하나 정도와 등지는 대가치고는 수지맞는 장사였다.

주희는 눈을 질끈 감은 뒤 고민하는 척을 해보았지만, 이미 그녀의 눈앞에는 황금이 오락가락하고 있었고, 귓가에는 수십만 골드가 짤랑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스승님이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 저희도 어쩔 수 없지요. 앞으로 가씨 가문의 사람들은 저희 경매장에서 단 한줄기의 약재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허허…좋아요. 그럼 한달 뒤 물건을 가져다 드리지요. 물론 조건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스승님 걱정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아둔한 여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주희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은빛성의 작은 가문 하나를 간접적으로 내치는 대가로 4레벨 이상의 연금술사의 환심을 사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십만 골드의 수익까지 챙기다니…아무리 곱씹어 봐도 횡재였다.

* * *

약재를 들고 만족스러운 발걸음으로 경매장을 나서는 사내를 보자, 주희는 힘없이 어깨를 떨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아무래도 저분이 어떤 분인지 의심하는 것은 그만둬야 할 것 같네요. 매번 이렇게 예상을 뛰어넘어버리니…이제는 무조건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아요.”

주희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사람처럼 체념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곡니 역시 주희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장탄식을 내뱉었다.

“용의 정수 다섯 알이라니…4레벨의 연금술사 치고는 통이 너무 크군요. 분명히 적어도 5레벨이겠지요. 그래도 아가씨는 대단하십니다. 만약 저였으면 세 알이라고 말했을 때, 벌써 대답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섯 알까지 버티시다니…정말이지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주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아뇨, 저도 못 참았어요. 그저 너무 놀라서 대답을 못한 거죠. 제 대답도 곡니 스승님과 같았어요. 저분이 제가 대답을 못 하는 것을 거절이나 고민이라고 착각한 덕에 횡재를 한 것뿐이에요.”

주희의 말에 곡니가 즐겁다는 듯 연신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어쨌든…잠시 정신 줄을 놓은 덕에 수십만 골드를 챙겼네요.”

그녀는 곡니에게 달콤 쌉싸름한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가씨 가문은 안됐군요.”

곡니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씨 가문과 사내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왜 이씨 가문을 저렇게 도우려고 할까요? 용의 정수 다섯 알을 공짜로 제공하면서까지, 도울 이유는 없을텐데 말이죠. 가한 제국의 연금술사 중에 저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고…저런 분이 이씨 가문과 뭔가 끈이 닿는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될 것이구요. 그랬다면 진작에 이씨 가문이 두 가문을 제치고 은빛성을 차지했을 테니까요. 대체 어떤 분일까요?”

하지만 주희는 이미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을 포기한 듯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죠. 지금 중요한건 이씨 가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는 것. 어떻게든 저 분의 환심을 사야한다는 것. 그 두 가지 뿐이에요. 용의 정수 뿐 아니라, 저 스승님이 이씨 가문에 제공하는 연금 비약의 재료는 어차피 저희가 제공하게 될 테니까요. 가씨 가문이야 어찌되든 유씨 가문의 은빛성 경매장의 수익은 곱절은 뛰게 될거고…”

그녀는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이 유씨 가문 전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 * *

한편, 경매장을 나선 준은 낮은 숨을 길게 내쉬며 스승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고맙긴, 가씨 가문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수행이 되기나 하겠느냐.”

* * *

마을로 돌아오자 모든 사람들이 부러움 섞인 시선으로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소문이 이미 마을 전체에 퍼진 듯 했다.

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묵묵히 걸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골목 모퉁이에서 빨간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그를 놀래켰다.

“이준 오라버니? 드디어 찾았네요.”

빨간 옷을 입은 소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준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이준의 무뚝뚝한 태도에 이안은 금세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촌장님께서…오라버니를 서재로 부르셨어요.”

이준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준은 가볍게 웃음을 짓고는 즉시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준 오라버니, 저번에 고마웠어요~.”

이안은 준이 웃음을 보이자 조금 안심이 된 듯, 우물쭈물 거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기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준은 감사를 표하는 그녀를 너무 냉담하게 대하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야, 괜찮아. 신경쓰지마.”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오라버니! 가람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모집한다고 하던데…오라버니도 가실건가요?”

“아마도.”

준은 등을 돌린 채 대충 대답을 하고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이준의 대답에 환히 웃으며 이준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아쉬운 듯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떴다.

* * *

이한의 서재에서는 세 장로가 촌장과 무언가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준이 문을 두드리자 즉시 말을 멈추었다.

“아버지, 찾으셨어요?”

“음…그래. 들어오너라.”

준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이한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세 장로가 자신을 훑어보는 것을 느꼈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쳐다봤다.

“너…그 신비스러운 분을 만난 적 있지?”

아버지의 질문에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거라도 있느냐?”

“그 분과 안지 얼마 안됐는데, 저야 잘 모르죠. 연금술사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아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자, 이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걸 말이라고……”

이윽고 정체불명의 사내에 대해 세 장로와 아버지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지만, 준은 모든 질문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할 뿐 이었다.

“이 녀석,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무슨 질문에도 모른다는 말만을 반복하는 이준을 보며, 이한은 다시 한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래…가보거라. 혹시 그 분을 다시 만나거든 절대 심기를 건드리지 말거라. 우리 가문의 앞날이 모두 그분에게 달려있으니…”

하지만 준은 어깨를 으쓱할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바로 그 때, 옆에서 가만히 준을 훑어보던 큰 장로가 의혹에 찬 눈길로 입을 열었다.

“에헴…준아…호흡을 듣자 하니 염력이 더 강해진 듯 하구나.”

큰 장로의 말에 이한도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너…투사가 되었느냐?”

촌장과 큰 장로의 반응에 나머지 두 장로 역시 놀란 토끼눈을 하고 준을 바라보았다.

“아…”

준은 뒷통수를 긁적이며, 멋쩍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수련을 하다…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됐네요.”

이한은 놀라는 것도 지친 듯 고개를 저으며 손을 저었다.

“그래…어찌됐든 축하한다. 시간 나면 레벨시험 공회에 가서 표식도 받아두고…”

준은 머리를 끄덕인 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가도 되나요? 그런데 저도 진짜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하다보니…”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어서 가봐.”

아들의 장난을 눈치 챈 촌장이 웃음을 터뜨리자, 세 장로가 굳은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세 명의 장로들도 과거 염력 회오리를 모아 투사가 될 때 까지 두 세 번의 실패를 겪었었다.

하지만 이 어린 소년이 ‘자기도 모르게’ 라고 말을 하자 몹시 기분이 상한 것이다.

준이 아버지의 꾸중 아닌 꾸중을 듣고 자리에서 물러나자, 세 장로는 어색하게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정체불명의 사내로부터 대량의 연금비약을 받은 이씨 가문은 일부러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암암리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세 장로와 촌장은 가씨 가문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문중에 함구령을 내리고, 정보가 새나갈 경우 이를 발설한 자를 처벌하겠다고 엄포까지 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씨 가문이 잠잠하자 가씨 가문에서는 더욱 앞뒤를 모르고 날뛰었다.

이제 그들은 거리낌 없이 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까지 시장에 남아있는 상인들을 전부 데려가려고 하는 판 이었다.

그러나 이씨 가문은 이런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 이었다.

결국 그 일이 있고, 이틀 만에 또 다시 수많은 상인과 그간 친분을 유지하던 이들이 이씨 가문과 등을 돌리고, 은빛성은 그대로 가씨 가문이 평정하게 되는 듯 했다.

* * *

그리고 다시 이틀 뒤, 햇볕이 따가운 화창한 어느 날, 가씨 가문의 시장은 더욱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활기의 물약’을 판매하는 곳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시장 안은 온통 물약에 눈이 뒤집힌 용병들이 고함지르고 욕 하고 싸우는 소리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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