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협력
이씨 가문의 수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흠…사실 저는 이씨 가문과 특별히 좋은 연이 있지는 않습니다.”
연금술사의 말 한마디에 좌중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사실 곡니도 굽실거릴 정도의 대단한 인물이 이씨 가문을 도와줄 이유 따위야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원망할 일은 아니지만, 그의 말 한마디는 절벽 끝에 서있는 이씨 가문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 이었다.
“하지만 도련님과는 무언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촌장님과 이씨 문중이 저를 믿어주시기만 한다면, 함께 일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한데…”
연금술사의 한 마디에 장내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자리에 있는 이씨 문중의 모든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물론이지요! 선생님과 협력할 수 있다면, 저희 가문에는 더 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사실 이씨 가문 정도의 작은 가문이라면 함께 일을 하기는커녕, 2레벨 연금술사를 초대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곡니가 숙이고 들어갈 정도의 연금술사이니, 분명히 3레벨 이상의 연금술사일 텐데, 지금 그가 먼저 손을 뻗어온 것이다.
검은 망토의 사나이는 이한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에 끼어진 작은 자주색 반지가 반짝거리며 빛을 발했다.
이한은 망토 밖으로 드러난 소년 같은 손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 어딘가 익숙한 손 이었다.
그러나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를 생각할 틈도 없이, 갑자기 쏟아져 나온 대량의 약병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10명 이상은 앉을 수 있는 회의실의 커다란 책상에 빈틈없이 작은 옥병들이 늘어선 광경은 보기만 해도 장관이었다.
“이것은 제가 직접 개발해낸 ‘생명의 물약’ 이라는 상처 치유제로, 일단은 1,300병 정도만 만들어 보았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약 중에 최고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가씨 가문에서 판매하는 ‘활기의 물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 * *
장내의 모든 눈이 일제히 책상 위의 약병으로 향했다.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연금비약을 본 적이 없었다.
놀라기는 이옥도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어마어마한 양의 연금 비약을 바라보다가 반짝이는 눈으로 정체불명의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창가에 앉아 있던 소녀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상 위를 바라보다가 이내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은의 눈빛은 존경이나 선망이라기보다 일종의 의심이나 의문에 가까웠는데, 그녀는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금술사를 바라보다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흠…흠…”
어색함과 놀라움이 뒤섞인 정적을 깬 것은 사내의 헛기침이었다.
“어……”
이한은 그제서야 어색하게 웃으며 검은 망토로 몸을 둘러싼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체불명의 사내를 바라보는 이한의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상처 치유약을 내 놓을 수 있는 배포는 평범한 연금술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정말 감사합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가씨 가문에 결코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인사를 마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스승님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면…연금 비약을 판매하고 남은 이윤의 9할을 스승님께 드리고 저희가 1할을 가져가도 되겠는지요?”
말을 마친 이한은 불안한 듯 사내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상 이씨 가문의 명운이 달린 거래였다.
그는 상대가 이 제안을 맘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했다.
“허허.”
검은 망토 사나이가 웃으면서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이한은 얼굴이 새파래져 자신이 방금 한 말을 어떻게 하면 주워 담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잠깐 사이에 그는 감히 자신을 도와주러 온 이와 거래를 하려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했지만, 연금술사의 입에서 또 다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허허, 촌장님…비록 이 연금비약을 제가 정제하긴 했으나 판매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어차피 제가 직접 이 약을 팔지 못하니, 누군가는 저 대신 이 일을 해주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저만 그렇게 이득을 보겠습니까. 저는 이씨 가문과 대등한 입장에서 일을 하고 싶은 것 이지, 수족으로 부리려는게 아닙니다. 반반으로 하시지요.”
연금술사의 한마디에 장내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정적에 휩싸였다.
회의실 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볼을 꼬집고 옆 사람에게 지금 들은 말은 재확인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한은 멍한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하는 것 조차 잊고 한참을 서 있다, 정신을 차린 듯 연신 웃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스승님! 너무나 큰 도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울 때 저희를 찾아와 주신 것 자체로도 큰 도움인데, 5할이나 되는 이윤을 챙길 수는 없습니다…그러니…”
그러나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이한의 말을 가로막고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하…이 정도 이윤은 저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실은 더 적게 받아도 상관이 없지만, 촌장님께서 미안한 마음에 거절을 하실까 싶어 절반이라도 받겠다고 하는 것이니 사양말고 받아주시지요.”
사내의 시원스런 태도에 이한은 화색이 만연해 고개를 끄덕였다.
“판매에 대해서는 모두 이씨 가문에게 믿고 맡기겠습니다. 편한대로 처리하시지요. 조만간 시간이 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는 용건을 마치자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이만 볼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배웅은 하지 않으셔도 되니 마음쓰지 마십시오. 제가 원체 그런 것을 불편해 하는 성격이라…”
그는 말을 마치고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바로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
잠시 후, 사내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참, 아드님이 정말 괜찮은 아이더군요. 허허! 제가 참 고맙습니다.”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달아나듯 모습을 감췄다.
……
이한은 한참을 영문을 모른 체 감격하다가 정신이 들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우리 준이와 저분이 보통 관계가 아닌 것 같구나. 아니면 이렇게까지…”
세 장로 역시 무언가 감을 잡은 듯 연신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호의를 베푸는 것부터 시작해 마지막 인사말까지, 아마도 사내를 움직인 것은 촌장의 아들인 것 같았다.
연금술사의 마지막 말에 자리에 있는 아이들이 질투심에 불타는 사이, 창가에 앉은 아름다운 소녀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연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정체불명의 사내는 대청을 빠져나와 천천히 거리를 걷다가,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스승님, 그 상황에서 저를 언급하시면 어떡해요?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스승님 존재를 밝혀야 된단 말이에요.”
“허허, 정말이지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구나. 이놈아. 그럼 스승이 제자 칭찬도 못 하느냐? 그럼 네가 저 혼자 잘 자랐겠느냐? 네 아버지가 잘 기른 덕이지. 나는 스승된 사람으로 좋은 제자를 얻은 것에 감사를 표현한 것 뿐이다.”
약로의 목소리에서 진한 애정을 느낀 준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이렇게 친한 척을 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는 내가 너희 가문에 뭘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셨을게다. 아주 신중하신 분이니까.”
스승의 논리정연한 말에, 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경매장에 가자. 정제한 용의 정수도 가져다주고. 이 몸은 누구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연습용 약재들도 다 떨어졌으니, 이제 다른 약재도 좀 필요하고.”
약로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럼 저도 이제 1레벨 연금술사가 된 건가요?”
약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쯔쯧…이놈아 약 좀 정제했다고 바로 연금술사가 되면, 연금술사가 그리 대단한 직업이겠느냐. 상처를 치료하는 치료약은 연금비약 중에 가장 제조가 쉬운 물건이다.”
스승의 냉정한 말에 제자는 마음이 상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연금술사가 될 수 있습니까?”
“흠…1레벨의 연금술사로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알약 형태의 연금비약 한 종류를 정제할 줄 알아야한다. 이런 물약 말고.”
“그럼 아직도 갈 길이 머네요.”
약로의 대답을 들은 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겨 경매장으로 향했다.
* * *
깨끗한 책상 위에 진열된 작은 옥함에는 연한 푸른색을 띤 연금비약이 들어 있었고, 연금비약의 반들반들한 표면에서는 영롱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주희와 곡니는 옥함속의 용의정수를 바라보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준은 그런 두 사람을 망토 사이로 훔쳐보며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용의 정수가 스승님께서 재료를 아끼면서 대충 만들어 낸 것이란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늘 그가 내민 용의 정수는 자신이 투사가 될 때 사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약로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대충 만든 것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해 있었다.
“스승님의 정제술은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이 용의 정수는 5레벨의 연금술사가 정제한 용의 정수에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곡니는 약로가 정제한 연금비약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닙니다.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이렇게라도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호호, 스승님 별 말씀을 다 하세요. 스승님께서는 저희 경매장의 가장 큰 고객이시고, 저희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사내의 겸손한 말에 주희는 끊임없이 교태를 부리며, 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정체불명의 연금술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가슴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여기에 적힌 약재들을 좀 구해줄 수 있을까요?”
주희는 공손한 자세로 사내가 꺼내든 종이를 받아든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번일로 이 사내를 도와주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도 티끌만큼의 불만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종이를 확인하자마자 즉시 시녀를 불러 종이를 넘겼다.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주희 아가씨,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내의 질문에 주희는 이번에도 연신 눈웃음을 지었다.
“말씀하세요, 스승님.”
“가씨 가문이 여기에서 약재를 많이 구입하지요?”
뜻 밖의 질문에 주희는 잠시 긴장한 표정으로 곡니와 눈길을 주고받았다.
“얼마 전 가씨 가문에서 약 10만 골드 정도의 약재를 사갔습니다. 약재는 모두 상처 치료와 지혈에 쓰이는 것 이구요.”
사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주희는 다소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었기에 진작부터 이 정체불명의 연금술사가 이씨 가문의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후 사정이야 어찌됐든 자신들이 가씨 가문과 거래를 한 것은 사실이니, 그런 면에 있어서는 이 사내와 자신들이 대척점에 서 있는 모양새가 되고 만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