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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35화 (35/818)

제35화. 방문

이윽고 약솥의 온도가 변화하면서, 검은색 알맹이들이 녹아내려 점액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두 재료가 합쳐져 만들어진 점액이 더욱 짙은 붉은 색을 띤 액체로 변화했다.

마지막 재료까지 녹여내는데 성공한 소년은 길게 긴 한숨을 내쉬며 약솥에서 손을 뗐다. 그가 손을 떼자 약솥의 불꽃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제자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은 사이, 약로는 손을 들어 약솥의 뚜껑을 열었다.

노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자, 붉은색의 끈끈한 액체가 수백 개의 작은 액체로 나뉘어져, 옥병으로 날아 들어갔다. 약로는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이준에게 건넸다.

“첫 정제 성공을 축하한다!”

“하하…!”

제자는 자신의 첫 성공작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

노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그 후로 며칠간 이준은 하루 종일 굴안에 틀어박혀 약을 조제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저장반지를 가득 채워가는 상처 치료제를 볼 때 마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준이 산굴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이씨 가문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상인들마저 가씨 가문에 넘어가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가씨 가문에서 이씨 문중의 상인들에게 이런 저런 조건을 내걸어 거래를 끊게 만들었다고도 했다.

결국 그 소문은 이한을 비롯한 이씨 문중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인내심을 바닥나게 만들었고, 일부에서는 가씨 가문과 전면전을 벌이자는 둥, 가후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까지 일고 있었다.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일주일 사이에 우리 이씨 가문의 수입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가게가 전부 문을 닫게 생겼다고요!”

셋째 장로가 울분을 참지 못 하고 소리를 쳤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곡니 대사가 우리에게 몇 백 병의 상처 치유제를 정제해주기는 했지만…가씨 가문의 상처 치유제에 비하면 양이 너무 적네. 그래도 며칠은 버티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상황은 똑같아질 걸세.”

큰 장로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쉴 뿐, 그도 특별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죠. 만일 곡니 대사가 전폭적으로 우리를 지원해 준다면 수량을 대폭 늘려 경쟁을 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는 어차피 유씨 가문의 경매장 사람이고 은빛성 가문의 경쟁에 개입하는 분은 아니니…실제로는 이 정도 도움도 고맙다고 여겨야 할 판입니다.”

이한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씨 가문의 상품은 곡니가 만든 것보다 질은 떨어졌지만, 일단 양이 많고 가격이 저렴해 당해낼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도 연금술사가 있다면…”

회의실에서 누군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연금술사라는 것이 그리 흔하고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왜 연금술사가 꿈의 직업이었겠는가. 가씨 가문에서 비록 1레벨 이지만 연금술사를 섭외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좋지만, 그건 대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성이 떨어졌다.

“누나, 1레벨 연금술사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우리 집안을 이렇게 만들어 버리다니…”

동생의 말을 들은 이옥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금술사는 워낙 독특한 직업이니까…사실 1레벨 연금술사라면 끽해야 1성 투사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으니까,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 가문에도 그를 이길 사람은 많아. 하지만 대투사나 그 이상이 되더라도 1레벨 연금술사가 만들어내는 연금비약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결국 수 많은 강자들이 연금술사를 싸고 도는 거야. 그러니 그 연금술사를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지.”

그녀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어나갔다.

“많은 투사들이 연금술사를 벌집에 비유해. 아무리 작더라도 한번 쑤시면 다른 투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드니까. 달콤한 꿀을 따기 위해 달려들었다가는 목숨을 잃게 되는 거지. 연금술사 한 명을 잘못 건드리면, 최소한 몇 백 명의 투사가 그를 지키겠다고 모여들어…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 은혜를 입고 싶어 하는 사람, 거래를 트고 싶은 사람,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돈 때문에 꼬이는 사람…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연금술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 환장한 투사는 대륙 전체에 넘쳐나니까.”

이혁이 부러운 듯 눈을 반짝이자 이옥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돼. 연금술사가 괜히 귀한게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니니까. 너는 투사로서 실력을 키우는 일에만 집중해.”

누이의 냉정한 말에 동생은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 이씨 가문에서 연금술사가 나올 일은 없어.”

이옥은 그렇게 말하며 문득 검은 망토의 사내를 떠올렸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내는 자신의 철천지 원수와 닮아 있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말도 안돼.’

그녀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분 나쁜 느낌은 그 놈밖에 없단 말이지…아니야 아니야!’

이준을 생각하다보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 이옥은, 문득 창문가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바라보다가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주위의 모든 소년들이 그녀를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그럴만한 미모라는 점이 그녀를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저렇게 훌륭한 아이가 그런 새끼한테 관심을 보이다니…’

이옥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돌렸다.

이은은 무심한 듯 책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자신은 이씨 가문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10년이나 지내왔으니, 가씨 가문이 잘 되고 이씨 가문이 망하는 것이 기분이 좋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준의 가문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흠…적당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느긋하게 책을 읽었다. 이준이 없을 때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흘러가고, 결국 모두가 체념한 듯 회의장 안에 적막이 감돌 무렵, 가문의 호위 무사 하나가 숨을 헐떡거리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촌장님! 밖에 검은 망토를 입은 사람 하나가, 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순간 이한과 장로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회의실 안에 있던 몇 몇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기까지 했다.

“빨리 모셔오게!”

그러나 이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토록 듣기를 원했던 노인의 목소리가 회의장 안에 울려 퍼졌다.

“허허, 모실 필요 없습니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검은색 망토를 뒤집어 쓴 사내가 방안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종일관 무관심한 표정으로 책을 읽던 이은의 표정에도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 * *

이한과 세 장로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사내를 보자마자 돌아가신 부모님이라도 다시 만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선생님, 가문에 일이 있어서 미처 마중을 못 나갔습니다. 이렇게 직접 오시게 하다니…정말 송구스럽습니다.”

“허허, 별 말씀을요.”

이한과 세 장로는 잽싸게 촌장의 옆자리로 그 사내를 모셨다.

“선생님, 이리로 앉으시죠.”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는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걸어가 이한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한과 장로들이 낯선 사람을 지나치게 공손하게 대하는 것을 보자,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들이 하나 둘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에게 쏠렸다.

자리에는 아직 그 사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자도 많았기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의 정체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 전체에 알려졌을 즈음, 회의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뜨거운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누나, 저 사람은 그날 경매장에서 봤던 그 신비한 연금술사 아니야?”

이혁 역시 그 날 경매장에 따라 갔었기에 사내를 알고 있었다. 이옥은 동생의 질문에 살짝 머리를 끄덕이고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정말 우리 가문에 직접 찾아 오셨네…보아하니 우리 가문과 협력하자고 했던 말이 그냥 예의상 던진 말이 아닌가 봐. 어쩌면…이번 일이 잘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기대에 찬 사람들과 달리 자리에서 단 한명,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은이었다.

이은은 그 사람의 행동과 말투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바라보다가 무엇이 이상한지 찾지 못하자, 결국 조용히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한은 손수 따뜻한 차를 건네며 그를 극진하게 모셨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 사내였기 때문이다.

“하하, 저희 가문에 직접 방문을 해 주시다니, 선생님께서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왔는데, 이씨 가문에서 제 축기영액으로 염력이 몇 단 껑충 뛰어올랐다는 소년이 있다 길래, 그 천재소년을 보고 싶어서 들어왔습니다만…”

연금술사의 말에 이한은 급히 고개를 둘러 장내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오늘 아들은 자리에 오지 않은 듯 했다.

“허허, 아닙니다.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오는 길에 도련님을 만났습니다. 꽤 훌륭한 아이더군요. 마음에 들었어요.”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는 손을 들어 사람을 시켜 이준을 불러오라고 하려는 이한을 제지 시켰다.

“좋은건 다 그 녀석 몫이네.”

이혁은 짜증이 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의 말투에는 감출 수 없는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이옥도 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턱을 괴며 잠시 불만스러운 생각을 가졌다.

‘그 새끼가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고…?’

구세주의 입에서 아들에 대한 칭찬이 나오자, 이한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허허…촌장님, 듣자하니 요즘 이씨 가문에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다지요?”

이한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민망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 하고 씁쓸하게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정체불명의 연금술사는 이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여유롭게 웃으며 먼저 운을 뗐다.

“허허…제가 듣기로는 가씨 문중에 연금술사 하나가 들어오는 바람에, 이씨 가문이 상당히 난처해졌다고 하던데…”

사내가 먼저 말을 걸자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그의 말투에서는 분명한 호의가 느껴졌다.

상대가 먼저 호의를 보이자, 이한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만…딱히 뾰족한 수가 없어서 이렇게 모두 모여 대책을 고민해보는 중이었습니다.”

이한의 이야기를 들은 검은 망토의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혹시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야기가 이쯤 흘러가자 이한은 일단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해볼까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그 연금술사가 나타나 상처 치료제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뒤로, 저희 가문은 이미 가씨 가문에게 밀려 수익이 반토막 난 상태입니다. 아니, 사실은 반 토막 이상이지요… 게다가 저희 가문과 관련된 사업장이 빠르게 가씨 가문에게 넘어가고 있으니… 이 상태라면 가씨 가문이 은빛성을 접수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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