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첫 경험
경매장을 나선 이준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맴돌다가 구석진 골목을 찾아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몇 번이나 기쁜 표정으로 손 위에 놓인 자주색 반지를 살펴보았다.
저장반지는 ‘납석’ 이라 불리우는 특별한 금속으로 만들어지는 반지로, 그 안에는 이공간이 존재해 생명이 있는 모든 물건을 보관할 수 있었다.
비록 가장 낮은 단계의 반지였지만, 그래도 지금 그의 반지 안에는, 작은 방 하나 크기만큼의 공간이 있었고, 이씨 문중에서는 아버지와 세 장로 외에는 그 누구도 이런 것을 갖고 있지 못했다.
준은 해맑게 웃으며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그의 저장반지를 가슴팍에 집어넣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 *
작은 길을 따라 마을에 도착하자, 아버지의 회의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준은 의아한 마음에 조심스레 문틈을 통해 무슨 일인지를 훔쳐보았다.
“가후! 이 빌어먹을 노인네가 아주 눈에 뵈는 것이 없구나!”
아버지는 격노한 나머지 시뻘겋게 닭아 오른 얼굴로 책상을 내리치고 있었다.
“우리 가문 시장의 상인들이 이미 많이 빠졌네. 그나마 시장에 남은 상인들도 마음이 뒤숭숭해서 몰래 가씨 가문에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보름도 안 돼 문을 닫게 생겼어.”
이한과 이야기를 나누는 둘째 촌장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차라리 그 1레벨 연금술사를 없애 버리는건 어떻겠나?”
성격이 급한 셋째 장로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하지만 이한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지금 그 연금술사 곁에는 가씨 가문에서 가장 강한 투사들이 호위를 서고 있을 겁니다. 소문 없이 제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치를 수는 없으니…”
“하지만 이렇게 질질 끌면 우리 손실이 너무 크네. 시장의 이윤이 우리 가문의 가장 큰 수입원인데…이대로 가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일세.”
셋째 장로가 분하다는 듯 씩씩 거렸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턱이 없었다.
그 때, 첫 째 장로가 묘안을 제시했다.
“그 날 경매장에서 본 신비한 인물이 기회가 된다면 우리와 함께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2레벨 연금술사인 곡니가 절절 매는 것으로 보면 적어도 3레벨 이라는 소리인데…”
그러나 이한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예의상 하는 말이었겠지요. 곡니 정도만 되어도 저희 가문과는 연을 맺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 이상의 수준에 있는 연금술사가 이씨 가문과 협력해서 얻을 것이 뭐가 있다고…”
“그럼 이대로 앉아서 가씨 가문이 은빛성을 집어삼키는 것을 지켜보자는 소리인가!”
준은 장로들과 아버지의 대화를 듣고는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 * *
방으로 돌아온 준은 약재를 챙겨 산굴로 향했다. 그는 산굴에 도착하자마자 가슴속에서 반지를 꺼내 염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반지에서 자주빛 불빛이 몇 번인가 반짝거리다가 직경이 50cm 정도 되는 약솥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붉은색의 약솥 주위에는 신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구체의 아래쪽에는 흉악하게 생긴 두 개의 뱀 머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쩍 벌린 뱀의 입은 불이 통할 수 있게 텅 비어있었다.
한편 구체의 뚜껑에는 또아리를 튼 뱀이 조각되어 있었고, 뚜껑에는 기묘한 구멍이 하나 있었다. 그 뚜껑은 바로 약재를 넣는 구멍이었다.
이에 더해 뚜껑에는 얼음 속성의 은으로 만든 작은 구멍이 몇 개 나 있었는데, 그 구멍은 고온으로 인해 약솥이 터지지 않도록 고안된 것 이었다.
또, 약솥의 한가운데에는 특수한 금속으로 만든 투명한 거울이 있어 약이 정제되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약솥의 겉면에는 온갖 기이한 생명체들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 넘치는 모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준이 약솥을 천천히 훑어보고 있는 동안, 어느새 약로가 나타나 약솥에 대해 말을 꺼냈다.
“이구 약솥이라…너 같은 초짜에게는 아주 괜찮은 녀석이야.”
“이구요?”
“약솥에도 등급이 있다. 일반적으로 불구멍이 많으면 등급도 높고 귀한 것이지. 약솥에 구멍을 뚫는 것은 아주 정밀한 계산이 필요한 일이야. 조금만 계산이 빗나가도 쓸모가 없어지니 구멍이 많을수록 계산도 복잡해지는 법이거든…물론 많은 불 구멍을 다루려면 그만큼 연금술사의 역량도 뛰어나야하니 초보 연금술사에게는 두 개가 딱이지.”
약로의 친절한 설명에 준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죠?”
“우선 이놈과 친해져야지. 한 손을 불 구멍 위에 놓고 염력을 불어 넣어 보거라.”
약로의 말에 준은 천천히 불구멍을 만져보았다. 눈을 감고 몸안의 염력을 움직여 손바닥으로 이동시키자, 그의 손바닥이 옅은 황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손바닥에 있던 염력이 뱀의 입을 통해 약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기묘한 소리와 함께 뱀의 몸통을 타고 흘러 들어간 염력은, 불꽃으로 변해 약솥 안에서 활활 타올랐다.
손바닥에서 불이 나자 준은 깜짝 놀라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손바닥이 전혀 뜨겁지 않았다.
“음, 좋아. 처음 시도했는데 바로 불꽃으로 변화시키다니. 생각보다 쓸 만하구나.”
약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나온 불꽃은 약을 정제할 수 있는 불은 아니다.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나무 속성을 끄집어내서 약솥에 넣어 보거라.”
약로의 지시에 준은 눈을 감고, 영혼 탐지 능력으로 자기 안에 있는 나무 속성을 찾아보았다.
“찾았느냐?”
조용히 눈을 감고 있기를 10여분, 준이 눈을 뜨자 약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도 처음으로 나무 속성을 찾을 때는 30분 정도가 걸렸었다.
“호오…내가 제자를 잘 고른 것 같구나. 나도 처음에는 30분 정도가 걸렸느니라.”
스승의 다정한 칭찬에 조금 멋쩍어진 준은 말없이 웃으며 다른 불구멍에 대고 나무 속성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번에 그의 몸에서 나온 것은 연한 녹색의 염력이었다.
초록색 기운이 약솥 안에 들어가자, 먼저 타오르고 있던 노란 불꽃이 순식간에 잔잔해졌다.
“음, 좋아……”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끄덕이던 약로가 손가락을 준의 이마에 갖다 대자 연금술사의 생명과도 같다는 약재의 조합표가 그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상처 치료제의 조합표다. 한번 정제해 보거라. 내가 수시로 불꽃의 온도와 추가 될 약재들을 알려주마.”
준은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느껴보았다.
“응혈초 한 줄기, 활기의 열매 한 알, 양귀비 꽃 두 송이……”
그가 머릿속으로 약재의 양을 기억한 후 영혼탐지능력을 이용해 불꽃을 서서히 조절하면서, 저장반지를 살짝 건드리자 짙은 붉은 빛을 띤 응혈초 한 줄기가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것을 약솥의 꼭대기에 있는 뱀 머리를 통해 솥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응혈초가 약솥에 들어가자마자 불꽃이 뒤집어 지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줄기가 재가 되어, 약솥의 특수 장치를 통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실패였다.
“다시.”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응혈초를 약솥에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는 오래 버텼지만 역시나 실패였다. 그는 약로의 불 조절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뼛속 깊이 실감했다.
20개의 응혈초를 숯덩이로 만든 뒤, 준은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으로 응혈초를 집어넣었다.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해 영혼탐지능력을 최대화하여 불꽃의 온도를 조절했다.
잠시 후, 불꽃속에서 춤을 추던 응혈초의 새빨간 껍질이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하고, 풀잎에 들어있는 즙이 하얀색 가루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 *
응혈초 하나를 성공적으로 녹여낸 준의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방금 몸으로 익힌 적정온도를 잊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응혈초를 녹여냈다.
100 여개의 응혈초를 녹인 뒤 준은 염력이 바닥나 더 이상 불꽃을 내기가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약로는 제자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음을 느끼고는,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말했다.
이준은 너무나 지친 나머지 약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털썩 땅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켜 염력을 회복하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노인은 제자의 집념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돌려 방금 응혈초에서 뽑아낸 하얀색 가루가 담긴 상자를 바라봤다.
하얀색 가루가 담긴 상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깨끗해져 마지막 상자에 담긴 하얀색 가루는 거의 완전한 순백색에 가까웠다.
제자의 놀라운 발전 속도를 눈으로 확인한 약로는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 * *
눈을 감은 지 한 시간 후, 거의 바닥났던 염력이 천천히 선명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떠 보니 몸이 가벼워 진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충분히 쉰 것 같구나.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약로는 가볍게 웃으며 제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준은 벌떡 일어나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해, 다른 약재의 제조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전보다 조금 나아져서 활기의 열매는 여덟 번, 양귀비는 열 번만에 약재로 바꿀 수 있었다.
활기의 열매를 태우고 나온 검은 알맹이에는 지혈 효과가 있었고, 양귀비 꽃에서 채취한 연한 붉은 액체에는 진통 효과가 있었다.
백색 가루와 검은 알맹이, 그리고 붉은 액체. 이 세 가지가 소년이 처음으로 연금술을 배워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이제 세 가지를 하나로 만들면 완성이다. 하지만 이 단계가 가장 중요하고, 그만큼 어려우니 정신을 바짝 집중해야 한다.”
* * *
다음 차례는 응혈초를 태워 만든 백색 가루를 다시 달구는 것 이었다.
백색가루를 약솥에 넣고 달군지 10여분, 순백색 가루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하자, 준은 잽싸게 양귀비를 녹여 만든 액체를 약솥에 넣었다.
붉은 액체가 하얀 가루를 서서히 둘러싸고, 두 재료가 섞여 조금 전보다 더욱 연한 붉은 색의 액체로 변화했다.
준은 자신이 배운 제조법에 따라 불의 온도를 높였다. 뜨거운 불에 의해 수분이 증발되자, 두 재료가 섞인 액체는 점점 끈적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제 검은색 알갱이를 넣을 차례였다. 그러나 검은색 알맹이는 약솥에 들어간 뒤 다른 재료들과 섞이지 못 하고, 계속해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를 뿐, 특별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조용히 소년을 지켜보던 노인이 조언을 해주었다.
“재료마다 온도에 대한 저항력이 다르다. 그러니 약솥 전체를 동일한 온도로 조절해서는 제대로 된 약을 만들 수 없지. 온도가 낮아야 하는 곳은 약한 불로, 온도가 높아야 하는 곳은 센불로…자, 집중해서 해보거라. 네 영혼탐지능력이라면 가능하다.”
준은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닦지도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약로의 지시에 따랐다.
퍽!
그러나 검은 알갱이가 있는 곳의 온도를 너무 높였는지,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알맹이 반 알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 바람에 준은 급히 불을 식히느라 또 다시 진땀을 빼야했다.
한 쪽은 불의 온도를 유지하고, 한쪽은 불의 온도를 높이고…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니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준은 몇 번이나 재료를 새까맣게 태울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며, 아슬아슬하게 제조를 계속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