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선택
연금비약이 입에 들어가자 서늘한 냉기가 입안을 간지럽히고, 순수하고도 거대한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소년은 서둘러 호흡을 가라앉히며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그의 몸속에서 염력이 빠른 속도로 전신을 타고 흐르고, 산굴안의 대기가 흔들리며 연한 하늘색의 염력이 준의 몸 속으로 폭풍처럼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격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거대한 기운에 준은 혈관이 터질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하늘색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갈 때 즈음, 다시 한번 정수에서 녹색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이윽고 염력이 절정에 달하자,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며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서 염력 회오리를 모아라! 아니면 터져 버릴게야!”
그 때, 약로의 목소리가 준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이준은 통증으로 아찔해지는 정신을 추슬러 손가락을 모아 기이한 모양을 만들고,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 쉬었다.
그러자 몸 속의 들끓던 염력이 급속하게 한 점으로 몰리며, 하얀색 염력이 점차 새로운 빛깔을 띄기 시작했다.
“빨리 영혼탐지능력으로 염력을 압축하거라!”
다시 한번 약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준은 영혼탐지능력으로 자신의 염력을 제어해 재빠르게 압축했다. 거대한 염력 소용돌이는 잠시 동안 자신을 누르는 힘에 반항이라도 하듯 거칠게 흔들렸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만한 크기로 뭉쳐져 눈부신 빛을 발했다.
“더!”
그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정신을 온통 한 곳에 집중했다.
……
쿠웅…
묵직한 소리가 몸 속에서 나지막하게 울리고, 격렬하게 흔들리던 대기가 멈췄다. 이윽고 준의 전신을 뒤덮던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묵직한 피로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 * *
차가운 석굴 바닥에 누워있던 준은 한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땅에 들러붙은 듯 무겁게만 느껴지는 다리를 움직여 자세를 취했다.
정신을 단전 쪽으로 집중하자 주먹 크기만한 상아색의 염력 회오리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염력 회오리 주변에는 은하수 모양의 하얀 염력이 별처럼 흩뿌려져 맴돌고 있었다.
이처럼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기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자신이 투사가 되었다는 증거였다. 기존의 투사들은 이 능력을 ‘내시’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준은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끄덕였다. 아직 만족스러운 크기는 아니었지만, 지금 그의 단전에 모인 힘은 염력 9단일 때의 그것보다 10배 이상은 강했다.
시험 삼아 회오리를 움직여보자 회오리에서 염력이 빠져나와 물 흐르듯 움직였다.
모든 것을 확인한 뒤 준은 탁한 숨을 내뱉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 수련을 끝낼 때 마다 비추었던 흰빛이 아니라, 옅은 황갈색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성공했어요!”
“음, 제법이구나. 한 번 만에 성공이라니”
약로가 웃음을 짓자 준은 즉시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뻗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스승님, 저에게 주실게 있지 않나요?”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그를 흘겨보며 산굴 안으로 들어와 이준 앞에 천천히 앉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수련법이 필요한 게야?”
“그…그 천계 수련법보다 기이하다던…”
이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자 약로의 얼굴에는 예의 그 장난스런 웃음이 스쳤다.
“스승님, 설마…저한테 농담 하신 거에요?”
약로의 표정을 지켜보던 이준은 불안한 마음이 들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다. 그 수련법은 확실히 진화할 수 있지.”
약로의 말에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빛냈다.
“그럼 이제부터 수련할 수 있는 거겠죠?”
“이 수련법이 기이한 것도, 진화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다만…이 수련법은 아주 위험하다. 그래, 아주 위험하지…”
노인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위험하죠?”
“나는 그 누구도 이 수련법을 수련했다는 말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정상적으로 수련에 성공할 가능성은 2할도 되지 않을 것 같구나.”
“2할? 2할이요? 그렇게 낮다구요?”
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약로는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직접 수련한 사람이 없으니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정도 일게다.”
이준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낮은 가능성이지만 어쨌든 천계 수련법보다도 강한 수련법으로 진화할 수 있는 수련법 아닌가. 가능성이 낮다고 그리 쉽게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덥썩 시작하기도 어려운 조건이었다.
“대략적인 수련방법은…어떻게 되나요?”
약로는 또 다시 침묵에 빠졌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수련법의 진화 조건은 얼마 전 너에게 말했던 그 불꽃과 연관이 있다. 사실 나도 엉겁결에 얻은 수련법이지. 따라서 이름도 없다. 그저 내 마음대로 ‘불개’ 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 수련법은 정말로 진화가 가능하다…다만…”
그는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아끼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만…수련법을 진화시킬 때 마다 ‘천지의 불꽃’을 흡수해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매번 말이다. 내가 지난번 ‘얼음 불꽃의 정수’를 흡수할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지? 이 수련법을 진화시키려면, 그 때 마다 매번 그런 모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지의 불꽃 하나를 흡수하려면, 투황급의 강자들도 목숨을 건 모험을 해야하지…”
준은 말도 안 되는 조건에 눈 앞이 아득해졌다. 연금술사도 얻기 어렵다는 천지의 불꽃이라니…
“하지만 이 수련법의 잠재력은 정말로 대단하다. 만일 성공하기만 한다면 투기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손가락 안에 꼽는 강자가 되겠지.”
약로의 설명을 들은 이준은 왜 그 수련법이 그리도 대단한지를 알 것 같았다.
천지의 불꽃을,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사용할 수 있다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강자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그대로 잿더미가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도 배우고 싶으냐?”
약로의 물음에 준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불개라는 수련법을 제대로만 익힌다면, 그는 분명히 투기대륙 내에서 손에 꼽는 강자가 될 수 있었다.
다만…불개의 수련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이었고, 실패는 곧 죽음이었다.
준은 깍지를 끼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과감하게 수련을 시작하자니 가능성이 너무 낮았다.
약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준을 한참동안 조용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네가 스스로 결정하거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 내가 간섭할 수는 없지. 아참…그리고 너는 그 이은이라는 꼬마 계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게냐?”
“네?”
뜬금없는 약로의 질문에 준은 얼굴이 벌개졌다.
“스승님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세요? 은이는 제 동생이에요. 어떻게 생각하냐니요…”
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자, 약로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낄낄…동생? 이놈아. 피 한방울 안 섞인 게 무슨 동생이야. 그래, 언젠가 그 아이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으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있을거라고 생각해보니 준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마…기분이 좋지는 않겠죠.”
“에잉…쯧쯧, 그 남자가 정말로 아주 좋은 남자라도 말이지?”
준이 침묵을 지키자 약로는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네가 그 아이를 동생으로 생각한다고?”
소년은 귀까지 새빨개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다가 작은 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그래서 스승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대체 뭐에요?”
“흠…나는 네가 네 감정을 잘 알고 행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동생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너의 실력과 잠재력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게다. 그 아이가 어떻게 이런 작은 가문과 연이 닿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니까. 운남종의 종주가 와도 우습게 볼 판에, 운남종 차기 종주의 후계자에게도 우습게 보이는 너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약로의 말에는 뼈가 있는 듯 했다.
“나설아라는 맹랑한 계집이 어찌 그리 무례하게 굴 수 있었겠느냐? 결국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가한제국 뿐 아니라 투기대륙 전체에서 실력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진정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은 돈이나 권력, 명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것들은 이미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들이 왜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강하기 때문이다. 단지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누리는 것이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나 권세 따위가 아니야. 결국 그들을 만족시키려면 강해지는 수 밖에 없느니라.”
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코를 몇 번 문지르고는 약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이 ‘불개’를 수련하면 제가 그런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게 아니지. 네가 ‘불개’의 수련에 성공해야만 그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약로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준은 새삼스레 자신이 동생이라고 부르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바람에 날리던 하늘하늘한 머릿결과 가느다란 허리, 맑은 목소리…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저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으신다고요?”
“허허……”
제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약로는 까칠한 얼굴을 만지며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사실 내 입장에서도 너의 수련이 상당히 중요하지. 이제 말을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내가 그저 영혼 상태라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약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다. 아니,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죽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게다. 다만 내 영혼의 힘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이런 상태로도 살아있는 게지.”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못 다한 일이 있다. 이대로는…”
“스승님…부활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준은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어 약로의 말을 가로챘다.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는 말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요?”
“그렇지…하지만 불개의 수련에 성공하면, 영혼이 들어갈 수 있는 육체를 만들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가능할지도 모르지. 나는 육신을 잃은 상태로 반지 속에서 불개의 수련에 성공하고, 내 영혼에 맞는 몸을 만들어줄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약로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회한과 쓸쓸함이 담겨있었다. 그는 잠시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끌끌…그냥 더럽게도 삶에 대한 미련이 남은 추잡한 늙은이의 푸념이라고 생각하거라. 네 선택에 관여하지 않겠다면서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은 것 같구나.”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손을 펼쳐 두 개의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붉은색 두루마리는 화 속성의 2격 단계 상 수준의 수련법이고, 검은색 두루마리는…‘불개’다…네가 선택하거라. 사실 처음에는 너를 이용할 생각뿐 이었지만…이제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원망하지 않을게다. 너를 제자로 맞은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어. 둘 중 어떤 것을 골라도 나는 너를 전심전력으로 가르칠 것이다.”
준은 눈 앞의 두루마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에 잠겼다. 그는 턱을 괴고 한참 동안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죽는게 무섭긴 하지만…그런 굴욕을 당하고도 겁이 나서 시작도 못하는 얼간이는 아니에요. 두 번 다시 나설아에게 당한 것 같은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다른 수련법으로 바꾸죠 뭐…덤으로 잘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걸 보고 싶기도 하구요.”
제자가 환히 웃으며 검은색 두루마리를 덥썩 잡자, 약로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며 물기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