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진정한 연금술사의 조건
커다란 대리석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이준은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며 밥과 반찬을 입 안에 밀어 넣는 이옥을 힐끔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쓰다듬었다.
그 손짓의 의미를 알아챈 이옥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가 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라 숟가락을 내려놓자, 이은이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에 띄게 심기가 불편한 이옥과 달리 이혁은 오늘따라 바보 같은 표정으로 실실 거리고 있었다.
준은 유달리 기분이 좋은 이혁을 보고는 그가 연금비약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숨이 나왔다.
‘어휴…돈 아까워…저 멍청한 자식은 연금비약이 8단 이상부터는 큰 효과가 없다는 걸 모르는가보군.’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은 이혁뿐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특별한 날이나 명절도 아닌데 이렇게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것은 제법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흠…연금비약을 구매한 게 이렇게 연회를 열만큼 중요한 일인가?’
준은 약로가 경매장에서 건넨 말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체 무슨 일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2레벨 이상의 연금술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씨 가문의 지위는 단번에 나머지 두 가문을 능히 압도하고도 남을 일이었으니, 촌장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장로와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준은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연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연회가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도착한 준은 혹시라도 누군가가 찾아올까 걱정되어 더 이상 약로를 보채지 않고, 창문을 모두 걸어 잠근 뒤 잠을 청했다.
* * *
결국 준은 달이 중천에 떠오르고 마을 사람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즈음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나 옷장을 열 수 있었다.
옷장 속에 숨겨둔 약재들을 조심스레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자, 허공에 유령처럼 반투명한 상태의 약로가 나타났다.
“스승님, 이제 정제해도 될까요??”
“음…이제야 조심하는 법을 배웠군. 약을 정제할 때는 극도로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정제술을 배우면서 경솔히 행동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약로가 책상 옆으로 다가와 투명한 손바닥으로 천천히 재료들을 만지며 말했다. 평소 자신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사뭇 진지한 태도였다.
준은 진지한 그의 태도에 괜히 어색한 느낌이 들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이윽고 주위가 잠시 조용해지는 듯 하더니, 그의 손바닥에서 하얀 색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불길을 조절하는 제자를 바라보며 연금술의 지식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불꽃의 색으로 연금술사의 수준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준은 두 눈을 깜빡이며 약로의 하얀 불꽃이 피어오르는 스승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그럼 스승님의 불은 왜 하얀 색을 띄고 있는 거죠?”
“내가 방금 말한 건 연금술사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불이지. 하지만 연금술사에게는 염력의 힘으로 화염을 만드는 것 외에 또 다른 것이 있다.”
약로는 무언가 자랑이라도 하듯 어깨를 활짝 펴며 잠시 헛기침을 했다.
“흠흠…그건 바로 불을 빌리는 것이다.”
“불을 빌린다고요?”
“그래, 불을 빌리는 거지.”
약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세상에는 염력으로 만들어내는 불꽃이 아닌 ‘천지의 불꽃’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불은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질 때의 그 불일 수도 있고, 화산 깊숙한 곳에서 천년 동안 끓고 있던 용암불일 수도 있지…그리고 이런 특이한 불들의 위력은 염력으로 지펴서 만들어진 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하지만 이런 특이한 불들은 평소에는 볼 기회가 아주 드물지. 기회가 되어 볼 수가 있다고 해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많은 연금술사들이 한 평생 이런 ‘천지의 불꽃’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지. 그런 위대한 불꽃들을 다스리려면 그 불꽃을 자신의 몸에 들여야 하지만, 강한 불일수록 위험한 법…불꽃을 길들이는데 실패하면 그대로 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 불꽃을 다스리는데 성공한다면 아주 위대한 연금술사가 되는 것이지.”
준은 약로의 설명을 듣고 홀린 듯 그의 불꽃을 바라보다가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지금 스승님의 불꽃은 그 천지의 불꽃이라는 건가요?”
“흠흠…”
자신의 불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약로의 얼굴빛이 환해졌다.
“천지의 불꽃은 위대한 불꽃, 대자연의 불꽃, 이화(異火)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리고 연금술사들 사이에는 이런 특이한 불꽃들에 나름대로 순위가 있지. 거기에는 총 스물 세 종류가 있는데…나의 불꽃은 그 중 11위인 ‘얼음 불꽃의 정수’라고 한다. 이 특이한 불은 백 년마다 해와 달이 바뀌는 순간에 세상에서 제일 춥고 어두운 곳에서 만날 수가 있지…”
“얼음 불꽃의 정수요?”
“나는 이 얼음불꽃의 정수를 얻기 위해 밤도 낮도 없는 지옥 같은 곳에서 8년을 보냈다. 그리고 이 불꽃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숯덩이가 될 뻔 했지.”
그는 지금도 그 때의 공포가 남아있는 듯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아주 위험했지. 하지만 얼음 불꽃의 정수를 얻을 수만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바닥 위의 하얀색 불꽃을 천천히 흔들었다.
“천지의 기운을 담은 불꽃을 가지고 있다면, 같은 연금비약을 제조해도 차원이 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게다가 대결을 할 때는 같은 수준의 투사라면, 결코 대자연의 불꽃을 가진 투사를 당해낼 수 없다.”
눈처럼 새하얀 백색 불꽃이 춤을 추듯 일렁이는 모습에, 준은 약로의 불꽃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에잉…이런 애송이가…이런 불꽃은 아직 너한테는 그림의 떡이다 요놈아. 타죽기 딱 좋지. 지금 당장은 하루 빨리 투사가 되는 것에만 집중해라.”
준은 아쉬운 듯 머리를 끄덕이며, 존경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약로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마친 약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백색 불꽃을 몇 번 흔들더니 검은 연꽃 잎사귀 하나를 들어 올려 조심스레 불속으로 집어넣었다.
새까만 잎사귀는 ‘얼음 불꽃’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한 움큼의 검은 액체로 변화했다. 이윽고 하얀색 불길이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르자 신기하게도 주변의 기온이 서서히 떨어졌다.
약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온 정신을 쏟아 불의 온도를 조절했다. 불의 온도가 일정해지자 시커먼 액체 속에서 갑자기 노란 기름 같은 것이 떠오르고, 노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불순물이 검은 액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이후 몇 번에 걸쳐 검은 액체에서 노란색 불순물이 떠올랐고, 약로는 그때 마다 신중하게 불순물을 제거해나갔다. 주먹 반 정도의 크기였던 검은 액체에서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되자, 액체는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흑진주로 변화했다.
그 흑진주는 너무나 깊고 순수한 검은색이라, 준은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순수한’ 검은색은 본적이 없다고 느꼈다.
약로는 한숨도 쉬지 않고 놀라운 집중력으로 연달아 다른 검은 연꽃을 태워 흑진주를 만들어냈다.
다섯 알의 흑진주가 완성되자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흑진주를 모두 손 바닥위에 올린 후 다시 불을 지폈다.
하얀 불꽃이 일렁이자 다섯 개의 흑진주는 다시 한 알의 흑진주로 변했고, 완성된 물질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검은 빛을 띄게 되었다.
흑진주가 영롱한 검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자, 약로는 재빨리 뱀독 열매를 집어 불길 속으로 집어넣었다.
뱀독 열매는 불꽃 속에 들어가자마자 푸른 액체가 되었고, 노인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불순물을 제거한 뒤 다시 그것을 흑진주와 섞었다.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성질을 띠고 있는 액체가 하나가 되자 새가 우는 듯한 높은 소리와 함께 은은한 하얀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가 걷히자 까슬까슬한 알약 하나가 불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약로는 담담히 그 연금비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영혼의 열매와 마정석을 재빨리 집어넣고는 또 다시 기존의 작업을 반복했다.
준은 연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약로의 너무나 숙달된 작업에서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마저 느꼈다.
이윽고 영혼의 열매가 마정석의 기운을 중화시키자 하늘색의 순수한 마력이 천천히 연금비약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 한 방울의 마력마저 모두 연금비약에 흡수되고, 거칠던 연금비약의 표면이 은은한 하늘색을 띠며 반질반질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연금비약이 완성된 것을 확인한 뒤에도 멈추지 않고 연금비약을 10여 분간 불꽃속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가 서서히 불을 꺼뜨렸다.
불길이 꺼지고 약로가 왼손을 내밀자 책상위의 옥병이 그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그는 하늘빛이 도는 연금비약을 병속에 넣고는 숨을 몰아쉬며 약병을 준에게 건넸다.
“옜다!”
약병을 건네받은 준은 흥분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일단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상쾌한 향이 그의 콧속으로 파고들어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그는 냄새를 맡자마자 지난번 나설아가 내밀었던 용의 정수가 떠올랐다. 분명히 약로가 제조한 용의 정수는 그 때 그 물건보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연금비약을 갖고 그를 비웃고 깔보던 모습과 말들을 떠올리며 이준이 가볍게 웃었다.
* * *
준은 용의 정수를 바로 복용하지 않고 길게 숨을 들이쉬며 일단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용의 정수를 활용해 투사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적기가 아니었다.
물론 약로가 있으니 돈도, 약도 다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준은 괜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제자가 유혹을 물리치는 모습을 본 약로는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끄덕이고 웃음을 지으며 다시 반지 안으로 들어갔다.
* * *
준은 용의 정수를 옷장안에 고이 모셔두고 다시 성실하게 수련에 임했다. 그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염력을 수련하고, 뒷산에 가서 무투기를 단련한 뒤 틈틈이 이은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5일 후…준은 드디어 투사가 될 최적의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 * *
소년은 옷장 속에 보관해둔 용의 정수를 보물처럼 꺼내 안고, 마을 뒷산의 숨겨진 절벽 아래로 향했다.
절벽 아래에는 자그마한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굴이야말로 그가 생각한 최적의 수련지였다.
이 동굴은 절벽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찾을 수 없었고, 오늘 동굴 주위에는 안개가 가득해 본래 이 곳의 위치를 알고 있더라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산굴로 통하는 유일한 작은 길은 그가 나뭇가지와 자갈로 덮어놓아, 마치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였으니, 준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단계에 돌입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둔 것 이었다.
준은 동굴로 들어가 조용히 숨을 고른 뒤, 가슴팍에서 용의 정수가 든 약병을 꺼내들었다.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옥병을 살짝 기울이자 하늘색과 녹색이 섞인 용의 정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연금비약의 향기를 맡은 뒤 망설임 없이 한 입에 연금비약을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