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속임수
“선생님, 일찍 오셨네요. 이 아이가 혹시라도 뭔가 불편하게 한 점은 없었나요?”
오늘 주희의 태도는 평소보다도 훨씬 유혹적이었다.
‘요물…’
이준이 머리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소녀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내가 불만스러운 내색이 없자 주희는 안도한 듯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경매가 끝났습니까?”
“네!”
주희가 활짝 웃으며 손을 들자 하늘 색 카드가 그녀의 손에 나타났다.
“축기영액 7병의 총 낙찰가격은 28만5천 골드입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뺀 나머지 잔액은 전부 이 카드 안에 있습니다.”
주희는 카드를 건네며 다시 한 번 사내의 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너무 젊었다.
“이 가격은 저의 예상을 뛰어 넘었습니다. 아주 좋군요.”
“언제든지 저희 경매장을 찾아주세요. 반드시 최상의 가격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부탁한 약재는 구했습니까?”
머리를 끄덕이며 카드를 넣은 약로가 다시 입을 열자, 주희의 눈은 거의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호호, 선생님의 요구라면 저희 경매장에서 당연히 1순위로 해결해 드려야지요.”
말을 마친 그녀가 손뼉을 치자 곡니가 옥으로 된 그릇 하나를 들고와 공손한 자세로 그릇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선생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셨던 약재들 입니다.”
준은 그릇 위에 놓인 약재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자신이 나가서 사려고 했다면 족히 한 달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유씨 가문에서는 그 까다로운 요구를 하루 만에 완벽하게 해결해냈다.
“음…고생하셨소.”
주희는 눈앞의 사내가 상당히 만족한 듯한 기색을 보이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약재 값을 치러야지요.”
준은 방금 얻은 돈으로 즉시 값을 치르려 했지만, 주희는 준이 카드를 꺼내는 것을 막아섰다.
“아닙니다. 이 약재들은 저희 내부에서 얻은 것들이라 바깥보다 가격이 많이 저렴합니다. 이번에 선생님께서 경매를 맡기신 물건 덕분에 저희 경매장 의 명성이 아주 높아졌습니다. 저희의 작은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주시지요.”
“그래요. 그럼 앞으로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연금비약과 직접 교환을 하는 것도 좋겠군요.”
약로는 경험이 풍부한 연금술사답게 이런 상황에 상당히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는 주희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훤히 꿰고 있었다. 결국 공짜 호의도 아니니 이런 경우에는 적당한 선에서 서로 이득을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럼,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거래를 마친 준이 몸을 일으키자 주희와 곡니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섰다.
“선생님, 저희가 배웅해 드리지요.”
결국 준은 유씨 가문의 경매장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그 때, 감정실의 맞은 편 경매장에서는 막 경매를 끝마친 3대 가문의 수장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 * *
‘이크…’
준은 아버지가 혹시라도 자기를 알아볼까 망토를 푹 눌러쓰고 경매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 가문의 촌장들은 굳은 얼굴로 예의상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박진과 대화를 나누던 이한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 가후와 박진은 이한의 묘한 행동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는 이한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세 사람의 촌장이 같은 곳을 바라보자, 그들과 함께 온 사람들 역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에서는 매혹적인 자태의 여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정체불명의 사내를 ‘직접’ 모시고 있었다.
은빛성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주희가 어떤 여자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지만, 상당히 자존심이 세고 거만한 여자였고, 심지어 3대 가문의 수장 중 하나인 박진이 호감을 표현할 때 조차도 절대로 틈을 보이지 않았었다.
모든 사내가 원하고 모든 사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어떤 사내와도 필요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는 여자가 바로 주희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누가 봐도 정체불명의 사내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은빛성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인 연금술사 곡니마저 그 사내에게 절절매는 모양새였다. 그는 주희와 달리 대놓고 오만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누구에게나 아랫사람 대하듯이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검은 망토의 사내 앞에서는 하인처럼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이 놀라운 광경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대체 누구길래…유씨 가문의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공손하게…’
이한은 너무나 뜻 밖의 광경에 머리가 멍해졌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사람중에 은빛성에서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가후와 박진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한은 세 사람이 가까이오자 발걸음을 내딛어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허허…주희 아가씨, 곡니 님. 두 분이 함께 나오시는 일이 흔치 않은데…무슨 좋은 일 이라도 있으신가보군요. 허허….”
하지만 이한이 말을 걸자 주희와 곡니는 발걸음을 늦추며 정체불명의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사내가 발걸음을 멈추며 상관없다는 의사를 표시하니, 그제야 둘은 입을 열어 이한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네, 귀한 손님을 배웅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 하하……”
이한이 대화를 트자 가후 역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공손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하하, 그런데 이 분은…은빛성 분이신가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만.”
“흠흠…가 촌장님. 이 분은 경매장의 귀한 손님이십니다.”
하지만 곡니가 미간을 찌푸리고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고, 가후는 애써 불쾌한 기색을 감추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가후가 거절당하는 것을 본 이한 역시 더 이상 질문을 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곡니와 주희가 저 정도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라면 괜히 심기를 거스르기보다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이한은,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돌아가자는 눈짓을 했다.
바로 그 때, 침묵을 지키던 검은 망토의 사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이씨 가문의 이한 촌장이시군요? 아드님이 1년 만에 염력을 몇 단계나 올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칭찬에 이한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들 녀석이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도 실력이지요. 기회가 된다면 그 아이를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혹시라도 연금술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기회가 된다면 이씨 가문과는 좋은 연을 맺고 싶군요.”
이한이 뜻 밖의 상황에 놀라 대답도 하지 못 하는 사이, 검은 망토의 사내는 몸을 돌려 주희와 곡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그럼 이만,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우뚱하며 몸을 돌린 이한은, 부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희와 곡니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왜 그런 표정으로 보시는 거죠?”
“이 촌장님, 방금 저 분을 아십니까?”
주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예의조차 차리지 않고 이한을 닦달했다.
“처음 뵙습니다.”
이한은 둘의 표정을 보고 왠지 불안해져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분이 대단하신 분인가 보죠?”
“음…어쩌면 이씨 가문이 대단한 기연을 얻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곡니는 그렇게 말하며 가후가 끌어안고 있는 연금비약을 바라보았다.
“이 물건은 모두 저분이 만든 약제입니다.”
곡니의 말에 이한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둘의 태도로 보아 그 검은 망토의 사내는 곡니보다 훨씬 대단한 수준의 연금술사임이 틀림없었다. 2레벨 연금술사와 연을 맺는 것도 대단한 행운인데, 그 이상의 연금술사라니…이한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대…대단하군요.”
이한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몰라했고, 옆에 선 두 가문의 수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 * *
경매장을 나선 이준은 한참동안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슬그머니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스승님, 하마터면 제 정체를 들킬 뻔 했어요.”
“낄낄…이놈아 그래도 덕분에 네놈 아버지의 체면이 좀 서지 않았느냐.”
낡은 검은 색 반지로부터 약로의 장난스런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준은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연금비약을 판 돈은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니, 자신의 수련에 필요한 비용을 아버지가 대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가문과 협력해서 아버지께 조금이나마 보답을 해야겠어…”
* * *
경매장으로 떠났던 가문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마을은 제법 한산한 상태였다. 준이 돌아오자 가문의 호위 무사들은 친절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준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누가 볼까 겁이라도 나는 듯, 서둘러 약재를 꺼내 책상위에 올려두었다.
검은 연꽃은 10년 마다 검은색의 잎이 하나씩 자라나는 독특한 식물로, 이전에 연금비약을 만들 때 사용됐던 약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귀한 약물이었다. 그리고 뱀독 열매는 청녹색의 동그란 열매로, 주먹 반 정도의 크기에 새콤달콤한 향이 났고, 영혼의 열매 끝부분에서는 은은하게 형광빛이 났다.
한편, 2급의 물의 속성 마정석은 짙은 남색을 띠고 있었는데, 마정석을 올려놓은 곳 주변에는 촉촉하게 습기가 차올랐다.
재료들을 천천히 훑어 본 이준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재료들을 다 준비했으니 이제 정제해도 되지 않을까요?”
“에잉…이놈아. 약재가 어디 도망이라도 가느냐? 약을 정제할 때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아서는 안된다. 조금의 방해라도 받으면, 이 재료들을 모두 날리게 된단 말이다. 게다가 약을 만드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해봐라.”
반지 속에서 약로가 훈계조로 말했다.
결국 준은 밤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조금 맥이 빠진 듯 터덜터덜 걸어가 재료를 옷장에 넣고는, 침대에 누워 날이 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준이 침대에 누운 지 반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도련님, 밥 먹는 시간이라고 따로 불러줘야 되겠습니까?”
이준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번쩍 일으켰다. 시야에 유달리 하얗고 긴 다리가 들어오자 준은 한숨을 내쉬며 짜증을 냈다.
‘스승님께 정제해 달라고 조르지 않길 잘했어. 이런 멍청한 년.’
용의 정수를 만들던 과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자,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렀다.
“기본적인 예절도 몰라? 아카데미는 가서 뭐하고 수련은 쌓아서 뭐해! 이런 되먹지 못한 년!”
갑작스런 욕설에 이옥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뭐? 이 새끼가! 문을 차면 뭐!”
소리를 지른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녀가 씩씩대며 걸어오자 준은 즉시 손바닥을 들어 염력을 끌어올렸다.
준이 손바닥을 펴는 순간 강력한 흡입력이 이옥을 끌어들이고, 순간, 그녀는 균형을 잃고 자빠져 침대 위로 올라탔다. 준은 즉시 몸을 벌떡 일으켜 이옥의 늘씬한 두 다리를 누르고 엉덩이를 들어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이 보이는 아랫배에 올라탔다.
또 한 번 난처한 자세로 밑에 깔린 이옥은 멍해졌다가, 잠시 뒤 얼굴이 빨개지며 벗어나려고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미친 새끼, 비켜!”
이옥의 손목을 누르고 올라탄 준 역시 그녀가 죽을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자 금세 숨이 차올랐다. 한참을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 엉겁결에 준은 그녀를 뒤집어 놓고 올라타고 말았다.
웬만한 사내 허벅지보다도 가느다란 허리와 대비되는 탄탄한 둔부와 시원하게 뻗은 늘씬한 다리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안되지 안 되지…’
준은 불순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억누르며 즉시 손을 치켜 올려 그녀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다시 한 번 이 도련님 방에 마음대로 들어오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