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가람 아카데미
7병의 연금비약이 은빛성을 뒤흔드는 데는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난번 이한이 연금비약을 산 뒤, 준이 부활했다는 것이 더욱 화제를 불러일으킨 원인이었다.
은빛성의 크고 작은 가문에서 모두 자신의 가문에서 이준 같은 천재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선뜻 주머니를 연 것 이다.
당연히 7병의 연금비약에 대한 소문은 준의 귀에도 들어갔다. 자신이 사용했던 연금비약에 비하면 순도가 한참 모자라는 연금비약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자, 준은 다시 한 번 약로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씨 가문의 장로들도 연금비약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 * *
경매장을 방문한 바로 다음 날 오후, 막 산책을 떠나려는 준에게 이한이 사람을 보내왔다.
아버지에게 도착하자 몇 몇 장로와 마을의 주요 인사들도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리에는 준의 철천지 원수의 모습도 보였다.
“꼼지락, 꼼지락, 어린놈이 버릇없게…”
“누가 기다리래?”
준은 이옥에게 차갑게 한 마디를 쏘아붙인 뒤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 은의 모습이 보이자 이옥을 보고 더러워진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 했다.
“은아, 너도 경매장에 가게?”
“집에 있기 심심해서요. 구경이라도 가려구요.”
은은 해맑게 웃으며 앞으로 나와 애교 섞인 웃음을 지었다.
“무슨 구경거리가 있다고, 고작 축기영액 몇 병뿐인데…너한테는 쓸모도 없잖아?”
“흥, 구경거리가 없다고? 그 물건 덕에 간신히 성인식을 치를 수 있었던 놈이…”
이혁이었다. 준은 이 남매의 한마디 한마디가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 맞은 곳이 나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침대가 그리운가봐?”
“너…”
그는 얼굴이 시뻘개져 주먹을 쥐고 준을 노려봤다.
“병신, 덕분에 두 달 동안 조용히 회복하면서 9단에 가까워졌지. 조만간 두고보자고.”
이씨 가문의 어른들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큰 장로의 거만한 표정으로 보아 그가 곧 9단이 될 것 이라는 말은 사실인 듯 했다.
이한은 불쾌한 기색으로 큰 장로를 노려보고 손을 들어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혁과 큰 장로의 거만한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기대가 컸을 텐데… 며칠 전에 실수로 9단이 되버렸어.”
“응?”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던진 준의 말에 주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뭐라고? 실수로?”
순식간에 이혁의 얼굴에서 거만한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의 입 꼬리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이옥은 충격을 받아 더듬더듬 무언가를 말하려는 동생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이한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큰 장로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짓을 거듭했다.
“자, 자! 갑시다! 경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여기서 더 지체 말고 어서 갑시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가면 어떡합니까?”
큰 장로는 못 마땅한 표정으로 준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도 촌장의 말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준아, 훌륭하다.”
이한이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자 준은 멋쩍게 웃으며 아버지를 올려다보면서, 일부러 남들 들으라는 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죄송해요. 건방을 떨 생각은 없었는데…아무리 그래도 9단이 됐다고 신이 나서 달려드는 형을 패는게 더 예의 없는 행동 같아서…미리 말은 해줘야죠. 그래도 형인데 두 번이나 침대 신세를 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
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매장을 향하던 이혁이 고개를 돌려 눈에 핏대를 세우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무슨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 * *
경매장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오늘 유씨 가문의 경매장에는 입구부터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가득했다. 준은 이 소란에 조금 짜증이 났다. 이한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경매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곳에도 사람들이 적지 않게 앉아 있었다. 그래도 경매장 안은 입구에 비하면 조용한 편이었다.
이한은 경매장 안을 한번 훑어보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능숙하게 무대와 가까운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준은 조금 뒤쪽에 앉으며 재미없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의자 뒤로 등을 붙이고 앉아 경매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누나, 반 년 후에 가람 아카데미 등록이 시작되지?”
그가 막 다리를 꼬고 잠을 청하려는 찰나, 귓가에서 이혁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람 아카데미는 투기(鬪氣)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무투기(武鬪氣) 아카데미 중 하나로 가람 아카데미에서 선생님이 되려면 최소 대투사이상의 실력을 갖춰야 했으며, 가한 제국의 수많은 유력 가문과 문파들도 가람 아카데미에는 한수 접어주는 실정이었다.
물론 가한제국의 많은 문파와 가람 아카데미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어 딱 잡아 비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문파에 가입한 문하생들은 그 문파의 관리를 받게 되고, 언제나 문파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가람 아카데미의 경우 일단 졸업하고 난 뒤에는 졸업생들에게 어떤 규율을 강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한 제국의 수많은 강자 중에는 가람 아카데미 출신이 많았고, 그들은 언제나 아카데미의 요청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찌됐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은 좋은 수련법이나 무투기를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특히 가람 아카데미처럼 수준 높은 아카데미에서 빼어난 성취를 보이는 자에게는 높은 단계의 수련법이나 무투기가 제공되었기 때문에, 많은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수련법과 무투기, 연금비약. 이 세 가지는 투기대륙의 모든 투사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였다.
가람 아카데미는 그 중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투사들이 족히 수천 명은 되니, 인맥까지 확보할 수 있는 곳 이었다.
게다가 제국내의 많은 세력들이 아카데미의 졸업생들을 앞 다투어 데려갔으니, 아카데미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18살 이전에 반드시 염력이 8단을 넘겨야 입학을 할 수 있었으니,, 입학 자격이 있는 수련자 자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
동생의 질문에 이옥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이준을 힐끗 바라보면서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 너는 이미 자격을 갖췄어. 그리고 이번에 은빛성 지역을 책임지신 분이 우리 선생님이셔. 누나가 미리 말해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
“헤헤…… 그럼 됐어.”
이혁은 누이의 말을 듣고 금세 자신감이 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준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도 가람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 안달이었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약로가 있다.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보아 아마도 약로보다 나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는 수련법과 무투기뿐 아니라, 연금비약까지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일뿐 아니라, 자신을 연금술사로 키워줄 사람이 아니던가.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별로 관심이 없나 봐요?”
이옥은 은의 목소리를 듣고는 싸늘하게 웃으며 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선생님에게 부탁해 준을 엿 먹일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관심 없어.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모여 있는데 가서 뭐 배울거 있다고.”
하지만 준의 자신감 넘치는 말은 순식간에 그녀의 기분을 잡쳐놓았다. 이옥은 자신이 가람 아카데미의 일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흥! 아카데미에서 와달라고 사정이라도 할 줄 알아? 너 정도는 우리 아카데미에 널렸어.”
준은 삿대질을 하며 씩씩거리는 이옥을 슬쩍 쳐다보고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요즘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나설아와의 약속이었다. 2년 내에 그녀를 앞지르는 것, 그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의 실력 차는 2년 안에 극복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준이 생각하기에 가람 아카데미가 2년 내에 운남종의 차기 종주를 능가할 수 있을만한 수련법을 자신에게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그들이 무투기와 수련법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약로처럼 물약이나 연금비약을 제공하지는 못 한다. 게다가 그들이 무엇을 제공하든 약로보다 대단한 것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흥…가람 아카데미는 무슨…’
……
심드렁한 표정으로 경매장을 바라보던 준의 눈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그 낯익은 얼굴의 사내는 음흉한 시선으로 은을 위아래로 훑어대다가 준과 눈이 마주치자 험악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흔들어댔다.
“미친 새끼…”
* * *
준은 고개를 돌려 사내를 무시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3성 투사인 가온과 정면승부를 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열 손가락을 쥐었다폈다 하며 흡력과 척력을 번갈아가며 운용해보았다.
지난 1년간의 훈련으로 이미 두 힘을 번갈아가며 사용하는데 상당히 능숙해져 있었다.
지금의 그는 두 가지 힘을 완벽하게 다룬다고는 할 수 없어도, 두 종류의 무투기를 신속하게 전환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오라버니, 저 사람…전보다 많이 강해진 듯 하네요.”
은이 가온을 힐끔 쳐다보며 미소를 짓자, 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저 녀석의 아버지가 3격 단계 상 수준의 수련법을 손에 넣었거든. 저 녀석은 바람 속성이니 그걸 통해서 강해졌겠지.”
준의 이야기를 듣자 이은은 대단치 않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잘난 척을 하는 거군요. 3격 단계 상 수련법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그래, 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3격 단계 상의 수련법을 쓱쓱 내놓는 부잣집 꼬맹이한테는 대단치 않을지도…”
준의 장난스런 말투에 이은이 코를 찡긋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흥…그러게요. 그렇게 대단한 부잣집 따님을 쳐다도 안보는 바보도 있죠.”
이은의 의미심장한 말에 준은 멋쩍게 웃음을 짓고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경매 시작했어.”
말을 돌리는 이준을 보며 이은은 별 수 없다는 듯 묵묵히 불이 환하게 켜진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불이 켜지자 허벅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검정색 치마를 입은 주희의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사내들은 언제나처럼 그녀의 풍만한 몸매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역시…무서워…’
준은 오늘도 남자들을 홀리는 그녀를 보며, 감정소 안에서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의 영악한 태도를 떠올릴 때마다 식은땀이 났다.
‘아마 저 여자는 노점에서 싸구려 물건으로 사기를 쳐도 떼부자가 될 거야…’
경매장의 여왕은 오늘도 사내들의 시선을 온 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평생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큰 무기인지를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희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무대 아래를 훑어보다 준과 눈이 마주치자 자존심이 상했다.
성인식 때도 느꼈지만 그 소년은 아무래도 자신의 미모에 큰 관심이 없는 듯 했고, 사내가 자신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일 이었다.
그녀는 잠시 준을 바라보다 눈을 떼고 손바닥을 치며 경매물품을 소개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겠죠? 그러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