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투기각
다음 날, 이준은 투기각 앞에 도착하자 잠시 감상에 젖었다. ‘투기각’ 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현판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랑은 연이 끝난 건물이라고 생각했었지…’
이제 공식적으로 투기각에서 무투기와 염력 수련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투기각은 이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그들이 수집한 모든 무투기와 수련법이 모두 이 곳에 있었다. 투기각의 자료들이야말로 이씨 가문의 힘의 원천인 것이다.
그리고 이씨 가문의 가장 중요한 건물답게 투기각의 자료실은 평상시에는 가문의 사람들이라도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없는 곳 이었다.
준은 자신의 탐지능력으로 건물 곳곳에 자리 잡은 호위무사들의 기운을 감지하고는 웃음을 지었다. 옆을 돌아보니 은 역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 역시 주위에 숨어있는 호위 무사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는 듯 했다.
* * *
“투기각의 규정은 이미 여러 번 주의를 줬으니 다시 설명하지 않겠다. 투기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두 시간 안에 자신에게 맞는 수련법을 찾아야 한다. 한 사람당 하나씩이다. 자신에게 맞는 수련법을 잘 찾아 보거라. 그리고 몰래 자료를 숨겨 가지고 나가는 경우, 가문에서는 더 이상 그자에게 어떤 수련법도 제공하지 않는다.”
“네!”
많은 소년들이 상기된 목소리로 답하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모두들 규칙을 알았겠지? 그럼 시작하겠다.”
촌장은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서 대문 앞에 우뚝선 기둥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옆에 있는 돌기둥은 1미터 정도의 크기로, 기둥 위에는 투명한 수정으로 만들어진 구체 하나가 놓여져있었다.
그가 손을 들자 뒤에 서있던 두 명의 호위무사가 검은색 문을 천천히 열었다. 거대한 문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리고, 드디어 투기각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속성을 시험한 후 안으로 들어가거라. 들어간 후 반드시 자신의 속성에 맞는 통로로 들어가야 한다.”
이한은 설명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짓을 신호로 가장 앞에 선 소년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수정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이 닿음과 동시에 수정구에서는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바람 속성, 들어가.”
첫 번째 수련자가 투기각으로 들어간 뒤, 너도 나도 앞 다투어 자신의 속성을 확인하고 신이 나서 투기각으로 뛰어 들어갔다.
준은 점점 줄어드는 예비 투사들을 보다가 가볍게 이은을 바라보았다.
“가자, 어떤 게 있을지 궁금하네.”
사실 그녀에게는 이씨 가문의 수련법은 관심 밖의 일이었으나, 준이 관심을 보이니 그녀도 함께 가는 것 뿐 이었다.
준 역시 가문의 수련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둘은 상당히 느긋한 태도였는데, 촌장의 따가운 눈길에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준이 수정구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자, 눈부신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약로의 말대로 그의 속성은 불속성이었고, 앞선 다른 이들보다 배는 밝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한 역시 아들의 속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끄덕인 후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준에게 다가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불의 길, 세 번째 통로, 43번 방.”
준은 아버지의 태도에 살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분명히 자신에게만 좋은 자료를 일러주는 것 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배려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이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은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손바닥을 수정구에 가져다댔다.
그녀의 손이 닿자 수정구에서는 새빨간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올 뿐 아니라, 뜨거운 열기까지 뿜어져 나와 갑자기 기둥위에 불덩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수정구는 그녀가 손을 뗀 후에도 불덩이처럼 타오르다가 천천히 식으면서 금이 가 버렸다.
이한은 깨져버린 수정구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고는 둘을 향해 손을 저었다.
“빨리 들어가.”
‘순수하고 뛰어난 불의 속성이군. 아쉽다, 아쉬워. 나무 속성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최고의 연금술사가 됐을 텐데.’
이준이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마음속에서 약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은은 준의 표정을 보고 민망했는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몸을 돌려 투기각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투기각으로 들어간 뒤, 이한은 박살나버린 수정구를 보며 중얼 거렸다.
“참으로 대단하군… 이 아이는 모든 면에서 나설아보다 몇 배는 낫구나. 재능도 뛰어나고, 인물도 뛰어나고, 성격도 나무랄데 없고, 똑똑하기까지 하니…이런 아이가 며느리라면 참 좋을 텐데…”
말을 마치고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신 뒤 머리를 흔들었다.
투기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은의 얼굴은 귀까지 빨개져 방금 전의 수정구 같은 상태가 되었으나, 두 부자는 이를 눈치 채지 못 했다.
* * *
두 남녀가 검은 문 안으로 들어서자 옅은 어둠이 그들을 맞이했다. 투기각 전체는 상당히 어두웠는데, 벽에 나란히 달려있는 등이 내뿜는 은은한 빛이 투기각의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게 만들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갈림길이 보였고, 각 통로마다 각 속성을 대표하는 글자가 힘있는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준은 화(火)라고 쓰여 있는 통로를 바라보다가, 문득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은을 발견했다.
“은아, 왜 그래?”
“네?”
이준이 의문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은의 얼굴은 더욱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녀는 민망한 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아이 참, 시간도 없는데 왜 이렇게 느긋해요! 빨리가요 빨리!”
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소녀는 황급히 소년의 뒤로 돌아가 등을 떠밀었다.
* * *
화(火)통로에 들어서자, 또 다시 다섯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각 통로마다 사람들이 뒷모습이 하나 둘씩 보였다.
“화(火) 통로 세 번째 길……”
준은 이은을 데리고 아버지가 일러준 길로 들어섰다.
세 번째 길로 들어서자, 양 옆으로 빨간색의 두터운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통로의 문은 모두 열려있었는데, 열려있는 문 틈 사이로는 옅은 붉은 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일종의 보호막으로, 안에 있는 수련법을 얻으려면 그 빛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 이었다.
준보다 먼저 통로에 들어선 아이들은 모두 붉게 상기된 얼굴로 보호막을 뚫느라 여념이 없었다. 간간이 보호막이 깨지는 소리나 환호성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이미 보호막을 깨는데 성공한 아이들도 있는 듯 했다.
“여기인가 보네.”
준은 이한이 일러준 43번 방 앞에 섰다. 그 방의 보호막은 다른 방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고, 아이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많은 아이들이 척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이 방의 보호막을 보고는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을까 싶어, 43번 방으로 들어가려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한 상태였다.
준은 주위의 시선들을 무시하고 손을 뻗어 보호막을 만져보았다.
“오라버니, 아저씨가 뭔가 알려주셨죠?”
이은은 뭔가 눈치를 챈 듯, 맑은 눈을 깜빡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 못 본 척…못 들은 척 해. 아니면…”
준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이은은 또 다시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거리며 웃어댔다. 그녀의 애교스러운 모습에, 주위에 있던 소년들은 모두 이곳에 온 목적조차 잊고 넋을 잃고 말았다.
이준은 은의 머리를 다정하게 한번 쓰다듬고는, 뒤로 두어 발자국을 물러서 두 주먹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그가 자세를 취하자 몸속의 염력이 빠르게 혈관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소년은 낮은 기합소리와 함께 몸을 돌려 보호막을 등지더니, 발로 바닥을 세차게 내리 찍었다. 땅을 내리찍으며 타고 올라온 힘이 그대로 상반신으로 전달되자, 그는 즉시 팔꿈치에 온 염력을 집중해 그대로 붉은 보호막을 가격했다.
‘태초의 힘!’
준의 팔꿈치가 닿자 거대한 파문이 일며 붉은 장막이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오…이건 제법 굉장하네요 오라버니!”
이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박수를 쳤다.
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몸을 풀었다.
“이정도면 쓸 만하지?”
주위의 소년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은 언제 저런 무투기를 익힐 수 있을까 감탄하고 있던차에 ‘쓸만하다.’니
“들어가자. 안에 무슨 수련법이 있는지 한번 볼까?”
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직 붉은 빛이 남아있는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작은 방에 들어서자 불빛이 조금 더 환해졌는데, 방은 아주 작았고 작은 방 가운데에 돌로 된 네모난 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상 위에는 진홍빛의 두루마리가 하나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이준은 앞으로 걸어가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뒷면을 읽어 본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수련법의 이름을 읽었다.
“4격 단계 상급 염력 수련법 : 화염 연꽃”
“꽤 괜찮은데요? 이건 이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최상급의 화(火) 속성 수련법이네요. 아저씨가 오빠 때문에 신경 많이 쓰셨나봐요?”
뒤에서 이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준은 아버지의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하얗고 작은 손이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준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빼앗아갔다.
“오라버니…앞으로 더 높은 수련법을 익힐 수도 있겠지만…처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오라버니도 잘 알고 있죠? 이 4격 단계 상의 수련법은…물론 아저씨의 마음은 알지만…”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이 상할까,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이은을 보고 준은 웃음이 났다.
소녀는 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손위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나타났다.
“이건…화(火) 속성 3격 단계 상급 수련법인 ‘지옥화염’이에요.”
은은 다시 한번 망설이는 듯 눈치를 보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그것을 내밀었다.
“이걸…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염력 수련은 처음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이걸 익히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
준은 쭈뼛거리며 고급 수련법을 내미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완곡한 거절의 표시에 이은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이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젓고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용히 아버지가 준비해준 수련법을 건네받았다.
이준이 굳이 4격 단계 상 수준의 수련법을 선택하자, 이은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그렁거렸다.
준은 그녀의 순수한 호의와 사랑스러운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그만 그녀를 안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은아…고마워. 하지만 체면 때문에 너의 물건을 받지 않는 게 아니야. 내 힘으로 더 좋은 수련법을 익힐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 * *
이은은 수련법을 들고 방을 나서는 준을 보며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그럼 믿을게요.”
방을 나서자 먼저 투기각에 들어왔던 아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은 가장 늦게 들어왔지만 가장 빨리 수련법을 얻었기 때문에, 아직 2시간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둘은 평소에 개방되지 않는 이 금지 구역을 구경해보고 싶은 마음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화(火) 통로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 이은은 몰래 다른 방에 들어가 4격 단계 하급의 수련법 하나를 가지고 나온 뒤, 준과 함께 다른 속성의 통로를 구경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