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대타
둘째 장로는 무대 구석 바닥에 힘없이 퍼져버린 이혁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이준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의문과 의심, 놀라움과 당혹감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정말 무서운 놈이구나…여태까지 발톱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냐.’
이응은 준의 표정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혁은 가문의 어린 수련자들중 이은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하다고 인정받는 아이였다.
그런 이혁을 꺾을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무서운 것은 지금 준의 표정에서는 그 나이 또래 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교만함이나 자신감, 자부심이나 승리의 기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큰 무대에서 강자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런 기색을 보일법도 하건만, 준의 표정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릇이 다르구나.’
둘째 장로가 혀를 차며 손을 들어 시합결과를 발표하려는 순간, 무대 반대쪽에 웅크리고 있던 이혁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노인은 갑자기 비대해진 이혁의 염력을 감지하고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이혁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개새끼, 죽여버릴 거야!”
“혁아, 멈춰!”
둘째 장로가 이혁을 말리려 했지만, 그는 이미 분노와 질투, 모멸감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대 위의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험장 전체가 술렁였다. 귀빈석에 앉아 있는 실력 있는 투사들은 모두 이혁이 갑자기 몇 배나 강해졌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피의 구슬을 복용했어요!”
박식하고 경험이 많은 주희가 상황을 단박에 파악하고 외치자, 이촌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큰 장로를 노려보았다.
“우리 아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손자 놈 목숨으로도 모자랄 줄 알아!”
지금 준의 재능은 가문 제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가문의 미래를 위해 이런 인재를 비겁한 수를 써서 다치게 한다면, 이는 큰 장로의 손자라 해도 절대로 무사히 넘어갈 수 없는 일 이었다.
장로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철산장!”
비약으로 인해 염력이 증폭되자, 허공에서 지금까지보다 몇 배는 강력한 바람이 몰아치며 준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준은 한 발자욱도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숙였다.
그의 자세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사자와 같이 강맹한 기운을 품고 있었고, 적당한 때가 오자 그의 몸은 순식간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태초의 힘!’
준은 화살처럼 철산장이 만들어 낸 돌풍을 뚫고, 그대로 날아가 이혁과 맞부딪혔다.
두 주먹이 공중에서 맞닿은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흐르고 이혁의 입에서 다시 한번 울컥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철퍼덕.
* * *
끈 떨어진 연처럼 힘없이 땅으로 곤두박질 친 이혁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정적이 감돌았다.
자리에 있는 실력 있는 투사들은, 모두 이혁의 염력이 비약에 의해 순간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를 정면으로 맞받아쳐 일격에 상대를 날려버렸고,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모든 투사들은 준의 재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 했다.
한편 귀빈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주희는 준의 실력에 깜짝 놀란 나머지 가녀린 손으로 입을 막고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통에,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대단해…뭐지? 3격 단계의 염력 수련법인가?‘
그녀는 3격 단계의 무투기가 얼마나 구하기 어렵고, 수련하기도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해. 이씨 가문의 가장 강한 염력 수련법은 사자의 포효일 텐데… 최고의 무투기라고 해봤자 3격 단계 하 수준의 사자의 맹습이야. 둘 모두 3격 단계 하 수준 밖에 되지 않잖아. 그런데 지금 저 아이가 사용한 것은 둘 모두 이씨 가문의 것이 아니야.’
주희는 자기도 모르게 찻잔을 잡은 손을 가볍게 떨었다.
“그렇다면…… 이 무투기는 정말 이한이 가르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녀는 머리를 고정한채로 눈을 살짝 돌려 이한을 훔쳐보았다. 이한의 반응은 흐뭇함이나 대견함보다 놀라움이 훨씬 더 컸다.
‘정말 이한이 가르친 게 아니었군…’
주희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찻잔을 일정한 박자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는 그녀가 복잡한 생각을 할 때 마다 하는 오래된 습관이었다.
‘저 녀석 배후에 뭔가가 있긴 있나본데…지금 저 무투기는 분명 3격 단계 이상의 무투기야. 아무리 천재라 해도 투사도 되지 못 한 아이가, 3격 단계의 무투기를 구해서 독학할 수는 없지…누구지? 저런 햇병아리에게 3격 단계의 무투기를 전해주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가르치려면, 최소한 투령급 이상의 투사여야 해.’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물기 있는 눈동자를 반복적으로 덮어 내렸다.
‘흠…정말 흥미로운 아이야. 이렇게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겨보는 건 오랜 만인걸…’
* * *
이한 역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금 준이 사용한 무투기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더라도 박수를 쳐줄만한 것 이었다.
게다가 공격력만 놓고 보자면 가문 최고의 무투기인 사자의 맹습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준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군. 염력이야 그렇다 쳐도 저런 강력한 무투기를 준이 혼자 구해서 익힐 수는 없어. 그럼 누굴까…’
그 때 이한의 눈에 미소를 머금고 준을 바라보는 아리따운 소녀 하나가 들어왔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준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던 이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 * *
대련을 끝마친 준은 무대 위에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자, 그는 고개를 돌려 이혁을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는 어느새 이옥이 뛰어올라와, 그녀의 동생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혁의 부상은 상당히 심각해 보였지만, 준은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준은 천천히 주먹에서 힘을 빼며 파랗게 질린 둘째 장로를 향해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시합 끝났죠?”
노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둘째 장로가 시합 종료를 선언하기 위해 팔을 드는 순간, 비수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무대 위를 가로질렀다.
“잠깐! 이 개자식…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둘째 장로는 고개를 돌려 이혁을 부둥켜안고 있는 이옥을 바라보고는 역정을 냈다.
“이옥!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옥은 조심스레 혼수상태에 빠진 동생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다시 무대 위로 뛰어올라 매서운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봤다.
“이혁은 어쨌든 너의 친척이야!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공격할 수 있지?”
자신을 탓하는 이옥의 말에 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어이가 없군. 규정을 위반하고 연금 비약을 복용하면서까지 나를 해치려고 한건 이혁이야. 설마 3성 투사씩이나 돼서 내가 그 공격을 그대로 받았어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내가 반격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누워있는 사람은 나였을걸? 지금 바닥에 누워 있는 게 나였다면, 너는 동생에게 심했다고 말할까?”
정곡을 찌르는 소년의 비난에 이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억지를 부렸다.
“흥! 무슨 말을 하든 내 눈에는 내 동생의 원수로 밖에 보이지 않아! 지금 당장 나도 그렇게 만들어 보시지! 자, 내가 너에게 도전하마!”
이옥은 동생이 당한 상태에서 자신까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준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이옥! 내려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성인식의 대련은 투사가 되지 못 한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큰 장로의 손녀라 해도 이런 중요한 행사에서 난동을 피울 수는 없는 것이다.
옆에 있던 둘째 장로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에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옥은 둘째 장로의 호통에도 무대에서 내려가지 않고, 입술을 깨물며 준을 도발했다.
“왜? 자신 없어?”
‘저 집안은 뭐하나 제대로 된 인간이 없군.’
이제 막 대결이 끝나 이미 적지 않은 힘을 쓴 초급 수련자에게 공개적으로 대결을 신청하는 3성 투사라니, 준은 정말이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설마, 여자와의 대결을 겁내는 건 아니지?”
순간 준은 자기도 모르게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옥 언니, 준 오라버니는 지금 힘이 많이 빠졌어요. 지금 그와 겨루자는 건 누가 봐도 공평한 대결이 아니죠…언니가 정말 도전하겠다면, 제가 상대가 되어드릴게요. 어때요?”
꽃송이처럼 화사한 소녀가 가볍게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오자, 다시 한 번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준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흘겼다.
“너는 왜 올라왔어?”
하지만 소녀는 준의 말을 무시한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언니, 언니는 오라버니보다 나이도 많고, 정식 투사가 된 뒤로 이미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수련을 쌓지 않았나요? 이렇게 억지를 부리다니 언니답지 않네요. 정말로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것 뿐 이라면, 제가 상대가 되어드릴게요.”
이은의 당돌한 말에 이옥은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었다가 다시 이준을 노려보았다.
“넌 여자 뒤에 숨을 줄 밖에 모르나봐?”
그녀의 도발에 준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는 이미 이혁이 자신과의 대결에서 사용한 피의 구슬의 출처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이옥의 뻔뻔함에 더욱 화가 났다.
“그만!”
세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둘째 장로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어린 것이 방자하기 그지없구나. 당장 내려가!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한 달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될 줄 알아라!”
이옥을 호되게 나무란 둘째 장로는 도도하게 서서 머리카락을 돌돌 말고 있는 이은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은 아가씨, 어서 내려가세요. 두 사람의 도전은 모두 규정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소녀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무대에서 내려갔다.
결국 이옥 역시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문 채 무대에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대에서 내려가면서 분을 이기지 못 하고, 이준을 향해 다시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너 이 자식, 두고 봐!”
모든 상황이 정리된 듯 하자, 둘째 장로는 진땀을 흘리며 준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혁은 시합 중 규정을 위반하고 연금 비약을 복용했다! 3개월간 바깥 출입을 금하고 방에서 반성하라!”
“도전 끝! 이준 승!”
소년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한 차례 소란이 끝난 후 예심에 합격한 나머지 사람들도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준 이후로는 누구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 했다.
그 날의 주인공은 명백히 이준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 행사가 성원 리에 막을 내리자 준은 은과 함께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