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피의 구슬
둘째 장로는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조차 잊고, 몇 번이나 비석을 다시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둘째 장로님, 시험이 끝났습니까?”
소년의 담담한 목소리에 노인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머리를 끄덕였다.
“1년 안에 5단을 뛰어 넘다니…… 말도 안 돼.”
이응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는 복잡한 시선으로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이다.
그 사이 비석의 금빛은 천천히 옅어져 다시 본래의 검은 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여전히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 한 듯, 글자가 사라진 비석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흠흠…! 본시험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규정에 의해 이준은 아직 투사가 되지 못 한 수준의 수련자 중에, 도전자가 있다면 대련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합니다.”
비석 시험이 염력의 수련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라면, 도전자와 겨루는 것은 염력과 무투기를 결합한 실제적인 전투 능력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본시험보다 더 중요한 것 이었다.
소년은 무대 중앙에서 아래에 있는 젊은 수련자들을 담담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와 눈길이 닿은 모든 소년들은 움찔거리며 눈을 피할 뿐, 누구도 손을 들고 나서지 못 했다.
“겁쟁이들…”
이혁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로 준을 노려보았다. 결국 그가 몸을 일으켜 무대 위로 올라가려는 순간, 그의 누이가 팔목을 낚아채며 그를 막아섰다.
“왜?”
“네가 올라가도 이길 수 없어.”
그녀는 영악하고 현실적인 여자였다. 게다가 투사가 된지 1년여 만에 3성투사가 될 정도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녀의 말이 틀릴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누이의 제지에 이혁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가 냉정을 되찾으려는 찰나, 여전히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하고 눈을 빛내는 이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그렇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는 별처럼 반짝거리는 소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질투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8단이 된지 1년이 넘었어. 이제 막 8단이 된 풋내기 하나 못 이길 것 같아?”
동생의 표정을 본 이옥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속에 넣어둔 초록색의 동그란 연금 비약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건 2레벨 연금 비약인 ‘피의 구슬’ 이야. 이걸 먹으면 잠시 동안 원래 네 실력의 몇 배에 달하는 실력을 낼 수 있어. 하지만 그 후로 한 달간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 하게 되니,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하도록 해.”
선물을 받아든 이혁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고마워. 이 물건이라면 저 녀석에게 제대로 본 떼를 보여줄 수 있겠어!”
“사고치지 마. 살짝 혼내주기만 해. 만약 중상이라도 입히면 할아버지도 널 지켜주실 수 없을 거야. 지금 저 아이는 예전의 그 폐물이 아니야.”
“나도 알아.”
이혁은 3성 투사인 누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머리를 끄덕인 뒤 다시 한번 이은을 바라봤다.
‘저 빌어먹을 쓰레기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그는 속으로 결의를 다진 뒤 힘차게 손을 치켜들었다.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이혁의 선언에 장내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 쏠렸다. 사람들의 관심에 한층 더 자신만만해진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껏 쳐들고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둘째 장로는 그런 이혁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큰 장로를 보았지만, 큰 장로 역시 인상을 쓸 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 했다.
결국 두 장로는 인상을 찌푸린 채, 두 소년이 무대 위에서 대면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
이혁의 교만한 말에 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쉴 뿐 이었다.
“이혁 군이 이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준아, 도전을 받아들일 것이냐?”
둘째 장로가 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물었다.
“설마 도전을 안 받는 건 아니지? 이은이 지켜보고 있다구, 그녀를 실망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옷깃 속의 연금 비약 덕에,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피의 구슬을 받기 전까지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혁은 누이의 선물덕에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지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아…멍청한 새끼.’
준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준이 머리를 끄덕이자 둘째 장로가 뒤로 물러서며 두 사람에게 은밀히 주의를 주었다.
“너무 무리하진 말도록.”
둘째 장로가 무대에서 내려가자 무대 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 * *
무대 위의 싸늘한 분위기와 정반대로, 무대 아래의 분위기는 상당히 후끈해져있었다.
특히 자리에 있는 귀빈들은 3년 만에 더욱 화려하게 부활한 천재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본격적인 투사들의 대결에서는 염력도 중요하지만 어떤 무투기를 익혔고, 그 무투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등에 따라서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았기에, 투사로서의 진정한 재능을 보려면 대련을 보는 편이 더 좋았다.
하지만 귀빈석에 앉은 이한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염력 수준이 높아졌다고 해서 이를 응용하고 사용하는 무투기도 그만큼 단련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염력 수준이 높다고 해도, 무투기 사용이 어설프다면 실전 능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씨 가문에서는 일정 정도의 성취를 거둔 소년들에게 무투기를 가르치는 가문의 무투기 교사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기로는 준은 아직 무투기 교사에게 제대로 된 무투기를 배운 적이 없었다.
반면 이혁은 이미 4격 단계 중 수준의 무투기 세 가지와 4격 단계 상 수준의 무투기 한 가지를 익히고 있었고, 심지어 이 네 가지 무투기에 있어서는 또래의 다른 누구보다도 숙련도가 높았으니, 자신의 아들이 상당히 불리한 것이 분명했다.
“촌장님, 촌장님께서 보시기에는 도련님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요?”
주희가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묻자, 이한은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글쎄요…준이는 무투기를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 합니다. 게다가 8단에 오른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8단이 된지 1년 가까이 된 저 아이에게는 어렵지 않을까요?”
“아…그래요?”
주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무대 위의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준을 잠시 지켜본 뒤, 매혹적으로 웃으며 이한을 안심시켰다.
“그런데 저는 이준 도련님이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주희의 자신 있는 말투에 이한은 놀란 듯 멍해 있다가, 이내 웃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주희 아가씨 말씀대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해볼까요?”
* * *
이혁은 준을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싸늘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움켜진 그의 주먹에 빠른 속도로 염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발을 내딛으며 빠른 속도로 돌진하자, 그의 손톱 끝에서는 서늘한 빛이 번쩍였다.
화살처럼 준의 목전까지 날아든 그는, 급격하게 방향을 틀며 오른손으로 상대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준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를 지켜보다, 손톱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이준이 살짝 손을 오므리자, 그의 손바닥에서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이혁의 손을 날려버렸다.
꽝!
갑작스럽게 전해진 엄청난 충격에 이혁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열 발자국이나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고통과 당혹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몸을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준의 반격에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이한이었다. 오히려 그의 아들을 처음 보는 주희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있었다.
‘흐음…기대 이상인걸? 아버지 말에 따르면 저 무투기도 최근에 익혔다는 말인데…’
주희는 요염한 붉은 입술에 매혹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 상황을 관망했다.
“너 방금 사용한 거, 무슨 무투기야?”
이혁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아는 바로는 가문에 이런 무투기는 없었다.
하지만 준이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이혁은 더욱 분한 마음이 들어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이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전자를 바라보다 그를 향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순간, 이혁은 자신의 몸이 앞으로 의도한 것 이상으로 준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몸은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상대를 향해 끌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타격 없이 몸이 허공에 뜨기만 할 뿐 별다른 일이 없자, 이혁은 자신만만하게 염력을 끌어 모았다.
‘흥, 이건 또 무슨 짓거리야, 좋아 네 놈의 이 이상한 무투기를 이용해주지!’
“철산장(鐵山掌)!”
이혁이 이를 악물고 염력을 운용하자, 날카로운 기운이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며 이준의 어깨를 향해 떨어졌다.
철산장은 4격 단계 상 수준의 무투기로, 염력이 7단 이상인 사람만이 배울 수 있는 강력한 무투기였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중상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적당히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이준은 상대의 염력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즉시 몸속의 염력을 급반전시켰다.
척력장!
드디어 자신이 준비해온 무투기를 시험해 볼 때가 왔다. 준은 슬며시 미소를 띠며 염력을 내뿜었다.
갑자기 준의 손바닥에서 밀어내는 힘이 발산되자, 이혁은 순식간에 두 개의 기운 사이에 끼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기이한 파열음과 함께 이혁의 몸이 밀려나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입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준은 먼 발치에서 피를 뱉어내며 축 늘어진 이혁을 보다가 자세를 풀며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휴…미안합니다 형님. 저는 형님만큼 모질지가 못 해서 병신만은 면하게 해드리려고 힘 조절을 한답시고 했는데…형님이 이렇게 한 방에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네요.”
비참하게 피를 토하는 이혁에 비해 이준은 너무나도 태평했다. 두 사람의 대립되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결이 시작하자마자 피를 토하는 동생을 본 이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자식이 언제 저렇게 강해진 거지? 염력 수련을 하는 중에 언제 무투기까지 배운 거야…?”
* * *
“흐음…이준 도련님이 염력만 강한 게 아니라, 무투기의 숙련도도 아주 대단하신데요? 촌장님께서 심혈을 많이 기울이셨나 봐요.”
주희의 칭찬에 이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투기를 저렇게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염력의 운용방법은 물론이거니와 언제 어떻게 무투기를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씨 문중에서 준에게 무투기를 가르친 이는 없었으니, 이한은 기쁘면서도 어리둥절할 뿐 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이 지금 쓴 무투기는 분명히 이씨 가문의 무투기가 아니었다.
‘흠…준이는 대체 누구에게 무투기를 배운 걸까?’
이한은 준이 어디서 무투기를 배웠을까 의문을 품다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가문의 고위급 인사들이 모두 자신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들 준의 납득할 수 없는 무투기 숙련도를 보고는 촌장이 몰래 고급 무투기라도 가르친 모양이라고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내 아들이지만 참 비밀이 많은 녀석이군…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