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성인식
이준은 이옥이 자리를 완전히 떠나자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귀찮은 여자야.”
“저 언니는 왜 오라버니만 보면 저렇게 화를 낼까요. 물론 실수로 목욕하는 데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화가 안 풀릴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깐 말이야.”
준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준아, 괜찮느냐? 방금 옥이 그 애가…?”
사색이 되었던 촌장은 준이 무사한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었다.
“괜찮아요. 미친 여자가 가끔 병이 도진다 생각해야죠.”
“가능하면 이옥을 피해 다니거라. 그 녀석의 성정이 괴팍한 것은 온 마을이 다 알지 않느냐. 이제 3성 투사가 되었으니 만약 진짜 겨루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게다가 큰 장로의 친손녀이니 촌장인 나라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렵다.”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하자, 아들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준아. 인사하거라. 이 분은 유씨 경매장의 수석 경매사 주희 아가씨야. 지난번의 그 연금 비약을 경매한 것도 이분이었지.”
이한이 몸을 돌리자 뒤에 서 있던 매혹적인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은 일부러 더 쑥스럽고, 순진한 척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매혹적인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눈빛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어딘지 모르게 끈적하고 섹시미가 넘쳤다.
“호오…요즘 은빛성 어딜 가나 도련님 소문이 들리더군요. 1년 동안 염력이 4단계나 상승했다지요? 호호, 정말 굉장하네요.”
주희의 칭찬에 준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께서 사주신 영약 덕분이죠.”
‘어머…정말이란 말이야?’
붉은 옷을 입은 매력적인 여인의 눈에 순간 놀라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주희 역시 그 연금 비약의 효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말도 안돼…아무리 연금 비약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1년만에 염력이 4단계나 상승할 수는 없어. 그 정도로 강력한 축기영약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게다가 있다고 해도 그 물건은 그 정도의 효과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구. 만일 그런 영약이 있다면 돈이 좀 있는 가문의 자제들은 죄다 10살도 되기전에 투사가 될걸?’
그녀는 특유의 매혹적인 눈빛으로 준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때, 촌장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고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제 성인식을 거행할 시간이 다 되었구나. 이 애비는 가서 준비를 좀 해야겠다.”
이한이 몸을 돌리자, 주희도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러나 촌장을 따라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한참이나 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주희는 몇 년 간 경매사로 일하며 나름대로 사람을 보는 데는 자신감이 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준같은 분위기를 가진 소년은 본적이 없었다. 앳된 얼굴과 달리 그에게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 * *
성인식의 순서는 복잡하고 지루했다. 이준은 행사 순서에 따라 질질 끌려 다니자니 꼭두각시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휴…이게 무슨 개고생이냐구…”
“어쩔 수 없죠. 이건 오랜 전통인걸요. 촌장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소년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무료함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그가 막 눈을 붙이려는 순간,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또 다시 질투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과 은을 노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주먹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아마도 병신을 만들어주겠다던 말을 오늘 실행에 옮길 생각인 것 같았다.
“한심한 놈…”
짜증이 차올라 눈을 돌리자 이번에는 이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납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준은 일부러 보란 듯이 그녀의 다리를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천천히 훑었고, 이옥은 그런 노골적인 시선에 발끈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옆에서 준을 바라보던 이은은 이 광경이 재미있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준은 이옥과 마주치면 이상할 정도로 평소의 냉정함이나 진중함을 잃고 그녀를 도발하곤 했다.
준은 이옥을 훑어보다 차가운 의자에 기대 몸을 뒤로 젖힌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인식에 참여한 아이들의 절반가량이 호명되자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
이준의 이름이 호명되자 장내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사실 오늘 자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준의 실력을 확인하고자 온 것 이었다.
자리에 있었던 이들도 1년 동안 염력이 4단계나 뛰어올랐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지 못 하는데, 소문만 접한 이들은 오죽했을까.
그들의 눈빛에는 의심과 호기심과 기대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소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무대 위로 걸어나갔다.
성인식의 진행자는 둘째 장로인 이응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준을 볼 때 마다 벌레라도 씹은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날 이후로는 그런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보다 조금 더 미묘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게 됐을 뿐이다.
준이 무대에 오르자 이응은 묘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가 의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들고 준을 향해 걸어갔다.
소년은 둘째 장로가 걸어오는 것을 보자 앞선 아이들이 받았던 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의식이 떠올라 머리가 아파왔다.
* * *
소년은 장내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반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의식에 사용되는 갖가지 향료의 냄새가 뒤섞여 온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복잡하고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는 의식이 모두 끝나자, 둘째 장로가 땀을 닦으며 검은 비석 앞으로 걸어갔다.
“본시험 시작!”
이씨 가문의 성인식은 15세가 된 아이들 중 투사가 될 자질이 있는 재목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예비시험과 본시험 총 두 번에 걸쳐 치러졌다.
이 중 한 달 전의 시험은 가문 중 우수한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한 것으로, 예비 심사에서 선발된 우수한 사람들만이 이 무대 위에서 성인식을 치를 자격을 가질 수 있었고, 염력 7단 이하 아이들은 간단하고 조촐한 의식만을 치르게 된다.
따라서 본시험은 예심보다 엄격하고 더욱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진행되는 것이 전통이었다.
둘째 장로의 선언에 광장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엄숙한 행사인지라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으나, 사람들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일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준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흥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준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담히 걸어가 검은 비석 앞에 멈춰섰다.
노인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눈을 가늘게 뜨고 준을 지켜보았다. 그는 예심에서 나타난 결과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이번에 친히 시험관을 자청하고 나선 것 이었다.
소년은 노인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담담하게 비석에 손을 올렸다.
이옥은 이 광경을 보며 옆에 앉은 자신의 동생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새끼 진짜 7단인 거 맞아?”
그녀는 성인식을 위해 막 마을로 돌아온터라, 준이 1년 동안 염력 7단이 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3단이 아니었던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동생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뭘 주워 쳐먹었는지 정말로 1년 안에 4단을 뚫었어.”
이옥은 뭐가 그리 분한지 발을 동동구르며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흥!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고는 믿을 수가 없어!”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무대 위를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저번에는 저자식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이번에는 둘째 장로가 직접 감독하니 무슨 수로……”
그러나 무대 위의 비석에서 뿜어져 나온 금색 글자에 그녀는 다음 말을 그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검은 비석에서는 황금빛으로 ‘염력 : 8단’ 이라는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비석을 중심으로 성인식장 내의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빛성의 몰락한 천재가 정말로 1년 만에 염력을 4단계나 끌어올렸는지를 확인하러 온 것 이었다.
하지만 상상 이상의 결과에, 그들은 놀라움을 넘어서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씨 가문에 경사가 났군.”
“이런…잘하면 이씨 가문에서 투황(鬪皇)이 나오는 걸 볼 수도 있겠는 걸.”
귀빈석에서는 낮은 소리로 탄식과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런 작은 가문에서 투황 수준의 강자가 나타난다면, 아마도 제국의 권력 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투황은 가한제국 내에서도 고작 2~3명에 불과한 절대 강자로, 혼자서 능히 수 천 명을 대적할 수 있었다. 실제로 과거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투황급 투사가 수 천 명의 적군을 도륙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은 30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술자리에서 언제나 입에 오르 내릴 정도로 유명한 일 이었다.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투황이 가진 위력에 전율했고, 당시 투황에게 살해당한 사람들로 인해 주위의 땅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했다.
그 때 이후로 투황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 대륙의 모든 제국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투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고, 한명이라도 더 많은 투황을 육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역시 내 아들이다.”
이한의 눈가가 감동으로 파르르 떨렸다.
“이 촌장님, 이준 도련님의 재능이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로 투황도 꿈이 아니겠어요.”
이한의 옆에 앉아있던 주희가 자신의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하자, 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주희 아가씨, 과찬이십니다. 3년 전에 겪었던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워낙 들쑥날쑥한 녀석이라…”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과 아들에 대한 신뢰가 묻어나고 있었다.
주희는 이토록 들쑥날쑥한 재능을 가진 천재가 있다는 사실에 흥미가 동했다.
평범한 재능이라면 모르겠지만, 12살에 염력 회오리를 완성한 천재가 3년동안 바닥을 기다가, 다시 1년 만에 염력을 5단계나 끌어올리는 일은 투기 대륙의 기나긴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 이었다.
준의 재능은 말 그대로 투황급의 천재성과 평범에도 못 미치는 쓰레기 사이를 급격하게 오고가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몇 년 사이에 다시 평범에도 못 미치는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일단 가까워지는 것이 좋겠네.’
* * *
이옥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입조차 다물지 못 하고 멍하니 굳어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애꿎은 이혁을 향해 짜증을 부렸다.
“7단이라면서? 어떻게 또 올라갈 수가 있어?”
이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있다가 억울한 표정으로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저번 달에 분명 7단이었어. 근데, 한 달 사이에… 말도 안 돼…”
“한 달 사이에 7단에서 8단이 어떻게 돼! 저 새끼가 예전의 재능을 회복했다고 해도, 그렇게 빠르게 올라갈 수는 없잖아!”
“나도 알 수가 없어……”
이혁은 넋이 나가 쓴 웃음을 짓다가, 무심코 이은을 보고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는 무대 위의 이준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