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역지사지
바닥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준을 올려다보던 이극은 수치심과 모멸감을 이기지 못 하고, 고개를 틀어박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준이 아이들을 향해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건 12살 때 투사가 되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다가 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이 하는 충고니까 가볍게 듣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네가 남들보다 조금 낫다고 함부로 굴지 않는 게 좋아. 추락하는 건 한 순간이니까. 그리고…입장이 바뀌면 지금 네가 하는 행동들이 다 그대로 돌아갈 거야.
남들보다 조금 낫다고 함부로 굴지 않는 게 좋아. 추락하는 건 한 순간이니까. 입장이 바뀌면 지금 네가 한 행동들이 다 그대로 돌아갈 거야.
그의 머릿속에는 몇 번이나 그 말이 울려 퍼졌다. 아마 장내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설아와의 파혼 사건 때 느꼈던 막연한 공포감이 현실이 되자, 자리에 있는 모든 아이들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극은 자신에게 준이 어떤 모욕스러운 말을 뱉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러나…뜻 밖에도 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덩치 큰 소년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준, 네가 이겼어…회복된 걸 축하해!”
준은 살며시 웃으며 머리를 살짝 끄덕인 뒤, 다시 한 번 훈련장을 죽 훑어보았다. 지금 자리에 있는 불합격자들은 감히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도전하실 분?”
준이 여유롭게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자 불합격자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준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몸을 돌려 훈련장 구석을 향해 걸어갔다.
이은은 자신의 옆에 와서 앉는 준을 보며 또 한 번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훈련장 안을 한번 슥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낮은 목소리로 툴툴댔다.
“오라버니, 사람들이 이제야 오라버니를 예전처럼 보네요.”
하지만 준은 코를 문지르며 담담하게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글쎄…3년 전에는 사실 그들의 시선을 즐겼어.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느낌도 없어. 사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우리 오라버니가 3년 사이에 어른이 됐네요!”
이은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자, 준 역시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쪼끄만 게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나는 1성 투사예요! 뭐 이런 거야?”
둘의 다정한 모습에 주위의 소년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이은을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소녀들도 이제 상당수가 이은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본다는 점 정도였다.
그리고…자리에서 유난히 분노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혁 이었다.
‘빌어먹을…쓰레기 같은 놈이 턱걸이로 합격했다고 기가 살아서는…! 두고 보자. 성인식 날이면 약속대로 널 병신으로 만들어주마.’
그 역시 오늘 이준의 실력을 보고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씨 가문에서 초보 수련자 중 이은 다음의 실력자는 아직까지 자신이었다.
‘흥…그래, 네놈이 천재라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병신이 되면 다 소용없는 일이지.’
이혁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7단과 8단 사이에는 6단과 7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다. 1년, 2년 뒤라면 모를까 불과 2주 뒤에 있을 성인식까지는 자신이 더 강할 것이 자명했다.
‘좋아. 2 주 뒤에 널 병신으로 만들어도 이은 저 계집이 널 그런 눈으로 바라볼지 확인해보자. 호랑이도 다 커야 호랑이지. 새끼 때 늑대에게 물려죽으면 다 소용없는 짓이야. 큭큭… ’
준은 이혁의 시선과 표정을 보고, 그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바보는 불치병이군.’
준의 눈에 이혁은 이빨조차 감출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이극의 패배 이후 준에게 도전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불합격자들은 준을 제외한 다른 이를 찾아서 재도전을 했지만, 대부분은 패배하고 소수의 아이들만이 숙련된 무투기와 약간의 행운의 힘을 빌어 염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머쥐었을 뿐, 큰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자 이한은 환히 웃으며 몸을 일으켜 시험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한 달 뒤의 성인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준은 무대에서 웃음을 참지 못 하고 연설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이한은 촌장으로서의 체면도 잊은 채 연설을 하다 말고,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아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말았다.
* * *
시간이 흘러 어느 새 성인식이 7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준은 아직 8단에 이르지 못해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이틀 동안 내리 노력을 했으나 여전히 성과가 없자, 이준은 아쉽고 실망스러운 마음에 반쯤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며칠간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편히 쉬며 뒹굴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성인식을 거행하기 이틀 전, 단잠에 빠졌던 준은 갑자기 잠꼬대라도 하듯 벌떡 일어나 옷도 벗지 않은 채 영약에 몸을 담궜다. 그것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순전히 잠결에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새벽 무렵, 그는 갑작스레 들끓는 강렬한 기운에 눈을 떴다.
* * *
한 가문이 오래도록 세를 유지하려면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시대를 풍미하는 강자가 나왔다고 해도,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면 그 가문을 결코 명문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성인식은 가한제국의 모든 가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였다.
이씨 가문의 성인식은 은빛성 3대 가문 중 한 축을 차지하는 가문의 성인식인만큼 상당한 주목을 받는 행사였고, 매년 성인식이면 가문과 우호적인 세력의 귀빈들이 은빛성을 방문했다.
* * *
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에 설치된 커다란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는 커다란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번 성인식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 이었다.
그는 텅 빈 무대 위를 조용히 훑어보다가 무대 아래에 모인 각 세력의 사람들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많이도 왔네.”
“오라버니, 염력이 8단이 됐네요?”
이은이었다.
‘이 녀석이랑 있으면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네.’
하도 신통하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준은 체념한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좀 신기하네요…한 달도 안 되서 8단이라니…”
여태까지 태연하게 웃기만 하던 이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대 주변에 서 있는 한 여성을 보고는 눈을 떼지 못 했다.
거대한 무대 가까이에서는 한 여인이 새빨간 치마를 입고 환히 웃으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새빨간 색 이상으로 인상적인 것은 전신에 완전히 밀착된 옷감이 주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내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하나같이 그녀의 육감적인 몸에서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완벽하게 발달한 달덩이 같이 보드랍고 탄력있는 둔부는, 뭇 사내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새빨간 옷을 입은 여인은 경매장에서 만났던 주희였다.
“에헴……”
준이 홀린 듯 주희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을 발견하고, 이은이 헛기침 소리를 내자, 준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거뒀다.
준이 시선을 돌리자 이은도 더 이상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이은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어? 저 여자는 왜 왔지?”
“누구?”
두 사람의 눈길이 향한 곳에는 유달리 새하얀 피부를 가진 예쁘장한 여자 하나가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여자치고는 제법 키가 큰 그 백옥같은 미녀의 허리춤에는 긴 검이 반짝이고 있었고, 아찔할 정도로 가늘고 기다란 팔다리와 부러질 듯 잘록한 허리는, 주희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옥?”
준은 그녀를 바라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여자 가람 아카데미에 간 거 아니었어? 왜 돌아왔지?”
이은이 귀엽게 어깨를 으쓱했다가 갑자기 머리를 돌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어머 오라버니, 오늘 또 귀찮을 일이 생기겠네요.”
준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만지며 낮은 소리로 탄식을 내뱉었다.
“아오…저 미친 여자는 왜 나타난 거야…”
“다 큰 아가씨 몸을 함부로 더듬으니까 벌 받는 거예요!”
은의 짖궂은 농담에 준은 더욱 머리가 아파오는 듯 했다.
3년 전 쯤, 준은 언제나처럼 뒷산에 올랐다가 온천욕을 즐기고 있는 그녀의 알몸을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고, 어쩌다보니 흥분해서 달려드는 그녀를 뿌리치다 그녀와 입맞춤을 한 이후, 그녀는 준만 보면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하아…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고. 그렇다고 해도 칼 빼들고 쫓아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준의 짜증이 가득한 말투를 듣자, 이은이 입을 가리고 한참을 깔깔 거렸다. 그리고 준이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뿐만은 아니었다.
“저 여자 이혁의 친누나잖아. 저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개차반이야.”
바로 그 때, 이옥이 누군가 자신의 험담을 하고 있는 것을 눈치라도 챈 듯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한 눈에 둘을 알아보고는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하하, 네가 다시 기어 올라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네.”
준 역시 그녀와 마주치자 불쾌한 기색을 추호도 숨기지 않았다.
“신경 꺼.”
“지난 3년 간 밑바닥에서 정신을 못 차렸나 보네.”
이옥이 이준을 내려다보며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또 시작이네……”
이혁을 위시한 몇 몇 마을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준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옥만큼은 아니었다.
준은 아무리 냉정을 유지하려고 해도, 이 여자를 보면 불쾌한 표정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쪽 다리는 여전히 늘씬하네요.”
이 말을 들은 이옥의 표정이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과거사가 떠오른 이옥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허리 춤에 차고 있던 장검에 손을 올렸다.
준은 그녀가 장검에 손을 올리자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왜? 싸워 보시게요?”
“까불지 마!”
준은 그녀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옥의 가슴팍에 새겨진 별 3개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3성 투사? 1년 사이에 많이도 발전했군.’
“어딜 보는 거야?”
이준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꽂힌 것을 느낀 이옥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자들한테 보여주려고 이 따위로 입은 거 아니었어요?”
“이 새끼가!”
이옥은 끝내 분을 참지 못 하고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들어 준을 겨누었다.
“혀를 잘라 버릴 거야!”
하지만 준은 서슬 퍼런 장검이 자기 목전에 와있는데도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의 화를 돋구었다.
“어디 해보시지.”
준은 오른손을 안으로 오므려 몰래 손바닥에 흡력을 끌어 모았다. 비록 염력은 낮지만, 무투기를 세 개나 익히고 있으니 허를 잘 찌른다면,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은은 당장이라도 한판 붙을듯한 기세의 두 사람을 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저씨가 오고 있어요.”
이옥은 은의 말에 잠시 멈칫 거리더니 머리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방향에서는 이한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흥! 운 좋은 줄 알아!”
그녀는 촌장을 발견하고 굳은 표정으로 검을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은아, 너는 얼굴도 예쁘지만 투사로서의 자질도 아주 출중해. 장래에 명성이 자자한 투사가 될 테지. 그러니 이런 질 낮은 놈과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 너를 위해서도 좋을 거야.”
“네 언니, 충고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오라버니가 좋아요.”
은의 당돌한 언행에 이옥은 잠시 얼굴색이 변했다가 차분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 마을을 나가 보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게 될 거야. 저 자식보다 훌륭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너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자가 생기면 그때…”
“언니, 걱정 마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은이 차분한 말투로 응수하자, 이옥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가 준을 무섭게 흘겨보고는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