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도전
준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당당한 태도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누구도 소년을 조롱하거나 모욕하지 않았다. 다만, 한없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거나, 비웃을 준비라도 하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 이었다.
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3년 전, 은빛성을 뒤집어 놓았던 천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마도 몇 년 뒤에는 그런 천재가 있었다는 소문만이 전설처럼 남고, 그 천재가 그 후로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씁쓸한 추억이 되겠지.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인생사 모를 일이야. 그런 천재가 어쩌다 폐물이 됐을까. 시험에 탈락한 후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더군.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나 하게 되겠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비석 위에 금빛 글자가 나타나고 시험장 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염력 : 7단”
* * *
너무나 놀라운 결과에 시험관조차도 준의 성적을 발표하지 못 하고 멍하니 비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찻잔이 부서지면서 나는 ‘콰지직’ 하는 소리였다.
무대 위에 자리하고 있던 이한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하고, 손에 든 찻잔을 부숴버린 것이다.
“7단… 준아…!”
비석 옆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보는 촌장의 눈에 물기가 어리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촌장 옆에 앉은 세 장로는 떨떠름한 표정과 놀란 표정이 뒤섞여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1년 사이에 3단에서 7단이라니…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거…허허! 촌장님이 산 연금 비약이 참…참으로 대단하네요. 허허!”
둘째 장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둘째 장로님, 2레벨 축기영액의 효과를 모르시는 건 아니지요?”
이한이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둘째 장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쳇, 말도 안돼. 연금 비약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1년 동안 염력을 4단이나 끌어 올리는건 불가능하다고. 투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야!’
……
시험관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광장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 때서야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준, 염력 7단, 상!”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흥분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시험관의 발표에 시험장 안은 다시 한 번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붉은 옷을 입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던 이안 역시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 못 하고 있었다.
1년 사이에 4단계의 염력 상승.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속도였다. 3년전 가문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받았던 당시의 이준도 이정도 속도는 아니었다.
“이럴 수가! 그의 재능이 돌아왔어!”
“아니야! 예전보다 더 대단할지도 몰라! 1년 안에 4단계라구!”
“이야, 처음부터 나는 믿었다니까!”
시험장 안은 방금 전의 정적이 거짓말인 듯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시험장 한쪽 구석에서는 이혁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사색이 되어 있었다.
……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 하고 계속해서 멍하니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석 위에 떠오른 금빛 글자를 보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그는 3년 전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 때의 그 고양감, 자부심, 그리고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던 오만함…아마도 지난 3년간의 추락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1성 투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준은 자신의 몰락에 감사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주변의 반응에 들뜨거나 교만해지지도 않았고, 돌아온 찬사에 대해 환멸을 느끼지도 않았다. 소년은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의연함, 강인함. 지난 3년이 자신에게 선물해준 것 이었다.
준은 모든 시선을 뒤로 하고 천천히 걸어 무리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환히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에헴…”
어수선한 장내의 분위기는 촌장의 헛기침으로 대강 정리가 되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났으니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시험은 이미 끝났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합격이 되지 않은 사람은 합격한 자에게 한 번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 기억하거라. 기회는 한 번뿐이다.”
6단과 7단을 나눈 이유는 그 둘 사이에 상당히 큰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염력 6단의 수련자가 7단의 수련자를 이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불합격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날같은 희망이라 하더라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시험장 안은 순식간에 사냥감을 찾는 아이들로 인해 달아올랐다. 그들은 만만해 보이는 모든 이들을 찬찬히 뜯어보며 기사회생의 기회를 노리는 중 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불합격자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부활한 천재였다.
‘역시 내가 만만해 보이나…’
준은 속으로 그렇게 뇌까리며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사람들은 아직 오라버니를 얕보고 있나 보군요.”
이은이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준에게 속삭였다.
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 이었다.
이 때, 조용하던 훈련장에서 드디어 한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다른 소년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 소년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준, 너에게 도전한다!”
* * *
한발 앞선 건장한 소년을 바라보며 다른 불합격자들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준의 앞에 선 건장한 소년은 거만한 표정으로 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의심과 멸시의 기색이 가득했다.
‘믿을 수가 없는 걸까, 믿기가 싫은걸까.’
이준은 한숨을 내쉬고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 소년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이 커다란 놈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이놈은 아마 큰 장로의 사람이었지.’
소년의 이름은 이극으로, 그의 기억대로 큰 장로쪽 사람이었다. 준의 기억에 따르면 이 소년은 무너진 지난 3년간 이혁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자신을 집요하게 조롱하던 무리 중 하나였다.
부활한 천재는 자신을 의심하는 소년을 향해 차갑게 웃어 보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받아들이죠.”
준의 여유로운 태도와 까닭 모를 웃음에 이극은 마음속에서 불안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착각일 거야. 1년 안에 4단계를 뛰어 오르다니,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어. 이 새끼가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이 없어!’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이며 창백한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네가 정말 7단인지 확인해보자!”
하지만 준은 그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쓴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훈련장 안으로 걸음을 옮긴 뒤 도전자에게 손짓을 했다.
이한은 손에 묻은 땀을 닦으며 초조하게 훈련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아들을 믿는다고는 해도, 너무나 놀라운 성과를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안에 염력이 4단계나 뛰어오르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 이었다. 은빛성은 물론이고 가한제국 전체에서 1년 안에 그 정도로 성장한 투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자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준이 정말 7단계의 염력 수준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한뿐 아니라 누구도 1년 안에 그 정도로 성장한 투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3년 전에 준이 보여줬던 실력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보다도 더 빨랐다. 아니, 이렇게 빠를 수는 없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은 때로 명백한 사실임에도 의혹만을 불러일으킨다.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도, 늪에 빠진 듯 스멀스멀 차오르는 의심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대결로 모든 것이 확실해지리라.
“절대 진짜가 아니야! 뭔가 속임수가 있는 게 틀림없어.”
광장 변두리에서 이혁이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말했다.
“젠장…거짓말이겠지?”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벚꽃 잎처럼 연분홍을 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둘의 대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사이 이극과 이준의 대결이 시작되고 있었다. 둘은 대련전에 취하는 예를 갖추고 나서 자세를 잡았다.
먼저 시작한 것은 이극이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쉰 뒤, 황소처럼 거세게 바닥을 박차고 준을 향해 돌진했다.
“벽산장!”
커다란 덩치의 소년은 우측으로 파고들며 염력을 한껏 끌어 모은 오른 손바닥을 상대를 향해 휘둘렀다.
벽산장은 4격 단계 중급의 무투기로, 이씨 가문에서 5단 이상의 염력을 만들어낸 사람들만이 배울 수 있는 무투기였다.
하지만 상대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준은 느긋하게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손바닥을 바라볼 뿐 이었다.
자신의 얼굴만한 주먹이 어깨에 거의 닿을 무렵, 준은 천천히 왼쪽으로 몸을 뺐다. 1년간의 혹독한 수련으로 준의 신체적 능력은 또래의 그것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는 단 한걸음으로 극의 공격을 피해내고, 그대로 극의 어깨를 후려쳤다.
“파쇄장!”
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덩치 큰 소년의 신음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는 그대로 신음을 삼키며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서더니 그대로 대자로 뻗고 말았다.
일격으로 상대를 제압한 소년은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준은 자신의 실력을 반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너무나 간단하게 승부가 나자, 훈련장 안에는 준이 시험에 합격했을 때 보다 더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준을 바라보던 모든 소년들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준의 실력이 확실하게 7단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니, 이미 8단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이한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진짜야, 진짜 7단이야…”
대자로 뻗어 움찔거리는 이극을 보며 이안은 놀란 듯 손으로 입을 막았다.
* * *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은 뒷짐을 지고 담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준을 노리고 있던 다른 소년들은 마치 어깨에 묻은 먼지라도 털어낸 듯, 무심한 그의 표정에 도전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하하, 역시 내 아들이다!”
세 장로는 귓가에 들려오는 이한의 의기양양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오늘 촌장의 아들이 보여준 재능은 그들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자신의 손자나 주변 사람들 중에는 이준이 보여준 재능의 발끝조차 따라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1년에 4단계라면 가한제국 전체를 뒤져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 그들은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허탈한 웃음만이 나올 뿐…
“이극 도전 실패! 수련에 좀 더 정진해야겠다!”
의기양양하게 아들의 승리를 선언하는 촌장의 모습은, 그들에게 더욱 큰 패배감을 느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