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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15화 (15/818)

제15화. 4만 골드

준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마음이 불안했다. 경매장에서의 행동으로 보아, 이 여자는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준은 자꾸만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말을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약로였고, 자신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 했을 것이다.

결국 주희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집을 버리고 배시시웃으며 크리스탈 카드를 품에서 꺼냈다. 카드에는 유씨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선생님, 이것은 유씨 경매장의 귀빈용 카드입니다. 이 카드를 소지하고 계신다면 유씨 가문의 어떤 경매장에 방문 하셔도 귀빈 대우를 받을 수 있답니다. 그리고 경매에 필요한 세금도 5리가 아닌 2리만 납부하시면 되죠.”

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카드를 받았다. 지금 그에게는 이 여자의 미모 따위보다 그 카드가 더 중요했다.

카드를 받기 위해 망토 밖으로 내민 준의 손을 보자 주희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군…목소리는 노인인데, 이 손은 젊은 사람의 손은 커녕, 완전히 어린 아이 같은데…?’

이 때, 한 시녀가 밖에서 뛰어 들어오더니 초록색 카드를 주희에게 공손히내밀었다.

“영액의 낙찰가 4만 골드에서 세금을 제외한 돈 전액입니다.”

주희는 웃으면서 시녀에게 카드를 건네받아 준에게 이를 넘겼다.

일단 카드를 건네받은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안에 들어있는 돈이라면 투사가 될 때까지 필요한 연금 비약을 만들 수 있다.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희를 향해 무신경하게 대충 손을 흔들었다.

“이제 가도 되겠습니까?”

“호호, 그럼요. 앞으로도 무언가를 파실 때는, 꼭 저희 유씨 경매장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짤막한 대답을 뒤로한 채 망토를 뒤집어 쓴 이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 * *

사라지는 이준의 뒷모습을 보는 주희의 얼굴에서는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더니 책상 옆으로 걸어와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섰다.

“곡니 아저씨, 저 사람 진짜 연금술사에요?”

주희는 불쾌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유씨 가문의 연금술사에게 공손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네. 뿐만 아니라 정제술이 저보다 훨씬 낫습니다. 저 자가 내놓은 물건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죠. 저는 저 물건을 정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조합표가 있어도?”

“아가씨, 조합표라는 것은 연금술사에게 있어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절대 저 사람에게 조합표를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경지를 모르는 연금술사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유씨 가문이라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몇 십 년전에 제크 가문에서 단왕 고하의 약물 조제법을 알아내려 했다가, 네 분의 투왕에게 멸문 당한 것을 잘 알고 계시지요? 가한제국의 황실조차 막지 못 했던 일입니다. 비록 지금 유씨 가문이 그 당시의 제크 가문보다 대단하다고는 해도 연금술사를 건드리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연금술사라는 족속들은 독을 품은 벌집과도 같아 잘못 건드렸다가는 뒷일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지요. 그들이 가진 꿀을 탐내다가는 화를 면치 못 할 것입니다. 연금술사들은 대개 발이 아주 넓고, 그 끈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는 본인만이 알지요. 수 많은 강자들이 뛰어난 연금술사를 탐냅니다. 심지어 투왕의 경지에 오른 투사들이라도 어떻게든 그들의 환심을 사고 싶어 안달이지요.”

안절부절 못하는 곡니를 바라보며, 주희는 매끈한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제가 무슨 수로 저 사람의 처방을 알아내려고 하겠어요.”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녀는 아직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준은 좀 도둑질이라도 하다 걸린 꼬마마냥 주위를 살피며 조심조심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는 방의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한 무더기의 약초와 마정석을 꺼낸 뒤에야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구입한 것은 총 8개월 치의 약재로, 그는 올 한 해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수련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준은 느릿느릿 침대 쪽으로 걸어가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누웠다.

‘후…무서운 여자였어.’

준은 오늘 여자의 외모라는 것이 무서운 무기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은이나 이안도 미녀였지만 아직 소녀같은 풋풋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들이 가진 분위기는 생동감이 넘치고 밝은 어떤 것 이었다. 하지만 주희는 달랐다. 그녀의 그것은 아직 어린 소년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어떤 종류의 짙고 끈적한, 그리고 벗어나기 힘든 어떤 것 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총명하고 눈치가 빨랐고, 사내들을 쥐락펴락하는 재주를 가진 여자였다.

결국 가뜩이나 정체를 들킬까 걱정하며 긴장하고 있던 준은, 그녀로 인해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준이 피로에 절어 막 눈을 감으려는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아, 안에 있느냐?”

그는 반쯤 감겼던 눈을 부비적거리며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버지, 웬일이세요?”

“웬 일은? 아버지가 아들 보러 오는 데도 이유가 필요하니?”

준은 천연덕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머리를 긁적거리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한이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다정하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준은 경매장에서 보았던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시큰했다.

“아직도 그 일 때문에 자책하고 있느냐? 허허! 그 애는 머지않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게다. 설마 이 이한의 아들이 그 정도로 기가 죽은 것은 아니지?”

아버지의 인자한 말에 준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하, 아버지. 걱정 마세요. 3년 뒤에 제 발로 운남종에 찾아갈 테니까요.“

촌장은 아들의 말에 기쁜 듯이 웃음을 짓다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한은 잠시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하하, 과연 내 아들답구나. 그런데…정말로 찾아갈 생각이냐?”

준은 싱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 사나이는 절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허허! 역시 내 아들이다! 두 형도 너의 생각을 알면 기뻐할 것이다.”

아들의 확답을 듣자 이한은 안심이 된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 애비는 우리 아들이 자신의 명성을 되찾을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구나. 어쩌면 고 맹랑한 계집아이가 우리 아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빌지도 모르겠는 걸?”

준은 아버지가 왜 왔는지 눈치 채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아버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자, 여기. 우리 아들이 남자답게 맞서는데 아버지가 선물을 준비했다.”

아버지가 다소 머쓱한 표정으로 꺼낸 것은 바로 자신이 경매장에 올렸던 그 물건이었다. 몇 바퀴 돌고 돌아 결국 자기 손에 돌아온 연금 비약을 보니 기분이 묘했지만, 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놀란 시늉을 했다.

“아버지, 이건……?”

“축기영액이라고 염력 수련 속도를 향상하는 효과가 있는 물건이란다. 오늘 경매장에서 사 온 것이다.”

“돈을 많이 쓰셨겠네요.”

병을 받은 이준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4만 골드. 하지만 이건 그만한 값을 할게다.”

“4만 골드를 주고 저한테 줄 영액을 사신 걸 장로들이 알면 또 아버지한테 시비를 걸겠네요…”

소년은 걱정이 되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말거라. 이 애비는 촌장이다. 그들도 별 수 없어. 기껏해야 볼멘소리나 하다 끝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담담한 아버지의 태도를 보자, 준은 또 다시 마음이 뭉클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1년 뒤에는 반드시 그 노인네들의 더러운 입을 다물게 하겠습니다.”

이한은 자신감이 넘치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 날아오를 듯 기분이 좋아졌다. 아들의 이런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좋아! 우리 아들이 또 한 번 성장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겠다. 이제 그만 쉬거라.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고.”

그는 용건을 마친 뒤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려, 특유의 큰 걸음걸이로 앞마당쪽을 향해 걸어갔다.

“젠장, 이제 그 노인네들 상대하러 가야지.”

넉살좋게 혼잣말을 하며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준은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 * *

준은 아버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약병을 들고는 구석진 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녀석, 다른 사람 말을 몰래 엿들으니 재밌지?”

“어머, 오라버니! 역시 감이 예리하네요.”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보라색 치마를 입은 아리따운 소녀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오라버니, 오후에 어디 갔었어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작은 두 손을 예쁘게 포개어 뒷짐을 지고는 하늘하늘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냥 심심해서 구경 나갔어.”

“그래요?”

이은은 준에게 다가와 그를 위 아래로 훑어보다 갑자기 몸을 바짝 붙이고는 코를 찡긋거렸다.

“어머, 이건 여자 향수 냄새인데? 우리 오라버니가 나 몰래 만나는 여자라도 있나봐요?”

“이 녀석, 장난치지 마. 여자는 무슨!”

준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소녀는 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녀는 잠시 동안 신나게 웃어대다가,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아저씨 말씀하시는 거 저도 들었어요. 저도 오라버니는 믿어요. 그리고…음…나중에 운남종에 갈 때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소년은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깜빡이며 소녀의 예쁜 얼굴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볼 뿐 이었다. 준의 눈빛에 이은은 자기도 모르게 볼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어머 오라버니, 뭘 그리 뚫어져라 보는 거에요?”

“하하, 너도 부끄러워 할 줄 아는구나?”

이준은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치…”

이은이 토라진 듯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준은 그녀를 달래듯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알았다 알았어. 운남종이 강하긴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고, 시간도 많아. 걱정하지 말아라.”

이준은 웃으면서 이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늦었어. 빨리 돌아가서 쉬어.”

손을 흔드는 이준을 보며 이은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이고는 그의 눈길을 뒤로 한 채 천천히 멀어져갔다.

* * *

복도를 굽어 들자 방안에서 이한과 몇몇 장로의 다툼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4만 골드가 문제였다.

‘좀팽이 같은 늙은이들 같으니라구.’

그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긴 숨을 내쉬고는 카드 한 장을 꺼내들고 장로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연금 비약 값은 제가 낼게요. 카드 안에 10만 골드가 있으니, 장로님들은 아저씨 그만 귀찮게 하세요.”

* * *

산 정상의 숲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무 사이를 날렵하게 가로질러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그림자는 오래된 고목 앞에 멈춰서더니 팔꿈치로 나무를 힘있게 내리쳤다.

“태초의 힘!”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팔꿈치가 닿은 곳은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날리고, 내리친 곳 주위가 거미줄 같은 모양으로 갈라졌다.

콰직!

팔꿈치 한방에 거대한 나무가 몇 번을 휘청거리다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림자는 나무가 쓰러지는 순간 번개처럼 몸을 날려, 멀찍이 떨어진 푸른 색 바위 위에 유유히 내려섰다.

‘이거야!’

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신의 염력은 6단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 파괴력이라면 8단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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