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잔혹한 수련
약로의 대답에 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묻지 마, 지금 알아 봤자 너한테 도움 안 돼. 모르는 게 낫다. 다만 그 애는 네놈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인물이라는 것만 알고 있어라. 그리고 이 쓸모없는 물건은 왜 가지고 왔어? 힘이 남아도나 보지?”
약로는 이은의 문제를 일축하고 책상 옆으로 와서 두루마리를 툭툭 쳐댔다.
“쓸모없는 물건이요? 전 지금 흡장 외에 어떤 무투기(武鬪技)도 몰라요. 전에는 염력만 수련했지 무투기를 배워 본 적이 없다구요. 게다가 우리 가문에서는 이런 4격 단계의 무투기만 마음대로 배울 수 있어요. 이런 것이라도 안 배우면 성인식 때 무슨 재주로 다른 사람이랑 겨뤄요?”
“영악한 놈. 나한테서 무투기를 얻어 가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약로는 이준을 향해 눈을 흘겼다. 눈치가 빠른 약로가 이준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이준은 대답 없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봤다.
“그깟 무투기가 뭐 대단하다고. 앞으로 정제술을 배우면, 고급 단계 무투기도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갖다 바칠 것을.”
약로는 또 다시 제자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이미 준을 놀리는 것은 그의 확실한 취미가 된 듯 했다.
“근데 저는 지금 고급 무투기가 필요하다고요 스승님! 나중이 아니라 지금요! ”
이준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제자의 답답해하는 모습에 약로는 즐거운 듯 낄낄거리다 입을 열었다.
“알았다. 너 같은 애송이를 제자로 둔 내 팔자라 생각해야지. 모처럼 받은 제자가 1년 만에 병신이 되면 안되니까.”
노인의 말에 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 흡장은 비록 4격 단계의 무투기이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무투기는 아니야. 지금 네 실력이 강하지 않으니 우선 공격력으로 유명한 3격 단계의 무투기를 가르쳐주지. 이 무투기는 염력이 5단만 되도 위력을 조금 발휘할 수 있을 것이야.”
3격 단계의 무투기라는 말에 소년의 눈은 더욱 반짝 거리기 시작했다.
“3격 단계 어떤 수준이요?”
“3격 단계 상, 상이다 이놈아. 내 기억에 이 무투기도 왕년에 어떤 사람이 울면서 제발 받아달라고 했던 거지.”
약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에게 3격 단계 상 수준의 무투기는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만도 못 한 것 같았다.
“3격 단계 상을 요? 울면서 받아 달라고 했다고요?”
준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이씨 가문의 최고 무투기라고 해봤자 3격 단계의 ‘중’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3격 단계 ‘상’의 무투기를 쓰레기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무투기를 얻기 위해 구걸하는게 아니라, 제발 받아달라고 구걸하는 것을 받은 것뿐이라니…준은 약로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시끄러 잡놈아. 두 눈 감고 정신이나 집중 해.”
약로가 또 다시 험한 말을 내뱉으며 준의 이마에 손가락을 올리자, 머리에 약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엄청난 정보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 태초의 힘 : 3격 단계 상 무투기, 근접 공격 무투기, 공격력 매우 강함. 무투기를 완성하면 공격에 여덟 배의 힘이 실림. 완성했을 때의 위력은 2격 단계 하 수준의 무투기와 비슷한 공격력을 갖게 됨. -
준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공격력이 2격 단계 하 무투기와 비슷하다고?’
투기대륙에서 염력 수련법이나 무투기의 수준을 나눌 때, 2격 단계와 3격 단계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여 같은 수준에서 평가받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 이 무투기는 3격 단계 밖에 되지 않는데도 공격력이 뛰어나 2격 단계 무투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니! 그는 들뜬 마음에 넋이 나간 듯 멍해졌다.
“그만! 정신 차려. 태초의 힘 염력에 대한 요구는 높지 않지만, 신체의 강도에 대한 요구는 매우 높은 무투기다. 이건 근접 공격용 무투기라 지금 너처럼 이렇게 빼빼 마른 팔다리로 억지로 사용하면 상대를 건드려 보기도 전에 네 몸이 박살날 테지.”
약로의 말에 찬물을 끼얹은 듯 방금 전의 감동이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육체를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염력은 육체를 단련할 수 있는 최상의 기(氣)라고 할 수 있다. 염력이 강해질수록 육체도 따라서 강해지지. 물론…더 빠르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외부의 자극이 필요해.”
약로는 눈을 반쯤 감고 말했다. 그의 입가가 씰룩거리는걸 보니 준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떤 외부 자극이요?”
“푸하하! 맞아야 돼! 심하게 맞을수록 좋아! 병신이 되거나 죽지 않는 선에서 아주 신나게 얻어맞아야 하지!”
약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신이 나서 웃음을 터뜨렸고, 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른 아침, 옅은 안개가 아직 뒷산 산꼭대기를 뒤덮고 있는 시간…산 정상의 한 수풀 속, 한 소년이 시퍼렇게 멍든 맨 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꼿꼿이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반만 실체화된 영혼상태의 약로가 큰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약로의 손이 움직이자, 연한 붉은 색 빛이 뿜어져 나와 채찍처럼 준을 후려쳤고, 순식간에 소년의 몸에 시퍼런 멍 자국이 하나 추가됐다.
준은 입을 벌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통증을 참아냈다. 한 방을 맞을 때 마다 통증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통증이 찾아온 뒤에는 염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한 번 더요!”
퍽!
퍽!
수풀 속에서는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낮은 신음소리가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약로는 준이 기절하거나 큰 부상을 당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괴로울 정도의 절묘한 강도로 채찍질을 해댔다. 붉은 기운이 허공을 가로지를 때 마다 준은 까무라칠 듯이 아팠지만, 참아내야 했다.
다시 몇 번의 채찍질이 끝나고, 준은 끝내 한계에 달한 듯 그대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그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스승을 바라봤다.
“스승님, 어때요?”
“아주 훌륭해. 오늘 여든 네 번의 무투기 채찍을 받았어. 한 달반 전에 아홉 번 이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훌륭한 셈이지…”
약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지난 한 달반 동안 자신의 제자가 보여준 인내력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 이었다.
노인의 말에 준은 힘이 풀린 듯 흙더미 위에 앉아 한참을 쉬다가, 감각이 돌아오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위 위에서 옷을 집어 들었다.
옷자락이 몸에 스치자 또 한 번 쓰라린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아으으…”
그 사이 약로는 빛이 되어 다시 검은색 반지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돌아가서 연금비약에 몸을 담궈라! 아니면 몸에 남은 멍 때문에 중상을 입게 될 게야!”
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터덜터덜 산에서 내려갔다.
* * *
준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닫고 서둘러 옷을 벗은 뒤 연금비약이 담긴 통속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약물이 온 몸을 적시자, 놀라운 속도로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힘을 뺀 채 나무통 끝에 기대어 누웠다. 잠시 후 거친 숨소리가 천천히 평온해지고, 미약한 숨소리가 다시 코고는 소리로 바뀌었다.
……
준이 깊은 잠에 빠져있는 동안 약물이 서서히 움직이는 듯하더니, 부드럽고 신비한 기운이 그의 모공을 통해 천천히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영롱한 녹색 약물은 그의 몸 곳곳에 그려진 피 멍을 깨끗이 씻어서 없애줬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계에 닿은 육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기 까지 했다.
* * *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자 어느 새 뜨거운 햇살이 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준은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밤새 약물에 담겨있던 몸은 어느 새 상처 하나 없이 말끔히 고쳐져 있었고, 그의 온 몸 구석구석에서는 활력이 넘쳤다.
“으아! 개운해!”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지난 밤 사이 통 안의 푸른색 물이 깨끗하고 투명한 맑은 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약을 다 흡수한 거야?”
그는 씨익 웃더니 두 눈을 천천히 감고, 몸속의 염력을 천천히 느껴보았다.
“아하하! 드디어 내 염력이 5단이 되었어!”
* * *
보름 사이에 염력이 4단으로 올라가고, 한 달 반 사이에 다시 5단까지 염력을 회복 했다. 이는 과거에 천재로 추앙받았던 자신의 수련 속도와 비교해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한 단계가 오를 때마다 마주하는 벽도 높아진다고 하지만, 지금의 수련 속도라면 1년 안에 염력 7단에 오르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오를지도 몰랐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돈, 그리고…채찍질…
‘돈이 우선이지. 연금비약 없이 저 매질을 당하면 아마 3일도 안 돼서, 시체가 될 테니까.’
준은 눈앞이 캄캄했다. 고통이야 이를 악물고 버티면 그만이고, 하루 종일 앉아서 수련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돈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난번 재료들을 산 뒤 남은 것은 고작 9백 골드 정도였다. 이 돈으로 지난번과 같은 등급의 재료들을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하다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스승님, 난초나 황혼의 잎새는 연대가 낮은 것을 사도 될까요?”
“가능하지. 하지만 약효가 전보다 약해지겠지. 내가 너한테 만들어 준 연금비약은 최상의 조합으로 정제한 거니까.”
“괜찮아요. 이번에는 제일 낮은 레벨의 재료들로 정제해주세요.”
“제일 낮은? 염병, 그럼 약효가 엄청 떨어져서 너는 반년이 지나야 다음 단계 염력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야.”
또 다시 욕이 튀어나왔다. 약로는 상당히 짜증이 난 듯 했다.
“돈이 부족해? 그럼 그 여자애를 찾아가. 고 꼬마계집이라면 몇 만 골드라도 마련해줄테니. 아니면 아버지라도 찾아가던가. 이 멍청한 놈아.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지금 병신이 되게 생겼는데, 자존심을 챙기는게냐? ”
약로의 말을 들은 이준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자존심이 있다고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여자애한테 손을 내민다는 게 말이 돼요? 아버지한테도… 됐어요… 아버지를 두 달 동안 피해 다녔는데 만약 찾아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그 분은 어디에 필요한지 꼬치꼬치 캐물을 거예요. 그러다가 스승님 일이 탄로나면 큰일이라구요.”
하지만 돈을 구하지 못 하면 강해지지 못 한다. 그 때, 어떻게 하면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한참을 궁리하던 준의 머릿속에, 기막힌 묘책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스승님, 이 연금비약을… 다른 사람도 정제할 수 있어요?”
“이런…멍청한 놈이. 투기대륙에는 약재가 수도 없이 많다. 다른 효과를 가진 연금비약을 정제하려면 반드시 수많은 재료들 중 내가 정제하려고 하는 마정석의 광폭 에너지를 중화시키는 약재를 골라야 되느니라. 그래야 내가 원하는 연금비약을 정제할 수 있는 게야. 만약 이것저것 가져다가 정제했다가는 연금비약을 망쳐. 그리고…”
약로는 말을 끊고 기이한 웃음을 짓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여튼 이 연금비약은 내가 몇 년간 실패를 거듭하다가 성공해 낸 처방이야. 물론 어떤 호랑말코 같은 놈이 대충 비스무리하게 만들어 볼 수야 있겠지. 결과야 빤하지만. 게다가 정제를 할 때 세 가지 재료가 녹아드는 정도와 양, 불의 농도가 바늘구멍에 실 통과하듯 정확해야 성공하는 거란 말이다. 왜 모든 연금술사들이 1:1로 사제관계를 맺는 줄 아느냐 이놈아? 이래서 그런 거다. 재료의 조합, 재료를 녹이는 정도, 불의 농도, 재료의 혼합비율, 이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연금비약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이야. 자기가 직접 하나하나 실험해보려면 평생 몇 가지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연금술사의 지혜는 너 같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란 말이다. 투기대륙 전체라면 모를까, 이 쥐알태기 만한 가한제국에서는 이 연금비약을 제조할 수 있는 것은 이 몸뿐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