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충돌
이안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한 때 자신이 사모하고 존경했던 준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소원해져 있었고, 폐물이 된 그와 가까이 하는 것은 그녀의 장래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준은 두 팔을 뒤통수에 갖다 댄 채 느릿느릿 걸어 소녀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바로 그 때, 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이 참지 못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준 오라버니!”
몰락한 천재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마치 낯선 사람에게 말하듯 차갑게 되물었다.
“왜?”
짤막하고 냉담한 그의 반응에 이안은 차마 말을 잊지 못 하고 굳어버렸다.
“아니에요…”
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갔고, 이안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눈동자만 굴리다가 그와 같은 골목으로 걸어갔다.
* * *
골목길을 돌자 넓은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건물의 입구에는 붉은 글씨로 ‘무투기당(武鬪技堂)’ 이라고 적혀 있었다.
건물 안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평일, 그것도 저녁 시간에 무투기당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드문 일이라 준은 의아하게 여겼다.
‘흠…무슨 일이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무투기당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소년 소녀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무투기당은 동과 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동쪽은 가문의 무투기를 보관하는 곳 이었으며 서쪽은 훈련장이었다. 소란이 일어난 곳은 서쪽이었다.
“이혁 오빠가 내는 염력을 봐, 아마 8단은 될 걸?”
“허허, 혁 형님은 두 달 전에 이미 염력 8단을 이뤘어.”
“하지만 은이는 염력 9단이니, 혁 오라버니가 은을 이기는 건 불가능할 거 같아.”
“은아, 힘내!”
‘은이?’
이은이라는 말에 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훈련장을 한 바퀴 훑어보았다.
훈련장 안에는 연보라색 치마를 입은 아리따운 소녀가 서 있었다.
‘저 녀석이 웬일로 다른 사람과 겨루기를…?’
그는 걸음을 멈추고 책장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들어 펼쳤다.
4격 단계 중 : 파쇄장!
준은 책장에 몸을 기댄 채 파쇄장의 수련법을 읽으며 훈련장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무투기당의 널찍한 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은 왁자지껄하고 동쪽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은의 상대는 큰 장로의 손자인 ‘혁’ 이었다. 그는 제법 재능이 뛰어난 사내로, 아직 17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염력은 이미 8단에 이르러 있었고, 지금 또래에서 그보다 더 염력이 높은 사람은 은이 뿐이었다.
이준은 이혁이라는 사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둘은 가끔 길에서 만났을 때 인사나 하는 정도의 사이였다. 첫 째 장로와 촌장인 자신의 아버지의 관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특별히 싸운 적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준은 그 사내가 불편했다.
준은 이은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파쇄장의 수련법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이은은 마치 한 마리 나비같이 우아하게 이혁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 중 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이혁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문득 무투기당의 동쪽에 자리 잡은 그림자 하나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은아, 조심해!”
이은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그녀의 공격에 잠시 밀려났던 이혁이 다시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
준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소녀는 준이 왜 인상을 쓰는지 눈치 채고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간단히 이혁의 공격을 피해낸 뒤, 손을 뻗어 그를 밀쳐냈다. 이은은 이혁이 미처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를 훈련장 밖으로 날려 버렸다. 이혁을 날려 버리는 순간, 그녀의 손에서는 금색 빛이 살짝 뿜어져 나왔지만, 누구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너무나 싱겁게 2인자를 격파한 이은의 실력에 훈련장에는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곧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소리가 들렸다.
“허허, 역시 은이, 네가 우리 가문의 젊은 사람 중 최고임이 틀림없구나. 점점 강해지는 같아.”
이은에게 패배한 소년은 할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그녀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혁의 뜨거운 시선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온통 동쪽 구역에만 정신이 팔려 건성으로 예를 갖출 뿐 이었다.
“아녜요, 오라버니가 양보해 주신 거죠.”
* * *
“준 오라버니!”
소녀는 준에게 한달음에 달려가서는 꽃송이처럼 작고 예쁜 손을 가지런히 모아 뒷짐을 지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준은 두루마리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장내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보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은아, 네가 매력적인건 잘 알겠는데 말이야. 나를 방패삼으면 안되지.””
“히힛!”
이은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기처럼 웃으며, 준의 옆에 앉아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빠, 염력이 4단이 됐어요?”
염력 회오리를 완성하기 전의 염력 수준은 투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세분화 시켜놓은 것뿐이라, 웬만한 영혼탐지능력으로는 정확하게 그 차이를 탐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 차이를 세밀하게 탐지할만한 영혼 탐지 능력을 가진 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시험장에 있는 비석으로 그 능력을 측정하는 것 이었다.
준은 눈이 동그래졌다. 3단에서 4단이면 웬만한 투사들도 느끼지 못 하는 수준의 변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보자마자 정확히 그의 염력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는지 맞춘 것이다.
‘이 녀석…대체 정체가 뭘까. 방금 이혁과 겨룰 때 사용한 무투기는 우리 가문의 것이 아니야. 게다가 엄청 고급 무투기가 틀림없고.’
준은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4단이야.”
고작 4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세상을 다 얻기라도 한 듯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표정만 봐서는 자기가 투사가 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오빠가 지난 보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수련한 것과 연관이 있겠죠?”
“응.”
그는 씨익 웃으며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눈길을 다시 두루마리로 옮겼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 사람들이랑 대련을 한 거야?”
“심심해서요! 헤헷!”
그녀는 이준을 따라하듯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번에 만난 뒤로 보름 동안 날 찾지 않았잖아요. 혹시 내가 돈 갚으라고 할까봐 그래요?”
준은 당황한 듯 순간 멈칫거리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년이면 성인식을 할 텐데 빨리 수련해야지…”
하지만 소녀는 아직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심통이 난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다.
“알았어. 앞으로 시간 내서 너랑 놀아줄게.”
이준의 말에 소녀는 그제서야 다시 환히 웃으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혁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큰 장로의 손자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마을에서 제일 가는 인재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혁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은, 마을 최고의 미모와 실력을 갖춘 이은 뿐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 정도 미모와 실력을 갖춘 여자에게 어울리는 것도 자신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늘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혼자만의 착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쨌든 그의 머릿속에서 이은은 자신의 예비 신부였으니, 그는 자신의 미래 아내가 마을 최악의 폐물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자 질투심과 함께 모욕감을 느꼈다.
‘저딴 쓰레기가 나보다 중요하단 말이야?’
이혁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둘에게로 걸어갔다. 훈련장안의 모든 소년소녀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이준에게로 향했다.
한편 준은 두루마리속의 도안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안에는 인체의 모든 혈관과 함께 파쇄장을 사용하기 위해 염력이 모이고 이동하는 경로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하…’
한창 두루마리에 집중하고 있던 그는 예민한 자신의 탐지능력으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짜증이 솟구쳤다.
‘저 얼간이는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이준은 조용히 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천천히 접었다.
“하하, 이준 동생, 무투기(武鬪技)를 배우러 왔어? 이 사촌 형이 높은 단계의 무투기 수련법을 찾아줄까?”
이혁의 얼굴에는 비열한 웃음이 가득했다.
“관심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필요 없습니다만.”
준은 조용히 사양하며 두루마리를 올려놓았다.
“어, 하하. 깜빡했네. 이준 동생, 염력이 아직 3단밖에 되지 않지… 너무 높은 단계는 솔직히 배우기 어렵지.”
그는 자신의 적의를 조금도 감추지 않은 채 대놓고 준을 비웃고 있었다.
‘하…요즘 내 몸에서 바보를 끌어들이는 신호라도 나가고 있는 건가.’
소년은 여유롭게 웃으며 혁을 올려다보았다.
“은이의 관심을 받고 싶으셔서 이러는 건 알겠습니다만…방법이 유치하군요.”
준의 거침없는 한마디에 이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보아하니 동생이 이 형에게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면 우리 한번 겨뤄볼까? 우리 동생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고 싶은데…난 마을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마을 최고의 천재가 망가졌다는 말이 도저히 믿음이 가질 않아서 그래. 동생정도의 천재가 그럴리 없잖아, 그렇지?”
“저랑 다시 겨뤄볼래요?”
바로 그 때, 이은이 손에 있던 두루마리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살기가 어려 있었다.
자신에게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무심하던 이은의 이런 태도를 보자, 이혁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런, 우리 동생이 여자 뒤에 숨는 자였다니. 실망스러운데?”
“3년 전에는 저한테 이런 말 못했죠?”
준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발끝을 들어 다른 두루마리 하나를 꺼낸 뒤, 책 위에 뿌옇게 앉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혁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저 건방진 놈을 묵사발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촌장의 아들이 아닌가. 섣불리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쉰 뒤 이준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준, 너는 더 이상 3년 전의 천재가 아니야. 지금의 너는 그냥 폐물일 뿐이야. 이은은 너와 어울리지 않으니 네 주제를 알면 일찌감치 떨어져. 1년 뒤 성인식에서 너는 반드시 가문 중 한 사람의 도전을 받게 되겠지. 병신이 되고 싶지 않으면 일찌감치 떨어져 있으라구. 그리고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조용히 사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준은 이혁의 협박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덤덤하게 두루마리를 챙길 뿐 이었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은이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겠네요. 상당히 착각이 심하신 분이군요.”
준은 싸늘한 시선을 뒤로 하고, 무투기당 관리장부에 대여 표시를 한 후, 이은과 함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이, 쓰레기! 두고 봐! 가문에서 쫓겨나게 되면 너를 없앨 기회는 많으니까! 촌장이 없으면 너 같은 건 그냥 버러지라는 걸 알아야지!”
* * *
무투기당을 나선 이준은 신이 난 이은을 데리고 뒷산으로 자리를 옮겨 오후 내내 산책을 하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 방문을 닫자마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녀석… 여자애가 무슨 체력이 이리 좋아.”
“그 계집애, 배경이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
그 때, 약로의 목소리가 방안에서 울렸다.
“스승님 그 애의 배경을 아십니까?”
“허허, 조금 알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