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9화 (9/818)

제9화. 검은 철편

이은은 그가 이렇게 친근한 척 하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하지만 마정석이라는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처음으로 가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잠깐, 오라버니가 찾던 게 마정석이었지!’

이은의 머릿속에는 애타게 마정석을 찾고 있는 이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온은 이은의 속내도 모르고, 그녀가 팔찌에 관심을 갖는 것 같자, 더욱 환히 웃으며 팔찌를 내밀었다.

“아가씨, 받아 주세요. 가 씨 가문과 이 씨 가문은 모두 은빛성을 이끄는 3대 가문의 일원인데, 서로 작은 선물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죠.”

‘흠…그래, 팔찌를 받아서 마정석은 준이 오라버니를 주고, 팔찌는 버리면 되지 뭐!’

이은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바로 손을 뻗어 팔찌를 잡으려 했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휙 잡아챘다.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몰라?”

준이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이은을 나무라며 무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봤다.

“가온 도련님, 마음만 받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훼방꾼에 가온은 순간 인상을 구겼다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이준 도련님, 저는 그저 이은 아가씨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작은 팔찌 하나로,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훨씬 더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이준은 가온의 손에 있는 목령 팔찌를 보더니, 가슴 안쪽으로 손을 넣어 연두색 팔찌 하나를 꺼냈다.

“이유 없이 모르는 사람 물건 덜컥덜컥 받지 마. 내가 한 말 기억 안 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이유 없이 잘해주는 사람 없다고!”

그는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가온의 귀에도 들리게끔 똑똑히 말했다. 가온은이준의 손에 있는 팔찌에 눈길을 멈추더니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소년의 손에 있는 팔찌는 누가 봐도 노점상에서 산 싸구려였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들린 목령 팔찌는 마정석이 담긴 진품으로, 1000골드도 넘는 고가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이준 도련님, 가문에서 지위가 높지 않다는 것은 익히 들은 바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그런 초라한 팔찌라니요.”

준은 가온의 말에 대꾸하기는커녕,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듯 이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질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버리던가… 고작 2~3골드 밖에 안 하니까.”

소녀는 잠시 멍하니 준을 바라보다가 마치 귀중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마냥, 환히 웃으며 잽싸게 팔찌를 낚아챘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하얀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자, 마치 분홍색 장미가 한 송이 핀 듯 했다. 그녀는 신이 나서 서둘러 팔찌를 팔목에 끼우고 이준을 향해 활짝 웃었다.

자신에게는 가시를 세운 장미처럼 굴던 아리따운 소녀가, 이준 앞에서는 강아지마냥 귀엽게 구는 꼴을 보니 가온은 배알이 꼴렸다.

“하하, 이은 아가씨의 취향이 이토록 남다를 줄은 몰랐네요, 제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그는 치솟아 오르는 질투를 억누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작년에 만났을 때 이 녀석 염력이 9단이었지? 그런데 올해 염력 회오리를 모았다고?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투사가 되었다니…’

준은 자신을 쏘아보는 가온의 왼쪽 가슴에 그려진 금색 별을 보고 있었다.그가 자리를 뜰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이준은 코를 쓰윽 문지르며 입을 뗐다.

“도련님의 풍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풍류를 아시는 분으로 아주 유명하더군요. 하지만 우리 은이는 아직 어려서 풍류를 모르니, 다른 아가씨를 알아 보는게 좋을 듯 하네요.”

이준은 상대의 실력 때문에 기가 죽거나 아부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가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은빛성의 3대 가문이라고는 해도, 두 가문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으니, 굳이 친한 척을 할 이유도 없었다.

“앞으로 저 녀석을 멀리 해.”

준은 얼굴이 빨갛게 물든 가온을 본체만체 하며, 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선물을 받아 신이 난 이은은, 반짝이는 두 눈을 깜빡 거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일 뿐 이었다.

이은이 순순히 이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가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매서운 눈길로 눈앞의 소년을 노려보았다.

“이준, 이 개자식!”

주인의 험악한 표정을 보자, 그의 주위에 있던 부하들이 즉시 앞으로 걸어나와 두 사람을 에워쌌다. 갑작스런 상황에 시장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듯,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가온과 이준은 모두 은빛성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가온은 성내에서 알아주는 바람둥이로, 또 이준은…몰락한 천재로. 성내에서 유명한 두 사내에 아리따운 아가씨 하나. 확실히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만한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준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더니, 머리를 돌려 시장 한쪽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문찬을 비롯한 이씨 가문의 호위무사들이 신속하게 시장 안쪽으로 달려와 가온과 그의 부하들을 둘러쌌다.

“셋째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호위대장은 이준에게 인사를 올린 뒤, 가온쪽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 공손하게 물었다.

“가온 도련님, 이 시장은 우리 이씨 가문의 지역입니다.”

이준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가온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온는 6성 투사가 나타나자 섣불리 나서지도 못 하고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이준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준 도련님은 믿을게 가문의 세력밖에 없나 보군요. 만약 남자…”

“지금 나한테… 만약 남자라면 공평하게 겨루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준은 손을 들더니 웃으며 가온의 말을 끊었다.

“호오…자신이 있나보지?”

가온은 잘 걸렸다는 듯 씨익 웃으며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이준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장내에 사람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가온 도련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가온은 갑작스러운 준의 질문에 안색이 확 바뀌며 입을 다물었다.

“형님, 올해 스물 한 살이시죠. 혹시 제가 몇 살인지 아시나요? 저는 고작 열다섯입니다. 제 눈에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꼬마 아이를 상대로 패거리를 동원해 위협을 주고, 일 대 일 대결 운운하는 것도 썩 사내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아니 이건 이미 사내다움을 운운할 차원이 아니죠. 형님은 제가 9살 먹은 꼬마 아이한테, 사내다움을 운운하면서 결투를 벌여 이기면 제가 남자답다고 칭찬이라도 해주실 요량입니까? ”

이준의 재치 있는 말에 이은과 시장 상인들을 비롯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온은 너무 화가나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감정에 치우쳐 준과 싸워봤자, 자신은 얻을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다 6성 투사인 문찬이 있으니 개망신을 당할 것은 자신일 것이 뻔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이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1년 뒤면 너도 성인식을 치르게 되겠지? 하하, 너 같은 녀석은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마을의 구석진 곳에서 밭이나 갈 텐데… 그런 놈과…”

하지만 준은 가온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싱긋 웃을 뿐 이었다.

“이이…”

소년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가온은 본전도 못 건지고, 붉어진 얼굴로 등을 돌렸다.

“아, 맞다!”

발걸음을 멈춘 가온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다는 듯, 머리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준 도련님, 듣자 하니 나씨 가문의 설아 아가씨에게 강제로 파혼을 당했다고 하던데… 허허, 실은 별 큰일도 아니지요. 이준 도련님의 자질은 솔직히 설아 아가씨와는 급이 다르니 말입니다. 하하!”

말을 마친 그는 분이 풀린 듯 크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고, 이은이 화가 나 가온을 따라가려 했지만 준이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그냥 미친 놈이야. 상대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하지만… 하지만 너무 심하잖아요. 그냥 이렇게 보낼 거예요?”

이은은 분함을 못 이기고 얼굴이 시뻘개져,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다.

“기회가 있을 거야…”

준은 낙담한 듯 힘없는 말투로 말했지만, 그 말을 내뱉는 담담하고 싸늘한 표정에 6성 투사인 문찬마저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잘못 보았구나. 이런 아이를 안타깝다고 생각했다니. 이준 도련님은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분은 절대로 그냥 끝날 분이 아니야.’

* * *

“문찬 삼촌,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준은 머리를 돌려 이문찬을 향해 활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서는 이미 방금 전 차가웠던 표정은 사라지고, 15살 아이 특유의 순진무구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이문찬은 준의 그런 태도에 속으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하하, 셋째 도련님도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여기는 원래 우리 이 씨 가문의 구역입니다. 가 씨 가문의 사람들이 맘대로 굴게 둘 수는 없지요.”

사내가 준에게 예를 갖추고 조용히 떠나자, 이준은 그제야 몸을 돌려 인상을 찌푸렸다.

“바보 같은 계집애! 그깟 1급 마정석 한 알에 마음을 뺏겼어? 그 자식이 어떤 놈인 지 아직도 몰라? 그 자식 물건을 받는 즉시 기회다 생각하고 더 달라붙을 거라는 걸 몰라서 그래?”

이은은 준의 말에 샐쭉 토라져서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호주머니까지 들어온 물건인데 안 가지면 낭비잖아요.”

“좋은 물건도 아니더만, 그렇게 욕심이 났어? 너는 이씨 가문의 천재소녀라고…”

소녀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준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져 귀엽게 코를 한 번 찡긋거리고는, 손목에 걸친 팔찌를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준은 이은의 귀여운 행동에 맥이 빠져 더 이상 화조차 내지 못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30여분, 이준은 한 노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에 든 것은 살짝 핏기가 묻어있는 초록색의 마정석이었다.

“드디어 찾았어.”

손을 뻗어 마정석을 잡으려는 순간, 준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소년은 일단 마정석을 집은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마정석 옆에 놓인 검은색 철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철편은 척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물건으로, 이미 녹이 덕지덕지 붙어있을 뿐 아니라, 제대로 관리조차 하지 않은 듯 노란색 흙까지 묻어 있었다.

‘애송이, 저 검은 색 철편을 사 둬. 어서!’

준이 의아한 눈으로 검은색 철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노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왔다.

노인의 목소리는 소년에게 밖에 들리지 않는 것 이었다. 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마정석을 내놓은 사람에게 말을 붙였다.

“이건 어떤 종류의 마정석이에요?”

물건을 내놓은 사람은 괴팍하게 생긴 한 용병이었다.

“헤헤, 도련님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이것은 1레벨 마수의 몸에서 축출한 불여우의 마정석입니다. 1급 마정석 중에서는 아주 훌륭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마정석을 얻기 위해 우리 검아 용병단에서 3일 동안 꼬박 지켜 불여우 다섯 마리를 잡아 겨우 이 한 알을 얻었습니다…”

이준의 평범하지 않은 옷차림을 보고 용병은 장황하게 소개를 했다.

“만약 도련님께서 맘에 드신다면 500골드만 지불하시면 됩니다. 허허, 그 놈의 불여우를 잡으면서 우리 형제들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준은 손가락으로 마정석에 있는 핏자국을 닦아 보았다. 핏자국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