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시장
다음 날 이른 아침, 침대 위에 앉아 수련을 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 위에 따사로운 햇살이 은은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후…”
한참을 앉아있던 소년이 길게 숨을 들이쉬자, 하얀 공기가 코와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 온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잠시 후 소년이 눈을 번쩍 뜨자, 눈동자 위로 하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수련을 끝마치고 기지개를 켜는 그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바로 이 느낌이야! 3년이 지났어… 강해지는 느낌, 다시 돌아온 거야!”
그가 침대에서 몸을 풀고 옷을 갈아입을 때 쯤, 문 밖에서 이은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아직도 안 일어났어요?”
“이 녀석, 빨리도 왔네.”
문 밖에는 단정한 연두색 옷을 입은 귀여운 소녀가 서 있었다. 은은한 풀잎 같은 옷 색이 그녀의 청초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여기요, 오빠가 필요한 거.”
소녀는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쪼르르 달려와 소년에게 검은색 카드를 넘겨주었다. 그 카드는 어제 본 최상위 등급의 카드는 아니었지만, 최대 5천 골드까지 사용이 가능한 고급 카드였다.
준은 막상 여자에게 돈을 받자 민망한 기분이 들어 시덥잖은 농을 던졌다.
“꼬마 아가씨 이렇게 곱게 차려 입고 누굴 만나러 가시나?”
“오라버니도 참. 우리 오라버니랑 3년 만에 같이 나가는 건데, 당연히 예쁘게 하고 나가야죠.”
이은이 자신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 치며 화사하게 미소를 짓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 특유의 풋풋하고, 기분 좋은 생동감이 약동하고 있었다.
* * *
두 사람은 해맑게 웃으며 거리로 나갔다. 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둘은 이씨 가문의 사람들과 종종 마주쳤는데, 가문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 둘의 조합을 이상하게 여기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지나가곤 했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 특히 이씨 가문의 소년들은 ‘폐물’을 대하는 이은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이은은 미모로 보나 재능으로 보나 가문 전체에서 가장 반짝이는 존재로, 결코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그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도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딱히 날이 서 있다거나 차갑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겸손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는 여자였다.
사람들이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런 그녀가 이준만 보면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고, 정작 이준은 그녀를 피한다는 것 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이상한 광경이었는데,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어제 사고를 치고 풀이 죽어 집에 틀어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준이, 평소에는 늘 피하기만 하던 이은과 싱글벙글 웃으며 거리를 활보하니, 모두들 이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시장에 도착하자 무더위로 푹푹 찌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길 위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종종 이상한 종족들도 눈에 띄었다.
준과 함께 시장에 도착하자, 이은은 5 살배기 꼬마아이처럼 신이 나서는 싫다는 이준을 끌고 이곳 저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결국 신이 난 동생을 말리지 못한 준은 이은에게 실컷 끌려 다닌 뒤에야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900골드를 주고 20년 된 보라색 난초 세 송이와 5년산 황혼의 잎새를 손쉽게 손에 넣었다. 사실 두 가지 재료는 그다지 구하기 어렵지 않은 재료로, 가격이 문제였지 돈만 있다면 구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 더 좋은 재료들은 직접 밖으로 나가 찾거나, 더 큰 시장이나 경매장을 가야만 구할 수 있었다.
급격히 줄어드는 돈을 보며, 이준은 씁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역시 세상은 돈이야 돈…’
* * *
마정석은 연금비약을 만들기 위한 초기단계에서 꼭 필요한 에너지 덩어리로, 대량의 자연 에너지가 들어있는 물체였다.
마정석은 사람이 직접 흡수할 수는 없지만, 연금술사가 약을 정제할 때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재료였으며, 특히 뛰어난 연금술사가 정제한 마정석은,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조합법을 통해 어마어마한 가격을 가진 약물로 변했다.
이에 더해 마정석은 어떻게 정제하느냐에 따라 무기에 활용될 수도 있었는데, 좋은 마정석이 끼워진 무기는 파괴력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사용자의 무투기를 올려주는 기능까지 더해져 있어, 모든 투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또 투구나 갑주에 마정석을 끼우면 방어력을 올려주거나 특수한 능력이 부가되기도 했으니, 마정석은 투기대륙 투사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였다.
이렇게 마정석의 가치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전문적으로 마정석을 구하는 용병단도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마정석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마정석을 추출할 수 있는 마수족은 실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매우 영악한 종족으로, 성격 또한 흉악한데다가 자신들만의 특수한 공격방식을 가지고 있어 상대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게다가 모든 마수족이 몸속에 마정석과 같은 에너지 결정체를 가진 것은 아니어서 어떤 경우에는 두 마리만 잡아도 마정석을 얻을 수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10마리를 잡아도 하나도 건질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결국 꽤 실력있는 용병들에게도 마수족 사냥은 목숨을 담보로 한 사냥이나 다름없었다.
* * *
준은 은과 함께 도시 남쪽에 위치해 있는 중간 규모의 시장으로 이동했다. 이런 규모의 시장은 은빛성에 총 서너 개가 있었는데, 이 시장은 모두 도시의 3대 가문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준이 고른 것은 이씨 가문에서 관리하는 시장이었다.
시장에 들어서니 입구에는 이씨 가문의 호위무사 두 명이 서 있었다. 둘은 이은과 이준이 함께 시장에 온 것을 조금 의아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일단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준 역시 호위무사들과 눈이 마주치자 머리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셋째 도련님, 이은 아가씨, 무슨 물건이 필요하시기에 이 곳까지 직접 나오셨습니까?”
두 사람이 시장 안의 인파 속에서 비집고 들어가던 그때, 누군가가 공손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준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이씨 가문의 장정 예닐곱 명이 서 있었다. 말을 꺼낸 이는 가장 앞에선 서른 살 쯤 되는 건장한 사내로, 가슴에는 별이 6개 그려진 표식이 붙어 있었다.
사내는 준이 자신을 잘 모르는 듯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자, 넉살좋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셋째 도련님, 저의 이름은 문찬이고, 시장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호위대장입니다. 허허! 도련님 작년 생일날에 저도 참석을 했었는데요.”
“아하, 문찬 삼촌이었군요.”
준은 눈앞의 이 장정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을에 있는 게 심심해서 구경 좀 하려고요. 삼촌은 일 보세요.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찾을게요.”
삼촌이라는 다정한 호칭에 문찬은 흐뭇한 기분이 됐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친절하게 말했다.
“그럼 도련님 편하게 구경하세요. 시장 곳곳에 부하들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시고요.”
준은 다시 한 번 예의바르게 머리를 끄덕인 뒤, 이은과 함께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이관, 너희 둘은 도련님이 불편하지 않게 거리를 두고 두 분을 호위하도록. 그리고 시장에 있는 왈패들한테 경고해, 누구든 감히 셋째 도련님과 이은 아가씨를 건드리면 앞으로 여기 얼씬도 못할 거라고!”
호위대장 이문찬은 서서히 멀어져 가는 소년과 소녀를 보며 부하들에게 낮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네, 대장님!”
한 장정이 즉시 머리를 숙인 뒤 손짓으로 두 사람을 불러, 그들과 함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셋째 도련님은 여전히 온화하고 친절하군.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
문찬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준을 바라보다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훌륭한 소년이…아쉽군…”
여유롭게 장터를 누비는 준의 뒤를 따라가던 이은은 뒤에 사람이 붙은 것을 눈치 채고, 이준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준 오라버니, 그 문찬이란 분 괜찮은 사람 같아요.”
준의 영혼 탐지 능력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했으니, 은이 말하지 않아도 진작부터 호위가 붙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9단 염력으로, 은닉에 능숙한 호위 셋을 발견하다니…우리 아가씨께서 실력이 아주 제법이구나?”
이은은 귀엽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준은 그런 이은이 귀엽게 느껴져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톡톡 쳤다.
“네가 무슨 신분인지, 무슨 배경이 있는지 모르지만, 너는 영원히 내 동생이야. 알았지? 그러니까 이 오라버니가 평생 널 지켜줄게.”
말을 마친 준은 손으로 이은의 머리를 다시 한 번 가볍게 톡톡 치고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이은은 준의 행동에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동생…?”
소녀는 혼자 입을 삐죽거리며 혼잣말을 하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되찾고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 * *
두 남녀는 점점 시장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시장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진귀한 물건들이 많은 구조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은빛성에서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투사인 경우가 많았다.
둘은 잠시 떨어져 시장 안을 둘러보기로 했고, 이준이 열심히 마정석을 찾고 있는 동안, 이은도 천천히 골목을 다니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준은 혼자서 마정석을 찾아다니다 어느 노점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음…은이에게 잘 어울리겠는데?’
그의 눈에 든 것은 백색에 가까운 밝은 연두색 팔찌로, 얼음 속성의 은재질이 함유되어 있어, 더운 여름에 착용하기 좋아 보였다.
* * *
한편 혼자서 이곳저곳을 구경 하던 이은은, 이내 호기심을 잃고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역시 혼자서는 재미가 없네…오라버니한테 가봐야겠다.’
그녀가 막 준을 찾으러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은 아가씨 아니에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이것도 인연이네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옷차림을 한 젊은이를 중심으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은에게 말을 건 것은 제법 준수한 외모를 가진 20살 정도의 청년이었다. 잘생긴 청년은 그녀를 보자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그러나 이은은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반대로 걸어갔다.
“이은 아가씨!”
청년이 다급하게 달려와 이은의 앞을 막아서자,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은 아가씨…”
이은의 차가운 눈길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볼 일 없으면 길을 비키시죠. 저는 갈 데가 있어서요.”
소녀는 불쾌한 듯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청년은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볼이 빨개져서는 계속해서 추근거렸다.
“아가씨께서 시장에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 저도 마침 한가한데… 같이 다닐까요?”
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면서 이은을 바라봤다.
“가온 도련님, 방금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가야 할 데가 있어요. 길 좀 비켜주실래요?”
계속되는 소녀의 싸늘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계속해서 말을 걸다가, 안쪽 호주머니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팔찌는 하늘색을 띤 금색으로, 상당히 고급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바쁜데 제가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거면 양해를 구할게요. 이건 방금 시장에서 산 나무 속성의 팔찌에요.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위에 1급 나무속성의 마정석이 박혀있어 염력 회복에 아주 좋은 효능이 있죠. 아가씨는 아직 투사가 되지 못했으니, 이 물건이 아가씨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자그마한 성의이니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거절하면 제가 부하들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거든요…”
그는 짐짓 난처한 척 하며 능청을 떨었다. 뒤에 있던 사내들 역시 그를 도와주려는 듯 웃으며 받으라는 눈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