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신비한 노인
이준은 당당하게 응접실을 나온 뒤 쓸쓸하게 뒷산으로 향했다. 절벽 위에 자리 잡고, 구름에 뒤덮인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실력…이 세상은 실력이 없으면 개똥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구나.”
그는 절망과 슬픔에 휩싸여 산꼭대기를 천천히 배회했다. 잠시 후, 절망과 슬픔은 분노로 변했고, 꽉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터져 입속에서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 응접실에서는 침착하고 당당하게 행동했지만, 나설아의 한마디 한마디는 비수가 되어 그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치욕을 받지 않을 것이다.”
준은 아직 피가 남아있는 왼손을 펼치며 결의를 다졌다.
“허허! 녀석, 보아하니 나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 때, 어디선가 기묘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이준은 몸을 빠르게 돌려 날카로운 눈으로 뒤쪽을 살폈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헤헷, 찾지마, 나는 네 손가락 위에 있어.”
소년이 헛것을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던 찰나, 그 독특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준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살폈다.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은, 그의 오른손 위에 있던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녀석, 담이 꽤 큰데? 놀래서 뒤로 넘어갈 줄 알았더만…”
반지 속에서 또 다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 누구야? 왜 내 반지 안에 있어? 당신 무슨 속셈이야?”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이준은,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내가 누군지는 아직 알 거 없고, 아무튼 널 해치지는 않아.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너, 영혼의 강도가 아주 제법이더구나! 하하! 어쨌거나 지난 3년간 고마웠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겠지.”
“3년간 고마웠다고?”
순간 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3년? 고마웠다고?
“혹시 내 몸에서 사라진 염력… 당신 짓이었어?”
“아하!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원망하진 말아.”
“이런 젠장! 이 빌어먹을 놈이!”
몰락의 원인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곳에 있었다. 늘 침착하고 냉정했던 이준마저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반지를 절벽 아래로 던져버렸다.
“아차!”
반지가 손을 떠나는 순간, 이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찌됐든 하나뿐인 어머니의 유품 아닌가! 당황한 그가 황급히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이미 손을 떠난 반지는 그대로 산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반지를 바라보며, 이준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바보! 너무 성급했어. 너무 성급했어!”
소년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머리를 흔들며 일어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린 그 순간, 이준은 또 다시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그만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검정색 반지가 공중에 떠 있었다! 심지어 반지 위에는 웬 노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 아닌가!
“녀석, 그렇게까지 화를 내다니…고작 3년이다. 고작 3년동안 염력 좀 빨아먹었을 뿐인데…쯧쯧, 속 좁은 놈 같으니라구.”
백발의 노인은 실실 웃으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내 반지에 숨어 있었다고? 그럼 당신이 내 염력을 빨아들이는 동안, 나한테 무슨일이 생겼는지도 잘 알겠군?”
“하지만 3년 동안 너도 많이 성장하지 않았더냐? 3년 전의 너라면, 과연 지금과 같은 인내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을까?”
노인은 느물느물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여유롭게 수염을 비비 꼬아댔다.
준은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미칠 듯이 분노해 길길이 날뛰었지만, 염력이 사라진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그의 염력도, 재능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이제 폐물이라는 낙인을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준은 다시 태어난 듯 마음이 가뿐해졌다. 기분이 좋아져서인지는 몰라도, 눈앞에 있는 노인네도 다시 보니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게 있어. 앞으로도 반지에 들러붙어 내 염력을 빨아갈 셈이야? 그렇다면 이제 다른 주인을 찾도록 해. 난 더 이상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
“다른 사람은 너처럼, 강한 영혼 탐지력이 없지.”
노인은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긴 수염을 만지며,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제 너의 허락이 없으면 당연히 너의 염력을 빨아 가지는 않을 것이야. 걱정하지 말거라.”
그러나 노인이 뭐라고 말을 하든, 준은 그를 믿을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흥, 웃기는 노인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절대 당신을 옆에 두지 않을거야.’
하지만 노인의 말을 듣자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강해지고 싶냐?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고 싶으냐? 그렇지? 그렇겠지. 3년 동안 그렇게 무시를 당했으니.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나라면 너를 예전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아니 네 놈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경지로 끌어올려 줄 수도 있지.”
‘안돼, 안돼. 넘어가지 말자. 방금 전에 다짐했잖아.’
“네 재능이면 충분해!”
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노인을 노려봤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3년간 숨어 염력을 빨아먹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염력 이상으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설령 이 자의 도움을 받아 강해진다 해도 분명히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너의 재능은 아주 훌륭하지. 하지만 지금 네놈의 염력은 3단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라. 분명히 내년에 성인식을 치를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네가 1년 동안 열심히 수련한다고, 순식간에 7단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어떤 소녀랑 3년 뒤에 내기를 걸었지 아마? 하지만 그 꼬맹이의 재능도 너보다 약하지는 않더구나. 네가 그 소녀를 넘어서는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으냐?”
노인은 쭈글쭈글한 얼굴로 능구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내 염력을 빨아가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수모도 당하지 않았어! 이런 빌어먹을 기생충 같은 영감탱이가…”
노인의 말에 정곡을 찔린 이준은 다시 분노가 치밀었는지, 마구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준은 또 다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화를 낸다고 날아간 염력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1년 내에 염력을 다시 7단까지 쌓는 것도 도저히 무리였다. 염력을 단련하는 일은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 과거에 4살부터 꼬박 6년에 걸쳐 9단을 만들었으니, 재능을 되찾았다고 해도 어떻게 1년 사이에 7단까지 올라갈 수 있겠는가.
“하아…”
뻔히 알면서도 방도가 없었다. 준은 한숨을 내쉬며 노인을 흘겨봤다.
“그럼… 방법이 있는 거야?”
“아마도…?”
노인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며 비실비실 웃기 시작했다.
“당신이 다시 1년 안에 내 염력을 7단으로 만들어 준다면, 지난 3년 염력을 가져간 일은 없던 걸로 하지. 어때?”
“헤헷,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머리가 꽤나 잘 돌아가는 놈 이었구만.”
“네가 나한테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면, 나도 쓸모없는 보따리를 지고 다닐 이유가 없지 않겠어?”
준 역시 이미 머리에 계산이 섰다. 이 노친네는 아무에게나 달라붙어 염력을 가져가지는 못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얻어낼 것은 얻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요놈보게…열 다섯 밖에 안 된 놈이, 속에는 벌써 능구렁이가 들어 앉았구나. 보아하니 지난 3년 간 정말 많이 성장했군. 이게 다 내 덕분인가?”
노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나더러 당신을 계속 받아달라고 할 거면, 당신도 성의를 보여야지 않겠어?”
“똑똑한 녀석이군. 그래, 좋다. 아직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노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더니,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너 연금술사가 되고 싶으냐?”
“연금술사?”
준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가, 이내 헛소리라도 들은 듯 이마를 찌푸렸다.
“투기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금술사가 되고 싶지. 하지만 연금술사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잖아? 그 엄격한 조건들…”
그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홱 돌렸다.
“내가 자격이 된단 말이야?”
노인은 소년의 흥분한 표정을 보고는 낄낄 거리며 수염을 연신 내리 쓸다가,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았다.
“뭐…간당간당하긴 하다만…내가 너에게 빚을 진게 있으니…”
이준은 노인의 수상쩍은 태도를 보고 실눈을 뜨며 되물었다.
“내가 만약 조건이 된다고 해도, 연금술사는 일대일로 스승이 직접 가르쳐야 하는데…… 당신… 설마 연금술사?”
노인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슬쩍 내밀며 거만하게 웃었다.
“그럼.”
눈을 깜박이며 노인을 바라보던 이준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실례지만 몇 레벨의 연금술사이신지요?”
노인이 정말로 연금술사라면, 이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소년은 전에 볼 수 없던 공손한 태도로 노인을 대하기 시작했다.
투기대륙에 연금술사는 매우 드물지만, 귀한 신분이니만큼 명확한 등급제도가 있었다. 연금술사는 하에서 상까지 1레벨부터 9레벨까지 나뉘며, 단왕 고하는 6레벨 연금술사임에도 가한제국에서 약을 정제하는 능력으로는 감히 어깨를 견줄자가 없었다. 노인이 고하만큼은 아니더라도, 3~4레벨의 연금술사라면, 이는 자신의 인생에 다시 없을 행운이었다.
“몇 레벨? 허허, 기억도 안 나는군… 그래서 배울거냐, 말 거냐?”
노인은 소년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배워야죠.”
이준은 노인이 행여나 말을 무를까봐,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사부님으로 모시고 예의를 갖춰봐.”
노인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예의 그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사부님으로 모시라고…?”
“당연하지! 사부님으로 모시지도 않을 거면서, 나더러 비법을 전수하라고? 어딜 날로 먹으려고!”
보아하니 이 노인네는 이런 사제관계나 예의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듯 했다. 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린 뒤 연금술사가 되기 위해 노인에게 절을 올렸다. 노인은 준이 넙죽 절을 올리자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끄덕였다.
“나의 이름은 약로다. 내 이력에 대해서는 아직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라. 그 단왕이라고 불리는 작자는 나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약로라고 소개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니, 허언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그가 애송이라고 비웃은 것은 다른 이도 아닌 천하의 단왕이었다. 쉽게 믿기에는 상대가 너무 대단했다.
‘이 노인네는 대체 정체가 뭐지? 가한제국을 뒤흔든 단왕 고하가 애송이라고? 이 말이 밖에 알려지면…미친놈이라고 놀려대겠지? 하지만 아무렴 어때, 어쨌든 나에게 연금술사의 비술을 알려줄 사람인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자신이 어디가서 연금술사를 만나겠는가? 준은 고개를 들며 배시시 웃었다.
“근데 스승님께선 어떤 방법으로 1년 안에 제 염력을 7단까지 올려주실 계획이십니까?”
“지난 3년간 너의 염력은 지속적으로 저하되었지. 바로 그것이 너의 뿌리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염력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초다. 내 장담하지. 너는 3년간 염력을 빼앗긴 시간을 감사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약로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소년은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실력이 떨어진다는 게 도움이 되다니,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