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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5화 (5/818)

제5화. 증서

“너…”

할 말을 잃은 나씨 가문의 아가씨는 반박조차 하지 못 한 채, 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약혼을 파기할거야? 혹시 보상이 적다고 생각해? 좋아, 그럼 내가 장로님한테 말해서 용의 정수를 세 알 더 주라고 할게. 그리고 네가 원하면 운남종에 들어와 높은 단계의 수련법을 연습할 수 있게 해주지. 그러면 되겠어?”

소녀의 말투는 표독스럽고, 그 내용은 모욕적 이었지만, 그녀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한 것 이었다.

이 드넓은 제국 어디에 저런 제안을 거절할 바보가 있단 말인가!

용의 정수 세 알에 운남종이라니……이는 모든 투사들의 꿈이었다. 이번에는 세 장로뿐 아니라 응접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좌중의 반응을 보고 자신감을 얻은 나설아는 턱을 높이 쳐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준을 내려다보았다.

* * *

“흠…”

그러나 나설아의 기대와는 달리, 준은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다, 차가운 미소를 지을 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염력 회오리가 사라진 이후 3년 동안 끊임없이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그렇다고 자존심이라는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설아의 오만하고 무례한 언행은, 오히려 그의 투지에 불을 붙일 뿐 이었다.

“안되겠는데.”

짧고도 단호한 한마디에 나설아는 사색이 되었고, 그 순간 옆에 있던 젊은 청년이 장검을 빼들었다. 사내가 검을 빼들자 준 역시 주먹을 쥐었다.

“준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이씨 가문은 운남종의 분노를 사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한은 준의 행동에 당황해 다급하게 아들을 말렸다.

준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두 남녀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3년 동안 온갖 멸시와 비웃음을 당했던 그의 인내력은, 이미 또래 아이들의 치기 어린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싸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 때, 도담은 순식간에 감정을 자제하는 준의 태도를 보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이 녀석이 앞으로도 지금 같은 폐물이기를 빌어야겠군. 이런 놈들이 큰 힘을 얻게 되면, 아주 골치가 아프지.’

노인은 마음속으로 무겁게 되뇌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그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풍부한 경험속에서도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애송이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준, 네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약혼은 깨도록 하자. 어차피 너도 이 혼사를 꼭 원하는 것은 아니었잖아.”

그녀는 왠지 모르게 이준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워 시선을 피하며 타이르듯 말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운남종의 종주가 친히 부탁을 한 일이라는걸 다시 한번 기억했으면 해. 이 상황을 협박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그리고, 어떤 것이라고 콕 집어 말하지는 않겠지만, 너와 내 위치도 좀 생각을 해줘.”

그러나 소녀의 말에 준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질 뿐 이었다. 차라리 버럭 화를 냈으면 좋겠건만, 아무렇지 않은 듯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의 태도에, 나설아는 자꾸만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듯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투기대륙에서 여자가 파혼을 요구하는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텐데? 나는 괜찮지만, 우리 아버지는 촌장이야. 아버지가 그 요구를 들어주면 앞으로 어떻게 가문을 관리하지? 우리 아버지가 은빛성에서 얼굴이나 들고 다닐 수 있을까?”

사실 나설아도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당당한 준의 태도에 살짝 주눅이 들었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그의 말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마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오늘 일은 내가 경솔했어. 거기까지는 차마 생각해보지 않았던게 사실이야. 오늘은 일단 파혼요구를 접고 돌아갈게. 다만…약속 하나를 해줘.”

“무슨 약속?”

준이 낮은 목소리로 되묻자,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오늘 요구를 3년 뒤로 연장할게. 3년 뒤에 네가 운남종에 와서 나에게 도전을 해. 만약 네가 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약혼을 파기할거야. 그 때면 너도 성인식을 치르고 성인이 될 것이니, 만약 진다고 해도 아저씨가 난감하지 않을 거잖아. 어때?”

소녀의 요구에 준은 나설아라는 여자가 얼마나 독종인지를 실감했다.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말 독사같은 계집애군. 그때 가서 지면 아버지의 명예는 실추되지 않겠지만, 나는 한평생 계집에게 매달리다 파혼을 당한 치욕을 지고 살아야겠지!’

그 때, 이한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준이의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준이가 무슨 능력으로 너한테 도전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까지 파혼을 하고 싶은게냐?”

“아저씨, 제 뜻은 확고해요. 이 요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전 지금 당장 파혼을 하겠습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나설아도 화가 났다. 사실 그녀가 더욱 화가 난 것은, 자신이 보잘 것 없는 놈에게 망신을 당한 것도 모자라, 속으로 그에게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그녀도, 더 이상 양보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자, 선택해! 3년 뒤, 아니면 지금, 어떤게 낫겠어?”

그녀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준은 실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큭큭…이제 별게 다 날 무시하는군. 나설아, 너 나를 얕잡아보고 있는 모양인데…3년 전에 했던걸 내가 다시 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보지?”

소년의 표정은 얼음처럼 싸늘했지만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고, 말투는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응접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이준의 태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3년 동안 마을 사람들의 온갖 조롱과 무시를 당하면서도 묵묵히 참기만 하던 이준에게, 이렇게 살벌한 면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그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하고도 묵직한 분위기는, 도저히 아직 투사도 되지 못 한 애송이가 풍길 수 있는 그것이 아니었다.

나설아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얼굴이 붉어졌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지금 어떤 상황이건 그가 12 살에 이미 투사가 된 것은 사실이었으며, 당시에는 자신도 8단밖에 되지 않았다. 재능만이라면 이 사내가 자신보다 위일지도 몰랐다.

“설아 아씨, 원승 어르신의 체면을 봐서 충고 한 마디 하지. 이건 12살 때 투사가 되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다가, 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이 하는 충고니까 가볍게 듣지 않는게 좋을거야. 지금 네가 남들보다 조금 낫다고 함부로 굴지 않는게 좋아. 추락하는건 한 순간이니까. 그리고…입장이 바뀌면 지금 네가 하는 행동들이 다 그대로 돌아갈거야.”

준의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나설아는 화가 나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응접실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온 몸에 식은 땀이 흘렀다.

“좋아! 그래, 그 말대로 하자고.”

그녀는 소년의 살벌한 태도에 기가 질렸지만, 이를 앙다물고 이준을 노려봤다.

“네가 예전에는 재능이 뛰어났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너는 쓸모없는 폐물이야! 좋아! 3년 뒤에 보자구! 그 때까지는 파혼 얘기는 입밖에 꺼내지 않겠어! 네가 다시 기적을 만드는 그 날을 보여줘 봐! 만약 그때 네가 나를 이기면 평생 노예가 되어 너를 섬기도록 하지! 하지만 3년 뒤에도 여전히 폐물이라면, 두말하지 말고 파혼하는거야!”

그녀의 말에 이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또 다시 차갑게 비웃으며, 그녀를 바라볼 뿐 이었다.

‘뭐야 이자식, 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나설아가 짜증섞인 표정으로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는 동안, 이준은 몸을 돌려 뚜벅뚜벅 책상으로 걸어갔다.

“착각도 심하군. 3년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 너 같은 계집한테는 조금도 관심 없으니까.”

소년은 갑자기 책상에 앉아 붓을 들더니 무언가를 휘갈겨 쓰고, 즉시 책상에 있는 비수를 집어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새빨간 선혈이 쏟아지자 준은 거침없이 새하얀 종이 위에 피로 물든 손바닥으로 도장을 찍더니, 그대로 나설아에게 걸어가 혈서를 손에 쥐어주었다.

“웃기지도 않은 착각을 하고 있군. 너 같은건 노예로도 쓸 일 없어. 이 혈서는 약혼을 파기한다는 의미로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이준이 너를 이씨 가문에서 내쫓겠다는 이혼증서다. 오늘부터 너는 우리 가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야.”

“뭐라고?”

이준의 파격적인 행동에 모든 사람들은 그저 입을 떡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볼 뿐 이었고, 설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재능, 배경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작은 가문의 폐물에게 개망신을 당할 것 이라고는 꿈에도 상상 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온 것 이었다.

준은 그녀의 손에 종이를 쥐어주자마자, 그녀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몸을 돌려 마을의 촌장인 이한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아버지, 3년만 기다려주십시오. 3년 뒤에 제가 반드시 이 치욕을 갚아드리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아들을 보며, 촌장은 준의 생각이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알아차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남들이 뭐라 해도 이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 이번 파혼을 후회할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거라.”

“네! 아버지, 이 이준, 명예를 걸고, 3년 뒤 반드시 운남종에 가서 오늘의 치욕을 깨끗이 씻어 내겠습니다!”

준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고는 벌떡 일어나 망설임 없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는 문 밖의 설아 옆을 지날 때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오늘 네가 한 약속을 후회하게 해주마. 3년 뒤에 보자.”

그녀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서서는, 당당하게 사라지는 준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손발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그가 손에 쥐어 준 증서가 천근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세 분. 원하는 목적을 이뤘으니 돌아가셔도 될 것 같군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던 이한의 얼굴은 목석처럼 차갑게 굳어있었다.

“아저씨, 오늘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 말씀 드립니다. 추후 기회가 되면 방문해 주세요.”

나설아는 이한의 차가운 태도에 황급히 인사를 올린 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고, 도담과 젊은 청년도 그녀를 따라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의 정수는 가져가시죠!”

이한이 책상 위에 있던 옥함을 집어 들어 가볍게 던지자, 도담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설아 아가씨, 오늘 아가씨의 행동에 대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운남종을 등에 업었다고 오만한 행동은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투기대륙은 넓으니, 진율희보다 강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설아 일행이 문을 나서려는 그때, 한 소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아는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머리를 돌려 구석에 앉아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소녀를 보았다. 그러자 이은은 책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호수 같이 맑은 눈동자에서 갑자기 가느다란 금색 불꽃이 타올랐다.

소녀의 눈에 보이는 희미한 금색 불꽃을 발견하자, 도담은 순간 몸을 움찔거리더니, 놀란 표정으로 두 젊은이의 손을 잡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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