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연금술사
그녀는 빨리 이 불편한 대화를 끝마치고 돌아가고 싶었는지, 자꾸만 노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치를 주었다.
“허허, 촌장님. 제가 오늘 부탁할 일은…그…종주님이 직접 부탁하신 일로…”
종주라는 말이 나오자 촌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운남종의 종주인 진율희는 가한제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 중 하나로, 그녀의 부탁이라면 자신 같은 작은 가문의 촌장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일이니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이상하군, 운남종의 종주가 이런 작은 가문에 무슨 도움을 요청한다는 거지? 그리고 운남종에서 나한테 부탁이 있는데, 설아가 왜 함께 온거지…?’
순간 이한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리고 자신의 불길한 직감이 무엇이었는지 거의 확실해진 순간, 그의 입꼬리는 자기도 모르게 경련을 일으켰다.
“도담 장로님, 설마…”
“어…”
도담 장로는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은 종주의 명을 받들어 온 것이다. 결국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더듬더듬 용건을 말했다.
“촌장님, 촌장님께서도 운남종의 가풍이 매우 엄격한 것은 잘 아시지요? 지금 운남종에서는 설아를 다음 종주로 키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운남종의 가풍상…종주의 후계자는 정식으로 종주가 되기 전에는, 외간 남자와 그 어떤 이유로도 연을 맺어서는 안됩니다…흐음, 그런데 얼마전 종주께서 이 아이가 이씨 가문과 혼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이 혼약을 무효로 해달라고…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퍽!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한의 손에 있던 찻잔이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싸늘해졌지만, 위에 있던 장로 셋은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띠고 촌장을 바라봤다.
‘큭큭, 막무가내로 파혼이라니…네 놈이 앞으로 무슨 낯짝으로 가문을 관리하겠느냐.’
생각보다 격렬한 이한의 반응에 나설아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뿐 이었다.
“촌장님, 저도 이 요구가 억지스러운 것을 잘 압니다만…종주나리의 체면을 봐서라도 청을 들어 주실 수 없는지요?”
도담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표정으로 보아 그도 이런 불편하고 무례한 부탁을 전달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종주의 명으로 직접 이 자리에 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한은 아무 말 없이 인상을 찌푸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몸에서는 청색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얼굴 쪽에서 보일 듯 말듯하게 사자머리 같은 모양이 떠올랐다.
촌장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피어오르자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굳은 표정으로 설아의 앞을 막아선 뒤 손을 모았다.
순식간에 그의 몸에서도 청색 염력이 피어오르며, 두 손 사이에서 가느다랗고 예리한 검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한의 표정은 점점 심하게 일그러졌고, 그의 눈에서는 이미 감출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 때 두 투사가 뿜어내는 살벌한 기운에 자리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린 상태였다.
바로 그 때, 장로 셋이 벽력같은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한, 그만하지 못하겠는냐! 네가 이씨 가문의 촌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장로들의 호통에 이한은 정신이 든 듯, 살기등등한 눈으로 장로들과 도담을 한 번씩 쳐다본 후 염력을 거두어 들였다. 잠시 후,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의자에 주저 앉았다.
“설아야, 대단하구나. 나씨 가문에서 너 같은 인재가 나오다니, 어르신께서 참으로 뿌듯하겠구나! 종주께서 이리도 너를 아끼시다니, 너의 재능이 대단하긴 한가보구나”
“아저씨…”
“허허… 그냥 이 촌장이라고 부르거라. 아저씨란 호칭은 부담스러우니. 너는 앞으로 운남종의 종주가 될 사람이고, 투기대륙을 주름 잡는 인물이 될 터인데, 우리 준이가 너와의 혼약을 지킬 수 있을 만한 존재가 못 되어, 안타깝구나.”
이한의 말은 다정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말투는 냉담하기 그지 없었다.
“이 촌장님의 양해에 감사드립니다.”
옆에 있던 도담은 그제서야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 촌장님, 오늘 이 요구가 다소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라는 것은 저희 운남종에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종주님께서 특별히 사죄의 의미로, 저에게 선물을 하나 딸려 보냈으니 받아주시지요.”
도담은 미소를 띠며 손을 뻗어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초록색 옥으로 된 함이 그의 손 위에 나타났다.
이윽고 도담 장로가 조심스럽게 함을 열자, 독특한 향이 응접실에 퍼졌다. 장로들은 향기에 이끌려 호기심 어린 얼굴로 함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용의 정수?”
노인이 내민 함에는 드래곤의 눈알만한 크기의 녹색 환약이 한 알 들어있었다.
* * *
투기대륙에서 진정한 투사가 되려면 몸속에 반드시 염력 회오리를 완성해야했지만, 이 회오리를 모으는 과정이 쉽지 않을뿐더러 실패율도 상당히 높았다.
뿐만 아니라 일단 한 번 실패하면 9단의 염력은 다시 8단으로 내려가게 되고, 운이 나쁜 사람은 10번 이상 염력이 내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용의 정수는 염력 9단의 수련자가 실패할 확률 없이 염력 회오리를 완성할 수 있게 해주는 영약으로, 하루 빨리 투사가 되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이 갈망하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 용의 정수를 정제하는 것이 바로 ‘연금술사’였는데, 그들은 투기대륙에서 투사를 능가하는 대우를 받았다.
연금술사들의 주요한 능력은 능력을 향상시키거나 독특한 능력을 발휘하는 도구와 연금비약, 물약 등을 정제하는 것으로, 실력이 뛰어난 연금술사는 다양한 세력에 의해 엄청난 명예와 부를 누렸다.
특히 연금술사는 매우 드물어 투사와는 그 수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에 더욱 귀했고, 이렇게 수가 적은 이유는 연금술사가 되기 위한 조건이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투기대륙의 인체가 가지는 특성이나 투사로서의 자질 등은 모두 그들의 영혼에 의해 결정된다.
보통 한 영혼은 한가지 속성만 가지고 있으며 다른 속성이 섞일 수 없었고, 한 몸에 두 가지의 다른 속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연금술사가 되려면 본인의 속성은 반드시 불의 속성이어야 했으며, 이에 더해 반드시 약간의 나무의 기운이 있어야만 약을 정제할 때 촉매작용을 할 수 있었다.
즉, 수 백 만 명 중 하나 꼴로 태어나는 다중 속성의 영혼을 가진 자만이 연금술사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중속성의 영혼을 가진 자가 모두 연금술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연금술사는 이와 함께 반드시 뛰어난 ‘영혼탐지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무언가를 정제할 수 있었다.
영혼 탐지능력은, 물약을 정제할 때 불의 강약을 조절하기 위한 능력이었다.
물약이나 연금비약을 정제할 때는 불이 조금 세면 연금비약들이 모두 타서 재가 되며, 이렇게 되면 그 동안의 노력들이 한 순간에 실패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연금술사들은 반드시 섬세한 불 조절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했고, 이 불 조절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영혼 탐지능력이었다.
* * *
소년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 용의 정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촌장 옆에 앉아있던 이안 역시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옥으로 된 함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이것은 운남종의 명예장로인 고하님께서 친히 정제한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역시 그 분의 명성은 알고 계시지요?”
노인은 사람들의 반응에 조금 여유를 찾았는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연금비약이 단왕-고하님의 손에서 나온 물건이라고요?”
도담의 설명에 세 장로의 눈빛은 감출 수 없는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고하는 가한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 중 하나로, 약을 정제하는 기술이 독특하고 뛰어나기로 유명해 붙은 별명이 바로 ‘단왕’이었다. 더욱이 고하는 물약을 정제하는 기술 뿐 아니라, 투사로써의 자질도 대단해 이미 투왕단계에 진입하여 제국의 10대 강자 중 한명이었으니, 제국내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고하가 만들어 낸 용의 정수라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세 장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욕심이 가득한 눈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세 장로가 어떻게 하면 저 보물을 손에 넣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분노로 떨리는 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담 어르신! 그 용의 정수를 다시 가져가십시오, 오늘 일은 저희가 아마 허락을 못해 드릴 것 같습니다!”
“준! 여긴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당장 그 입을 다물거라!”
탐욕으로 번들거리던 첫째 장로의 눈빛이 분노로 물들며 이준을 향했다.
“준, 물러서라. 이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다.”
다른 장로가 짐짓 점잖은 말투로 준을 타일렀다.
“장로님들, 만약 저들이 오늘 약혼을 파기한 상대가 당신의 아들이나 손자라고 해도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장로들을 차갑게 비웃었다.
“네 이놈…! 어디서 감히 윗사람의 결정에! 언제부터 이씨 문중의 질서가 이리도 엉망이 됐단 말이냐!”
소년의 당돌한 언행에 장로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성격이 급한 셋째 장로는 눈을 부릅뜨며 염력을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장로님들, 준 오라버니의 말이 틀린 것은 없지 않나요? 이 혼사의 당사자는 준 오라버니인데, 어째서 장로님들이 결정을 한다는거죠?”
이은의 맑은 목소리가 응접실 안에 울리자, 세 장로는 눈빛을 주고 받더니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쾌한 기색을 표하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는 장로들을 보고, 준은 고개를 돌려 은을 바라보았다. 세 장로가 아직 볼에 홍조도 가시지 않은 계집아이의 말을 듣다니…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은이의 정체가 뭐지?’
준은 장로들이 이은의 말에 반박하지 못 하고 입을 다문 이유가 궁금했지만, 일단은 나설아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촌장을 바라보고 예를 갖춘 뒤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설아 아씨, 오늘 약혼을 파기하는 것을… 나씨 문중의 큰 어르신께서 허락하셨나요?”
그는 숨을 고르고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나설아는 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응접실안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하자, 그녀는 침묵을 지키다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할아버지께선 허락하신 적이 없지만, 이 일은 제 일이기 때문에 그 분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어르신께서 허락한 일이 아니라면 저희 아버지께서도 이 요구를 허락하지 않을 것 입니다. 본래 이 약혼은 두 가문의 할아버지들이 친히 맺은 것이고, 그 분들이 직접 나서서 파기하지 않는 한, 이 혼사는 누구도 감히 깨지 못합니다. 이는 돌아가신 어르신에 대한 모욕이며, 집안의 큰 어른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준은 단호한 말투로 그녀를 나무라며 싸늘한 시선으로 세 장로를 노려보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세 장로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볼 뿐 이었다. 이씨 문중의 가풍은 상당히 엄격하여, 큰 어르신을 모욕한 자는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이는 제국의 명문가 중 하나인 나씨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준에게 윗사람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가문의 규칙이라고 말한 것은 장로들이었으니, 돌아가신 큰 어르신의 말을 자신들이 거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