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운남종
“아버지, 장로님들!”
준은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상석에 자리한 네 사람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허허, 준아, 왔구나. 어이 앉거라.”
자신의 아들이 도착하자, 이한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손을 흔들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옆에 앉은 세 장로는 촌장의 그런 태도를 보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준은 장로들의 그런 태도를 애써 못본척 고개를 돌려 응접실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응접실 안에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없는 듯 했다.
‘너무 하는군……다른 날이야 그렇다쳐도, 손님까지 와 있는데 이런식이라니.빌어먹을 노인네들!’
소년은 가문에서 자신의 지위가 얼마나 형편없어졌는지를 실감했다. 그리고 가문내의 젊은이들 중에는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는 자신을 보며 대놓고 비웃는 자들까지 있었다.
“둘째 장로……당신!”
아무리 그래도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촌장의 얼굴은 모욕감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아, 정말 미안하네. 내가 요즘 일이 바빠 셋째 도련님을 잊고 있었네. 허허. 얼른 사람을 시켜 준비시키겠네.”
이한의 표정을 본 둘째 장로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귀한 손님앞에서도 자신이 촌장의 아들뿐만 아니라, 촌장마저 비웃고 무시한다는 것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듯, 뻔뻔한 표정으로 이한을 조롱했다.
“준 오라버니! 여기 앉아요!”
바로 그 때, 응접실 안에 맑고 카랑카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소녀에게로 쏟아지자, 세 장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분노한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지만 누구 하나 입을 떼지 못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응접실 구석진 곳에서 책을 덮으며 해맑은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아, 네가 나를 구해주는구나.”
소녀는 준이 자리에 앉자 다시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생긋 웃는 이은의 얼굴에 귀여운 보조개가 생겼다.
그녀는 잠시 동안 준을 옆에 두고 조용히 책을 읽다가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 나랑 이렇게 옆에 앉는게 3년 만이죠?”
소녀의 뾰로통한 말투에 준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4살부터 6살 때까지 매일 저녁... 어떤 사람이 내 방에 몰래 들어와 염력을 내 몸 속에 보내, 뼈와 혈관을 따뜻하게 해줬었죠. 대체 그게 누굴까요?”
그녀는 한참이나 묵묵히 책장을 넘기다가 갑자기 얼굴을 돌려 이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주위의 소년들은 그 광경을 보고 모두 기가 차다는 듯 질투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그 때는 너무 어려서 같이 땅에서 뒹굴고 놀 때였을텐데…나도 모르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며 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너무나 맑아서, 준은 소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걸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소년은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히힛!”
고개를 돌리는 준을 보고 이은은 다시 한번 귀여운 웃음을 짓고는 다시 책장을 넘기며 작은 목소리로 준에게 들리게끔 혼잣말을 했다.
“좋은 의도로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말이야……그렇게 여자애 몸을 막 만져도 되는거야? 그 사람이 누군지 찾기만 해봐. 흥!”
* * *
촌장과 세 장로는 계속해서 흰 망토를 걸친 노인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주로 시덥지 않은 것이었는데, 노인은 무언가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는 듯 자꾸만 말을 돌리는 눈치였고, 그럴 때마다 옆에 앉은 소녀는 참지 못 하고 노인을 한 번씩 흘겨보곤 했다.
“준 오라버니, 저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요?”
이은이 얼굴도 들지 않고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또 다시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너는 알아?”
준은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저 사람들 옷소매에 새겨진 구름 모양의 은검... 봤어요?”
은이 책장을 넘기며 말하자, 이준은 깜짝 놀라 세 사람의 옷소매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그들의 옷소매에는 구름 모양의 은검이 새겨져 있었다.
“저 사람들……설마 운남종 사람들이야?”
아직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은 없었지만, 이준 역시 책에서 이 문파에 대한 자료를 본적이 있었다. 준이 살고 있는 도시는 가한제국의 은빛성이라는 곳으로, 천둥 산맥의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대도시 축에 끼기는 했지만, 대도시 중에서는 매우 작은 편에 속했다.
반면 운남종은 가한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조직 중 하나이다 보니, 본디 이런 작은 마을의 가문과는 마주칠 일조차 없는 것 이었다.
“그들이 우리 가문에 무슨 볼 일이 있다는 거야?”
이준이 이상하다는 듯 묻자, 소녀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오빠랑 연관이 있을 거예요…”
“나랑? 근데 나는 저 사람들 만난 적도, 엮인 적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일 이었다. 준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은을 빤히 바라봤다.
“저 소녀... 누군지 알아요?”
은이 책장을 덮고 담담한 얼굴로, 맞은 편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군데?”
“나설아.”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옥 귀걸이를 한 소녀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준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설아? 가한제국의 사자라고 불리는 나원승의 손녀, 나설아? 그… 나랑 태어날 때부터 결혼을 하기로 어른들이 정해줬다는…?”
소녀가 누군지 알게 된 준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할아버지와 나원승 대장군은 생사를 함께 한 오래 된 벗으로, 오라버니와 나설아가 태어나자 가문의 큰 어르신들께서는 둘이 성년이 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했었죠. 그런데 아쉽게도 오라버니가 태어난지 3년 뒤, 할아버지는 적과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돌아가셨고…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씨 가문과 나씨 가문의 관계는 점점 예전 같지 않아지고, 왕래도 뜸해졌구요…”
이은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준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그를 바라보며,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가, 웃음을 참으려 말을 이어갔다.
“나원승은 사납고 고집이 센 사람이래요. 별명 그대로 사자같은 사람이라나요? 게다가 약속을 중요시하고 엄청나게 고지식하다더군요. 그래서 몇 년간 오라버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걸 알면서도, 혼약을 깰 생각이 전혀 없었다나봐요.”
“어휴…어지간한 늙은이인가 보구나.”
준은 이은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원승은 가문에서 절대적인 발언권이 있기 때문에, 그가 한 말에는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못해요. 어쨌든 저 나설아라는 여자는 아주 재능있는 투사로, 5년 전에 운남종의 종주인 진율희가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지금 운남종의 종주께서 이 혼사를 아주 못마땅해 하고 있다는 소문이에요.”
“그럼 너의 말뜻은, 지금 혼약을 깨러 왔다는 거야?”
준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이는 혼사가 깨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맞은 편의 소녀가 정혼자라면 사내로써 나쁜 일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그녀는 눈에 띄게 아름다웠고, 명문가의 자제인데다가, 재능 있는 투사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둘째치고,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다.
혼약이라는 것도 어른들끼리 정한 것이지 자신은 아직까지 상대의 얼굴도 모르지 않았는가. 그리고 눈에 띄는 미인이라고 해봤자, 평생 못 볼 정도의 미녀라든지, 첫 눈에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다. 혼사가 깨진다고 해서, 화가 날 일도, 슬플 일도 아니었다.
단,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아무리 그들에 비해 작은 가문이라고는 하나, 한 마을의 수장인 아버지에게 파혼을 요청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는 아버지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례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준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고, 불끈 쥔 그의 주먹은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변한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지금 투사가 되었더라면... 아무도 나를 무시할 수 없었을텐데.’
준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자신이 지금 투사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제 아무리 나설아가 운남종을 등에 업고 있다 해도, 이런식으로 행동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가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날려는 찰나, 비단처럼 부드러운 손 하나가 준의 주먹을 붙잡았다.
“준 오라버니. 화내지 말아요. 파혼을 하면 손해를 보는건 그녀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치고 후회할걸요!”
“후회?”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며 이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녀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맑은 눈으로 준을 바라보자, 그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근데 은아, 너는 저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것 같구나. 방금 말한 내용 중에는, 우리 아버지도 모르는 일들이 많은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하지만 준의 질문에 이은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준과 같은 성을 쓰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었는데, 이준은 한 번도 그녀의 부모님을 본적이 없었고, 가끔 아버지에게 이은의 부모님에 대해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피할 뿐 이었다.
이은은 항상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영리하게 말을 돌리거나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게다가 그녀는 일단 한 번 답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준 역시 그녀의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에이, 됐어.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준은 맥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 운남종에서 찾아온 세 사람을 보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말을 빙빙 돌리던 노인은 나설아의 압박을 이기지 못 한 듯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 *
“흠, 흠.”
노인은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입술을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
“촌장님, 사실 이번에 귀하의 마을에 온 것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입니다.”
“허허…도담 장로님, 부탁이 있으시면 편히 말씀하세요.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도록 하지요.”
이한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허, 촌장님. 혹시 이 아이를 아십니까?”
노인은 웃으면서 옆에 있는 예쁘장한 소녀를 가리켰다.
“이 아가씨는…”
이한은 아래위로 소녀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설아가 진율희의 제자로 들어갈 때, 그녀의 나이는 열 살 밖에 되지 않았고, 그 후 운남종에서 5년 동안 수련을 하면서 모습도 많이 변하였으니, 이한이 눈앞의 이 소녀가 자신의 며느리가 될 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으흠… 이 아이의 이름은 ‘나설아’입니다.”
“나설아? 대장군의 손녀 나설아 라고요?”
이한은 다소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가,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그녀가 며느리감으로 마음에 드는 듯 했다.
“네가 바로 설아였구나. 여러 해 너를 만나지 못해 알아보지 못했다. 미안하하구나.”
그녀가 준의 약혼자라는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 장로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아저씨,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설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이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허, 네가 진율희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말은 들었다. 정말 자질이 대단하구나.”
이한이 환히 웃으면서 그녀를 칭찬하자 설아는 수줍게 웃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곤란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