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몰락한 천재
“염력(念力,사이코키네시스), 3단!”
소년 하나가 비석 한 가운데 반짝이는 글자를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꽉 움켜쥔 소년의 주먹에서는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준, 염력 3단! 하!”
비석 옆에 서있던 감독관이 비석에 뜬 문자를 성의 없이 흘깃 보고 외치자, 광장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조롱과 야유가 터졌다.
“3단? 하하! 역시 내 예상대로군. 1년 동안 수련했다더니 진짜 천재 맞아?”
“쓰레기 같은 자식, 집안 망신이군!”
“아버지가 촌장이 아니었으면 저놈은 성 밖으로 벌써 내쫓겼을 거야. 저 따위로 놀고먹고 할 자격도 없지……”
“왕년에는 은빛성에서 제일가는 천재였는데.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되었을꼬? 쯧쯧…”
“그러게 말일세. 혹시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신령님께서 벌이라도 내리신 것은 아닐까 싶네.”
소년은 쏟아지는 야유를 듣고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지만, 이를 악물고 담담한 표정으로 참아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그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한 순간에 변하다니. 3년 전만 해도 모두 나를 동경했었는데…’
이준은 씁쓸한 표정으로 무리의 가장 마지막 줄로 돌아갔다. 그의 뒤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가 유독 외로워 보였다.
“다음, 이안!”
감독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 속에서 소녀 하나가 빠르게 달려 나왔다.
소녀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야유가 잦아들며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녀가 조용히 눈을 감자, 검은 비석에 또 한 번 빛으로 문자가 나타났다.
“이안, 염력 7단! 상!”
감독관이 큰 소리로 성적을 외치자 소녀의 조막만한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7단이라니 대단하군. 이런 성장 속도라면 3년 후면 투사가 될지도 모르겠는걸?”
“커서 가문을 크게 빛낼 인물이지…”
소년 때와는 달리 칭찬과 부러움의 말들이 들려오자, 소녀는 자랑스러운 듯 싱긋 웃으며 종종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안의 시선은 사람들을 지나 맨 끝에 있는 외로운 그림자 위에 멈춰 섰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준이 보여준 성과로 미루어보아,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할 듯 했다.
그러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녀는 가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곧 이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를 것 이다.
“참…!”
불현듯 이안의 머릿속에 3년 전 늠름했던 소년의 모습이 스쳤다.
4살에 처음 염력을 보이기 시작해, 11살에 10단을 돌파하고, 염력 회오리를 쌓는데 성공한 천재 이준은, 그 때 이씨 가문 백 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는 젊은 신성이었다.
당시 소년은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가문의 자랑이었다. 자신 역시 또래의 다른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고, 그를 동경했다.
하지만… 그것도 3년 전까지였다.
소년의 몰락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10년 동안 고생해 모은 염력 회오리가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염력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평범한 수준조차 되지 못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몰락. 소년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무너진다면 그는 다시 올라설 기회조차 잡지 못할 것이다.
“다음, 이은!”
떠들썩한 군중들 속에서 시험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이은의 이름이 불리자 소란스럽던 시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사람들의 눈이 모인 곳에는 통이 넓은 보라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의 자세는 당당했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시험을 앞두고도 살짝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아직 뺨에 홍조도 가시기 않은 소녀였지만, 그녀에게는 연못가에 홀로 핀 연꽃 같은 고고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그녀는 차분하게 걸음을 옮겨 비석 앞으로 나아가 작고 가녀린 손을 뻗어 비석을 만졌다.
잠시 정적이 감돌고, 비석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퍼져나갔다.
“이은! 염력 9단! 상!”
비석위에 글이 떠오르자 장내는 다시 조용해 졌다.
“벌써 9단이라니! 대단하군! 무서울 정도야! 가문의 유망주들 중에서 최고는 아무래도 이은 아가씨인 것 같군.”
조용해졌던 장내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리에 있는 많은 소년소녀들은 그녀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의 눈에는 존경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염력(念力,사이코키네시스) 시험. 이는 모든 투사들이 반드시 지나쳐야 할 관문으로, 초급 수준에서는 1단부터 10단까지의 염력을 쌓아야 했다.
그리고 몸속의 염력에 10단에 이르면 마침내 염력 회오리가 생성되고, 진정한 투사가 될 수 있는 것 이다.
이준은 여전히 입술을 앙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비석 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시험관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고, 그들은 이미 소녀를 상전 대하듯이 하고 있었다. 시험관들의 그런 태도는, 자신을 대하던 그것과는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었던지라,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은 아가씨, 반년이 지나면 염력 회오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성공하면 14살에 진정한 투사가 되며, 이 씨 가문의 백 년 역사에서 두 번째로 가장 빨리 투사가 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 두 번째. 두 번째라는 말이 이준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첫 번째는 자신‘이었다.’
“고마워요.”
소녀가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광장에 핀 한송이 꽃처럼 아리따운 여자 아이는, 조용히 뒤돌아서서 맨 끝에 서있는 소년에게로 걸어갔다.
“준 오라버니.”
그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이준에게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심지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환한 웃음까지 지으며.
“내가 아직 너에게 ‘오라버니’ 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거니?”
그녀는 자신이 조롱거리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그를 존중해주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소년의 표정은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모두의 동경과 관심을 한 눈에 받는 이은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불과 몇 년전까지 자신에게 쏟아졌던 찬사와 관심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저는 오라버니가 금세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어요.”
소녀는 단호한 말투로 말한 뒤, 활짝 웃으며 다정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때의 오라버니는 정말로 멋졌어요. 지금도 멋지지만요.”
“하하…”
소녀의 말을 듣고 소년은 어색하게 웃은 뒤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다정한 말은 그를 기쁘게 했지만, 화려한 과거가 떠오를 때 마다 이준은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다.
지금의 그에게는 한줌의 자부심도 남아있지 않았고, 비루한 일상속에는 아주 작은 기쁨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몸을 돌려 광장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축 쳐진 어깨로 쓸쓸하게 뒤돌아서는 그를 보며,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쪼르르 달려가 소년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 *
준은 산정상의 넓은 풀 밭 위에 드러누워 풀 한 가닥을 잘근잘근 씹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휴……”
유달리 큰 보름달이 어둠을 뚫고 지상을 환히 비추고,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한참을 잘근잘근 풀을 씹다보니 씁쓸한 풀내가 입 안 가득 느껴졌다.
“하아……”
오후에 있었던 시험을 생각하자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벌써 15년이구나…”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사실 소년은 지금 있는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는, 그의 영혼이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구’라고 하는 행성에서 온 사람으로,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 했다. 그는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타임슬립으로 인해 이곳에 오게 된 것 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뿐 이었다.
타임슬립을 통해 그가 오게 된 곳은 ‘투기대륙’이라는 이름의 대륙으로, 지구에서 살 때 흔히 보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법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염력’이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 염력은 상당히 흔한 것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져, 이곳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염력은 이미 이곳 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고, 투기대륙의 많은 젊은이들은 염력을 단련해 투사가 되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있다.
다만 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염력을 단련해야 했는데, 투기대륙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염력을 수련하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염력을 단련하는 방식이 수 만 가지도 넘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수련 방식에 따라 투기대륙 전체에는 수천 수만개의 ‘문파’가 형성되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각 문파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염력을 수행했으며, 염력과 더불어 염력을 활용하는 방식인 ‘무투기(武鬪技)’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투기대륙에서는 염력을 총 4단계, 12 수준으로 나누며, 4단계를 높은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1격, 2격, 3격, 4격”이었고, 각 단계는 다시 상, 중, 하 3개의 수준으로 분류되었다.
예를 들어, 3격 단계 중 수준의 염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4격의 상 수준의 힘을 가진 사람보다 더 강했고, 1격 단계의 염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설령 ‘하’ 수준의 염력을 갖고 있어도, ‘3격’ 이나 ‘4격’ 단계의 염력을 갖춘 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론이며, 투사의 수준을 정하는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투사의 실력이었다.
실제로는 본인의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투사는 1격 단계의 수련법으로 수련한다고 해도, 4격 단계의 투사조차 이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염력의 수준은 중요하다. 같은 수준의 투사라면, 염력 수준이 높은 투사가 여러모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즉, 1격 수준의 수련법으로 염력을 수행한 투사라면, 실력차가 아주 큰 경우를 제외하고는 2격 수련법이나, 3격 수련법을 통해 염력을 단련한 사람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이 습득한 수련법이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다면, 그 힘은 최고 몇 배에 달하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염력 수련법 중 고급 수련법이라고 인정을 받으려면 최소한 2격 수준의 수련법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초자연적인 세력이나 대제국만이 보유해 일반인들이 익히는 것은 불가능했고, 수련법의 자세한 원리나 수련 방식은 물론, 존재 자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1격 수준의 수련법은 이미 몇 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염력과 투사의 실력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바로 무투기(武鬪技)였다. 이는 염력을 활용하는 방법이며, 신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운을 나타내고, 염력과 마찬가지로 1-4격의 4단계로 나뉘었다.
이 중 투기대륙에 전해지고 있는 대중적인 무투기(武鬪技)는 4격 단계의 무투기로, 만약 더욱 높은 단계의 무투기를 얻으려면 종파에 가입하거나 대륙에 있는 무투기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했다.
따라서 높은 레벨의 무투기 수련법을 일반인들이 얻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4격 수준의 수련법에 그쳤다.
비교적 세가 있는 가문이나 중소 문파라도 보통은 3격 수준의 수련법을 익히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런 수련법은 가문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나 그 사람의 직계 제자에게만 전수되었다.
이는 이준이 속해 있는 이씨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가문에서는 촌장만이 가장 높은 단계의 수련법을 수련할 자격이 있었다.
준의 가문에 전해지는 것은 ‘사자의 포효’이라는 이름이 붙은 무투기로,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무투기 중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평범한 무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