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버스 빌런-488화 (488/500)

제 4장

백혈도 (3)

하북팽가에서 사람이 우르르 몰려나 왔다.

팽가의 가주 팽세기와 장로, 단주급 무인들이 신속히 도열했다. 그들에게 있어 대호법은 범접하기 어려운 지고무 상의 절대자였다. 하북팽가의 역사는 대호법의 등장 전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연락을 주셨으면 미리 마중을 나갔 을 겁니다.”

“번거롭게 하고 싶진 않아.”

정우는 손을 저으며 들어갔다.

한데 안은 더 가관이다. 팽가의 기틀 이 바뀌었다. 직계를 제외하면 본가를 방문하기도 어려웠던 예전에 비하면 생 소한 광경이다. 방계와 중소문파를 가 리지 않았다.

“제법이야.”

“대호법의 선경지명에 감탄을 금치 못할 따름입니다.”

하북팽가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흡수 했다. 방계, 중소문파의 차별을 폐지하 고 능력이 잣대가 되었다.

진통이 없진 않았다. 순혈주의를 주장 하는 직계로서는 현 상황이 마땅치 않 을 수밖에 없었다. 팽세기는 내부의 다 툼을 팽가대회전을 열어 해결했다. 무 인은 무공으로 자신을 증명한다는 명제 를 내세웠었다.

‘결과적으로 대호법의 권위는 더더욱 높아졌지.’

대호법을 향한 무인들에겐 맹목적인 신뢰가 쌓여 있었다. 단순히 무력만 강 해서는 얻기 힘든 신뢰였다. 대호법에 게 발탁되어 훈련을 받은 이후, 개개인 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 점이 크게 다가왔다. 재능이 있어도 신분의 장벽 에 막혀 올라가지 못했던 이들에겐 구 세주와 같았다. 반면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팽가의 직계는 대호법의 눈에 들 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실상 눈 밖에 나면 이젠 국물도 없었다.

“여장을 푸시는 대로 식사를 대령하 겠습니다.”

“짜식, 빠릿빠릿해졌네.”

팽가의 가주를 대하는 대호법의 행동 이 예의를 벗어나 보이나, 누구도 이의 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호법은 그래도 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가 마음을 먹기에 따라서 팽가는 날개를 다느냐, 나락으로 떨어지느냐가 결정이 된다.

“대호법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알아주니 고맙다.”

팽세기와 이극은 한시도 방심하지 않 았다. 대호법은 웃는 얼굴로 서슴없이 주먹을 날리는 위인이었다. 수틀리면 체면이고 예의고 따지지 않았다.

“세가연합회를 할 테니, 다들불러.”

“예, 대호법.”

오대세가의 대부분이 하북성 북경 일 대에 있었다. 팽가에 전부 수용할 순 없 어 분산시켜 놓았다. 각 성을 비워 놓은 형국이라, 하북성에서 공성전을 벌이는 행태가 되었다. 혹혈마교의 대륙 장악 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신혼재미가 좋나 봐.”

“부끄럽습니다.”

팽세기의 와이프인 남궁란이 배를 가 린 채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정략적인 혼인에 많이 힘들었

지만, 결국에는 팽세기를 받아들였다. 대호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오대세가 안에서 거부했다가는 남궁세가는 살아 남지 못한다.

여독을 푼 정우의 방으로 강천과 세 경이 찾아왔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팽가로 던져 버 린 강천과는 오랜만이었다. 얼굴에서 행복 바이러스가 만개하고 있었다. 원 인은 분명했다. 세경의 모습이 많이 달 라져 있었다.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에 는 괴리감이 상당했다.

“유가신공을 대성했군.”

“난 괜찮은데, 우리 세경이가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세경의 결혼식 때와 현재를 비교하면 번데기에서 탈피한 오색찬란한 나비에 비견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변화다. 애초에 얼굴은 청순미녀의 표 상이었기에 몸매만 변하면 누구도 따르 지 못할 절세가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복권 제대로 긁었네.”

“거봐, 세경이도 한다면 한다고.”

유가신공을 대성했다고 해도 워낙 근 육질의 세경이었다. 금강불괴에 근접한 육신을 부드럽게 펴고, 축소시키는 과 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목숨을 걸었 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너희를 과소평가했다. 인정해.”

“과소평가? 나와 세경이를 어떻게 보 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꼭 말해야 하냐?”

“皇해봐.”

“대가리에 근육만 들어찬 연놈들.”

돌려 말하지 않았다. 대놓고 그냥 깠 다. 이쯤 되면 촌철살인은 애교였다. 묵 직한 강천이 비틀거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농담인데, 개기면 가만 안 둘 거다.”

“……제길!”

농담은 해도, 허언은 하지 않는 정우 다.

그걸 알기에 강천과 세경은 이쯤에서 받아 주었다. 사실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해 봤자 큰 의미는 없었다. 사이가 나빠 지면 불이익은 온전히 강천과 세경의 몫이다.

“많이 놀랐지‘?”

“안 놀라면 그게 더 이상하죠.”

“밝히고 싶으면 밝혀도 돼.”

“자살은 사양하고 싶네요.”

세경은 혹금단주의 실체가 강천의 친 구 정우라는 걸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 다. 오대세가를 평정한 괴물이 서른도 되지 않았다는 걸 세상이 안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감추 어졌던 비밀이다. 세경은 발설할 엄두 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안 무섭지만, 정우는 무서웠다. 팽가의 금지옥엽으로서 오만방자했던 지난 과 거를 비추어 볼 때, 존대를 하는 것만으 로도 쉬이 짐작이 간다.

“그런데 마법사라면서요?”

“9레벨이야.”

u 2"

“다들 그 정도는 하잖아.”

어디서 암반이 무더기로 날아오는 소 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세경은 지나치 게 태연히 말하기에 순간 진짜로 별거 아닌 줄 착각할 뻔했다. 그러나 곱씹으 면 씹을수록 무시무시한 내용이 스쳐 지나갔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9레벨이면 끝에 도달한 거 아닌가 요?”

“마법이든, 무공이든 끝이 어디 있어.

난자만같은건 안해.”

세경은 더더욱 개기면 안 되는 존재 임을 재확인했다. 무력만.0-루.두 충분히 괴물이다. 여기에 마법까지 절대레벨에 도달했다. 보통은 이 정도 가지고 있으 면 자만해도 뭐라 흐}지 않는다. 그러나 정우는 안주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기는 안놀라?”

“쟤는 원래 그런 애야, 우린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면 돼.”

강천의 초탈함에 세경은 깊이 수긍했 다. 인간의 잣대로 재기 어려운 친구가 옆에 있었다. 부러움과 시기도 어느 정 도 비벼 볼 여지가 있어야 하지, 아예 다른 세상에 있으면 논외 대상으로 치 는 편이 삶의 지혜다. 오히려 미움을 받 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마교를 이대로 놔둘 거이r

“내가 놔두고 싶어도 저쪽에서 가만 있지 않을 거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있는 흑혈마 교는 대륙 전역을 거의 다 장악했다. 구 파일방으로 구성된 무림맹은 와해 직전 이었다. 남아 있는 인원이라고 해 봐야, 흑혈마교와 견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 다.

“백혈도라는 자 만만치 않을 거야, 방 심했다가는 허를 찔릴 수 있어.”

V 얘기가 아닐 텐데.”

“응?”

“너도 같이 가야지.”

응원차 들렀던 강천은 졸지에 생이별 을 하게 생겼다. 핑계가 필요하다. 세경 과의 사랑이 불타오르는 시기다. 밥 먹 다가도, 청소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불끈불끈했다. 간혹 세경이 적극적일 때는 무섭지만.

“난 신혼이잖아.”

“그건 네 사정이고.”

전쟁에 끌려가게 된 강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우가 옆에 있다고 해서 안 심해선 안 된다. 방심하는 순간 안전은 둘째 치고, 개고생은 따 논 당상이다.

팽가의 가주실에서 세가연합회를 했 다.

암제를 비롯한 세가의 핵심 수뇌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정우가 오기 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백혈도를 주 축으로 한 혹혈마교의 힘이 예상을 훨 씬 상회하고 있었다. 오대세가와 구파 일방이 온전한 전력이었다고 해도 승부 를 장담하기 힘들 만큼 강력했다.

“백혈도의 무력이 어느 정도로 알려 졌지?”

“절대고수 중에서도 최강입니다. 그 예로 구파일방의 절대고수 10명을 혼자 서 죽였습니다.”

“암제와 비교하면?”

“삼초지적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천은 대답을 하면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비교 대상 에 하필이면 암제를 올려놓는 바람에 속이 뜨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암 제는 흑금단주를 제외하고 가장 강했다.

그의 독심을 알기에 오늘부터 음식과 음료를 철저히 점검해야 할 것이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제갈천은 절실히 체감했다. 조금이라 도 방심하면 적아를 막론하고 허를 찌 르는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 니 사실을 숨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암 제가 껄끄럽기는 해도 혹금단주와 비교 하면 두렵지 않다.

“공격 시기는 언제지?”

“10일 내외입니다.”

“어째서?”

“구파일방의 잔존세력이 하북성으로

넘어왔습니다.”

“빌미는 충분하군.”

“그렇습니다.”

혹혈마교는 구파일방을 궤멸시킬 힘 이 있었다. 그런데도 완전히 숨통을 끊 어 놓는 대신에 몰이를 했다. 하북성으 로 가도록 길목마다 공격을 하고 있었 다. 몰이를 당하는 구파일방도 그 사실 을 알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흑혈마교의 힘은 소수민족에 있습니 다. 그들을 흡수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정통성을 주장했던 과거 의 마교와는 다릅니다.”

“억압되었던 분노가 상당할 테지.”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말 을 듣지 않으면 군사적인 행동을 마다 하지 않았다. 국제적인 질타에도 중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을 고집했다. 그것 이 가능했던 이유는 구파일방과 오대세 가의 힘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국 정부에 대한 분노보다 백도무림에 대한 증오가 더 컸다.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흑혈마교의 행보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다 해도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아 있어.’

마교주의 잔혹함만 부각이 되었다면 단순하게 보면 그만이나, 그는 오랫동 안 자신을 숨긴 채 숙고했다. 마공을 익 힌 마인의 성향과는 정반대다. 치밀하 며, 인내심이 강했다. 그런 자가 아무 이유 없이 피를 보고 있을 리 없다.

‘전략적인 수에 본인의 무공까지도 염 두에 두었다는 소린데.’

단편적인 지식만 보면 그럴 가능성이 9할 이상이다. 어쩌면 무공이 아니라 속성일 수도 있다. 기습이라고는 해도, 불성을 그토록 간단히 해치웠다면 완성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운 좋은 줄알아라.’

전생의 정우였다면 백혈도는 피를 흡 수하다가 절명했을 수도 있다. 가장 효 율적인 방법은 무림맹의 잔존 세력과 오대세가의 무인들에게 티가 나지 않도 록 심독을 복용시킨 후, 백혈도의 반응 을 살피기만 해도 그만이었다.

‘그래도 얻을 건 얻어야지.’

정우의 계획은 제3세력이 있다는 걸 확인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연히 마교가 아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현재의 판을 뒤집을 패로 쓸 수 있 으면 그만이다. 온전했던 구파일방이 무너졌으니, 계획의 마무리 단계에 왔 다.

“일단 믿음을 줘야겠지.”

정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향을 잃지 않았다. 애초의 계획대로 진행시 킬 분이다. 방해물이 스스로 알아서 빌 미를 주었으니 나브지 않았다.

‘인간의 욕심은 시대를 막론하고 다르 지 않거든.’

그 인간의 특성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전략전술의 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비규환의 장.

원래의 형태를 잊어버린 대로변에는 잘려 나간 주검의 파편들이 제멋대로 널려 있었다. 피비린내와 열기가 사망 시간을 추정해 주었다. 죽은 지 오래되 지 않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파공 성과 비명이 연이어 들린다. 생의 마지 막을 버티기 위한 처절한 발악이 포함 되었다.

일정 거리를 둔 공간.

하아, 하아!

말끔했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제 멋대로 흩날리고, 매화를 수놓은 무복 은 찢겨진 채 피에 물들었다. 어깨의 기 복을 멈추지 못할 만큼 중년의 사내는 숨이 거칠었다. 그의 실체를 안다면 작 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화산검신(華山劍神) 백무정.

화산파가 배출한 불세출의 검객으로 무당의 검성, 소림의 불성과 함께 구파 일방 최강의 고수로 평가받는다. 그 누 구의 도전도 거부할 절대적인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화산파 역사상 자하 신공과 자하신검을 대성한 이는 그밖에 없었다.

백무정과 마주한 사내가 있었다.

“주변에서 검신이라고 떠받들어 주니, 진정 신이라도 된 줄 알았나.”

그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자는 사파 무림의 정점에 섰던 흑룡성주 진대악이 다. 흑룡성이 무너지고 백마의 일인으 로 돌아온 그는 마기를 주저하지 않고 뿌리고 있었다.

백무정은 진대악을 향해 저주를 퍼부 었다.

“……하늘이 결코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인간에 불과했군.”

진대악의 비릿한 실소에 백무정의 안

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백무정에겐 일생일대의 굴욕이었다. 상대가 비록 혹룡성주였다곤 해도 백마에 속한 마인 에 불과했다. 검신으로 추앙받아 왔던 그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내가 마인 따위에게!’

백무정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백혈도도 아니고 백마의 일인조차 감당 하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 다. 그분인가. 진대악은 자신을 막아 세 우며 문도들이 죽어 가는 걸 지켜보게 하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신선의 흉내는 버렸나. 하긴, 이쪽이 더 어울리는군.”

진대악의 입꼬리가 얄팍한 호선을 그 린다.

반면 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 갑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결이 여유 로운 듯 보여도 화산검신을 호락호락하 게 여기진 않았다. 그가 구파일방을 대 표하는 삼대고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 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