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백혈도 (1)
짱짱한 햇볕 아래 논에 모를 심는 사 내가 있었다.
기계가 발달한 시대라, 사람의 손이 필요 없음에도 청년은 묵묵히 모를 심 어 5천 평의 논을 채웠다. 그는 오늘 하 루에 모를 다 심은 후, 논에서 걸어 나 와 준비해 놓은 새참을 먹으며 막걸리 한잔을 했다.
카아아, 좋다.
해가 한가운데에서 내려가고 있는 시 간대, 선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혹인과 호형호제를 해야 할 만큼 뜨겁다.
저벅, 저벅.
막 일을 끝내고 사내가 일어섰다.
적안, 적발의 사내가 논두렁을 걸어왔 다. 폭이 좁고 비가 와서 미끄러울 텐데 도 균형을 유지했다. 그 하나만 봐도 범 상치 않은 자였다.
“자네도 한잔해.”
“감사합니다, 문주님.”
모를 심은 사내는 태평문0:平門)의 문주인 김호진이고, 적발의 사내는 장 로를 맡고 있는 백경수였다. 태평문은 5년이 되지 않은 신생 문파이며, 규모 도 크지 않았다. 문파 인원은 100명 내 외로 구성이 되었다.
“날 따라온 걸 후회하지 않아?”
“전혀요.”
“너무 기대하지 마, 난 작금의 생활이 좋아.”
“저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백경수는 문주의 초탈한 성향에 감화 되어 그를 평생의 주군으로 모시고 있 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현재의 자신은 없었다.
‘진실이 알려지면 세상이 깜짝 놀라겠 지만.’
전문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회장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각 무문과 길드에서 스카우트하기 위 해 경쟁을 벌였을 만큼, 회장의 유니크 로서의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한데 그 모든 유혹을 부리치고 문파를 차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것도 한적한 시골에 소규모의 신흥문파를 세운 것이 다.
세상은 그러한 회장의 행보에 비웃었 다. 학교에서 잘나갔다 해도 학생에 불 과했다. 결국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하게 될 거라 봤다.
“어쩐 일이야?”
“신룡문에서 가입 권유를 해 왔습니 다.”
“하긴할때가됐지.”
“1년은 더 유예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해야 하잖아. 어려운 일도 아니고.”
새 문파를 열고, 5년의 유예기간을 둔 다. 신흥 문파의 경우 개파하고, 없어지 기를 반복한다. 최소 5년은 버텨야 대 문파에 소속될 자격을 가진다. 물론 독 자적으로 자생할 수도 있으나, 그리되 면 대문파와 마찰을 각오해야 했다.
“요즘 후배의 활?] 대단하다지.”
“솔직히 저도 놀랐습니다.”
“하나만 대성해도 어렵거늘.”
“문주님에 비견되는 자는 처음입니 다.”
“나도 그렇겐 못해.”
김호진의 두 눈이 깊게 잠긴다.
‘확인하기가 무섭군.’
확신이 서진 않았다.
그가 아는 방식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파격적이기는 하나, 정도를 벗 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 록 그의 천재성이 빛이 나고 있었다. 그 가 아니고서는 다가서지 못할 영역이 다.
‘나도 사람인지라, 지쳤어.’
김호진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변 하지 않는다는 걸 진작 깨닫고 있었다. 그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거다. 악을 징벌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 었으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물론 그 렇다고 해서 부동심이 혼들릴 만큼, 나 태하진 않았다.
‘다가올 시련은 대비를 해야 해.’
태평문을 세운 목적은 자질이 뛰어난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트레이닝 장소 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케이브는 진화하고, 인간의 세 상을 위협해 오고 있었다.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직시했다.
‘어쩌면 오기일지도.’
정우는 유니크 연합 소속으로서 활약
을 이어 나갔다.
9급 케이브를 공략하며 명성을 쌓았 다. 이뿐인가, 유니크 연합의 구조개편 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실력 이 아닌 인맥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쭉정이는 도태되었고, 실력자가 그 자 리를 대신했다. 일례로 인천의 전임 지 부장이었던 자이언트 오장훈이 국장에 임명되었다.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단행 되면서 박상원도 부국장의 후보에 올랐 다.
“부국장님.”
“아직 후보다.”
정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박상원은 속이 뜨끔했다.
“어물쩍 넘어가시려고요, 그러다가 김 칫국 제대로 마시게 될 겁니다.”
“또 뭐야?”
박상원은 정우의 마수를 피하고 싶었 으나, 체념해야 했다. 이번 부국장 후보 선정에 정우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걸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단일후보 였기에 발령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와이프한테도 다 됐다고 떠벌려 놓은 바람에 무를 수도 없는 처지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밥 먹여 주진 않아도, 신 경은 쓰였다.
“꼭 제가 바라는 게 있는 것처럼 들립 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서 한 거 다. 됐냐‘?”
박상원은 티끌 하나도 홈을 잡히지 않으려는 정우의 사전차단에 갑갑했다. 혹여 잘못되더라도 혼자 독박 쓰라는 의미도 포함되었다.
“아무래도 자발적으로 할 때 능률도 9르구., 여러모로 좋은 거죠.”
“징그러운 자식,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는구나.”
정우는 완벽한 군 생활을 그리고 있 었다.
조금이라도 홈이 잡힐 일은 하지 않 는다.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 했다. 공 적에 비례한 포상은 당연한 권리이긴 하나, 포상이 많을수록 시기의 대상이 되기에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박상원 은 유니크 연합 내에서 불평불만이 나 오지 않도록 단속해 줄 방패막이였다.
“나만욕먹으라, 이거구나.”
“그래도 부국장님은 같이할 친구가 있잖아요.”
박상원의 불알친구인 현 대통령도 마
냥 잘했다는 칭찬만 들리진 않았다. 소 수이기는 해도, 욕을 먹고 있었다. 노점 철폐와 강성노조의 제약, 외국인 지문 채취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그러나 대 외적으로 이 대통령을 몰아세우진 못했 다. 일본과의 기념비적인 협상이 불만 을 막아내고 있었다.
“네가 없을 땐 어쩌라고?”
“무문연합에 통보해 두었습니다. 최대 한 적극적으로 협조할 겁니다.”
정우는 무문연합 회의에 이 대통령 권한 대리로 참석했다. 대리라곤 해도, 전호경의 신분은 무문연합 내에서 절대 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오히려 이 대 통령이 허수아비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 올 지경이다.
‘그러게 얌전히 말 들었으면 좋았잖 아.’
물론 대외적으론 아름답게 포장되었 지만, 정우는 푸닥거리를 했었다. 나이 가 들수록 본인만의 주관이 지나치게 뚜렷해서, 한 번 더 짓밟아 주었다. 무 인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데 무력시위 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안 타가웠다. 단 경로우대 차원에서 적당 히 사지를 부수는 수준에서 멈추었다.
-여태 봐준 거였어?
-물론이지.
-……완전 사랑해, 나 이제 너만 사랑 할거야
-헛소린 그만하지.
무문의 문주들을 혼자서 짓밟은 이후, 염화의 두 눈에 새겨진 하트는 굉장한 부담이기는 했다. 이젠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까지 했다. 설마 하는데 결혼한 이후에도 달려들 것 같 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부탁드립니다.”
“이게 부탁이냐, 강요지.”
“싫으세요?”
“좋다, 망할 녀석아!”
정우는 박상원과 결탁을 한 후, 금강 문으로 향했다.
주르르르!
시산혈해를 이루는 대지는 피에 잠겨 있었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 사이로 찢겨 나간 피륙이 전장의 참혹함을 그 려 냈다. 수많은 주검이 뒤엉켜 있는 가 운데, 전투는 지속되고 있었다.
전장을 바라보는 자들, 무림맹 소속의 대주급의 무인이다. 그들은 구파일방의 정예와 소속된 무인을 이끌고 혹혈(黑血) 을 막기 위해 나섰다.
‘악몽이야!’
1천의 무인 중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100명이 넘지 않았다. 그 많은 무인들 이 흑혈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원인은 전투 도중 투입된 흑혈의 전략병기인 강시로 인해서다. 강시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어떤 수법을 썼는지 몰라도 7 급 마물을 강시로 만들었다. 그 파괴력 은 사람을 강시로 제조했을 때와 비교 가 되지 않았다.
하!
경악과 분노, 공포가 자리한 광경 속 에서 유혈이 낭자했었다. 그들은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물강 시에 투입된 특수한 약물 때문인지, 어 지간한 공격에는 홈집도 내지 못했다. 금강불괴를 넘어서는 단단함을 갖추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건 이 일대가 백인 문의 관할구역이라는 것이다.
대륙 무림의 돌아이, 백혈도(白血刀) 장경이 마물강시를 대적하면서 급반전 을 이루었다. 솔직히 그의 등장으로 안 심이 되진 않았었다. 그가 비록 대륙 오 대도객의 일인이기는 하나, 마물강시의 화력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봤다.
한데 백혈도와 그의 문도들은 일반적 이지 않았다. 기존에 알고 있었던 무력 을 가뿐히 상회해 마물강시를 처리했다. 특히 속성과 무력을 융합한 합격진의 파괴력은 경이로웠다. 백인문의 이력을 알기에 놀람은 더 컸다. 돌아이들만 모 아 놨다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백인 문은 괴이했었다.
“이 새끼들 튀었네! 남의 구역에 와서 잘도 깽판을 쳤겠다. 다음엔 다 죽여 버 릴 테다.”
“기회는 또 올 겁니다, 두목!”
백인문의 문도들은 문주를 두목으로 칭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격식이 없다 못해 산적두목인 줄 착각할 수도 있었 다.
“버러지 같은 것들을 잘도 만들었네.”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인 것과 달리 굉장히 경박스러운 백혈도였다. 그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주변 일대를 청소한 후, 수하들과 가지고 온 육포를 씹었다. 시 산혈해의 전장 속에서 저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진 않았다.
“장 문주님.”
“왜?”
백혈도에게 말을 건 자는 무룡대의 대주인 청풍도장으로 무당칠검에 속해 있었다.
그는 마물강시로 인해서 무룡대의 대 부분을 잃어버렸고, 백혈도가 아니었으 면 살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이 없긴 하 나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감사치레 받으려고 한 거 아냐, 우리 구역에서 설치는 걸 볼 수 없어서 나선 거야.”
“이유가 어찌 되었든 목숨을 구원받 았습니다. 제발 사례를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거참, 도사라 그런가 말귀를 못 알아 듣네.”
“부탁입니다.”
청풍도장은 사례를 언급하며 끈질긴 구애를 했다. 고지식해 보이는 일면이 나, 그의 속내는 달랐다.
‘이자가 필요하다.’
당장은 마물강시를 처리했다지만, 흑 혈에 얼마나 더 있는지 예측이 되지 않 는다. 다른 장소도 피해가 상당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백혈도의 무력이 필 요했다. 그가 비록 다스려지지 않는 망 나니이긴 해도.
“이번 한 번분이야.”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은 청풍도장은 안도의 한숨 을 쉬었다. 오대세가와의 공조가 이루 어지지 않는 바람에 여러모로 힘이 빠 진 무림맹이다. 이런 와중 마물강시의 출현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백혈도를 끌어들여야 하는 절대적인 이 유였다. 그를 다독여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후후후.’
청풍도장은 봤어야 했다.
돌아서서 웃는 백혈도의 서늘한 미소 를
동이 터 오기 전, 능선에 휘광의 선이 긁힌다.
정우의 휴대폰이 요란에게 울렸다. 매 너 없는 발신자는 여운랑이다. 그녀가 다급한 메시지와 함께 통화를 요청했다. 대륙의 혼란을 가늠하고 준비하고 있었 기에 놀라진 않았다. 다만 이 시간에 전 화를 하는 바람에 옆에 누운 하라가 깰 뻔했다. 그 요란한 벨소리에도 꿈쩍하 지 않는 하라, 역시 미녀는 잠꾸러기였 던가. 아니면 새벽 2시까지의 격한 운 동의 부작용에 의한 부동심일지도.
큰일났어요.
“무림맹이 무너지기라도 했어?”
-어떻게 아셨어요?
“큰일이라고 해 봤자, 그거밖에 없잖 아.”
예상대로이기는 한데, 무림맹이 지나 치게 간단히 무너져 버렸다. 소림을 필 두로 구파일방의 전력이 집중되었을 거 다. 제3세력으로 분류된 흑혈이 전략병 기를 이용해 피해를 주었어도, 무림맹 이 간단히 무너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무너졌으면 대륙을 지배하진 못했을 것이다.
“뒤통수라도 맞은 거겠지.”
-대단하시네요, 맞아요.
정우의 담담한 대답에 여운랑은 감탄 을 금치 못했다. 앉아서 천 리를 본다곤 해도, 잠이 덜 깬 새벽에 이토록 정확한 상황 판단이라니 경이로웠다.
-백혈도의 뿌리가 마교였고, 그가 마 교의 교주였어요.
“호오, 전략 잘 세웠네.”
-칭찬할 때가 아니에요. 불성이 백혈 도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어요. 남아 있는 무림맹 의 전력이라고 해 봐야 5분지 1도 안 돼요.
백혈도 장경이 마교의 교주였다니 누 구라도 놀랄 만한 사건이다.
그가 비록 대륙의 악동으로 악명이 자자하기는 하나, 정사지간으로서 도를 넘지 않았다. 하물며 마물강시 퇴치의 선봉장으로서 흑혈을 막아 내며 승승장 구했다. 한데 그마저도 무림맹의 핵심 수뇌부를 노리기 위한 전략^었던 것이 다.
-백인문의 문도는 백마(百魔)의 전신 이고, 흑룡성주 진대악도 백마의 일인 이었어요.
“익숙함을 잘이용했어, 훌륭하다.”
백혈도의 용의주도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거칠 것 없는 행보에 가 려져, 정작 그의 실체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꽁꽁 숨어 있어도 부족할 판국 에 드러내 놓고 날뛸 줄 누가 알았으랴.
“오대세가의 주 전력은 어떻게 됐어?” -단주님의 지시대로 직접적인 대결을 벌이지 않아 피해는 크지 않아요.
“먼저 나서지 마.”
-와해된 무림맹에서 계속 연락이 오 는데요.
“일단 무시해.”
-희생이 너무 커요.
무림맹의 희생은 정우의 관심 밖이다. 내부의 다툼에 불과했다.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희생은 당연한 수순이 었다. 안일하게 준비하다가 뒤통수 맞 은 무림맹의 책임이 더 컸다. 전쟁을 일 으킨 주범을 욕해야 마땅하나, 대비를 하지 않은 자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곪은 부위를 과감히 쳐낼 줄 알아야 건 전한 토대 위에 굳건한 성을 짓는 법이 다.
-그러다가 각개격파당하면요?
“그건 무림맹이 완전히 힘을 잃고 난 이후의 문제겠지.”
여운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음에도 전율이 일었다. 실로 냉철한 전략이었다. 희생을 바탕 으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마교에서 연락하면 받아들여. 아마' 손대지 않으면 먼저 움직이진 않을 거 야.”
-알았어요.
정우가 오대세가의 주 전력을 물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피해가 예상 보다 적다는 말이 포함된다. 마교는 각 개격파를 원하고 있었다. 오대세가가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압박만 해 놓은 것이다.
‘오대세가의 전력이 약화된 것도 한몫 했지.’
일전 오대세가 간의 경쟁에서 희생이 컸던 이유가 단순히 정우의 변덕일 거 라 봤다면 오산이다. 제3세력의 존재를 확신했기에 오대세가의 전력 약화는 불 가피했다. 당연히 오대세가보다는 구파 일방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구파일방 만 처리하면 오대세가는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고 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