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버스 빌런-483화 (483/500)

제 3장

정상회담 0)

회의탁자에 두 발을 올려놓은 채 유 명 브랜드인 세디스 최고가 의자에 앉 아 앞뒤로 까딱거리며 놀고 있는 정우 와 달리 양옆으로 앉아 있는 12지신가 의 가주들은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의자가 참 좋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있는 가주들이 다. 바늘방석에 앉아 있어도 이보다는 불편하지 않을 거다. 숨이 막히다 못해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한가로움 을 만끽하고 있는 이 인간이 과연 어제 의 그 괴물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지경 이다.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 아. 갈사람은가라니까.”

“저희가 참석하고 싶어서 자리한 겁

니다.”

항복을 선언한 후, 혹금단주는 가 보 라고 했다. 그래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네즈미가 연합 가주들에게 전후 협상처 리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언뜻 보면 자 신들과는 상관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뒤돌아서 가 버리는 순간, 혹금 단주는 제 맘대로 전후처리를 해 버릴 게 분명하다. 물론 같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협상이 더 유리할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어제 항복 안 했으면 무가(武家) 순방으로 일정을 변경하려고 했었거든. 굉장히 귀찮은 일이지만 어쩌겠어. 해 야 할 일은 해야 내일이 편안하지.”

오다가다 잠시 들른 선객처럼 말하지 만, 의미를 되새긴 가주들은 온몸에 소 름이 돋았다. 항복하지 않으면 몰살시 키겠다고 했었다. 한데 700명이 아닌 가문 전체를 의미한 것이다. 괴물의 피 해 산정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체감해야 했다.

‘악마 같은!’

규격 외의 대상이었다.

가주들은 잘못 건드렸음을 뼈저리게 체감해야 했다.

“원래 다 그런 거지, 당하면 복수하고.

과거 이야기지만 청산리 대첩 이후 간 도에서 참변을 일으켰었잖아. 인지상정 이니까, 내 행동도 이해될 거야.”

너희도 했으니, 나도 하겠다며 과거 청산 깨끗이 하지 않은 너희 조상놈들 과 현 실세를 싸잡아 대수롭지 않게 질 타했다. 또한 오늘 일을 가지고 보복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가벼운 언행 뒤에 암중으로 무서운 진 의가숨어 있었다.

“네즈미가의 주변이 많이 부서졌더라. 어쩌다 그리됐을꼬, 내 마음이 다 아프 다.”

“그게 무슨……?”

붕어대가리도 아니고, 어제 일을 잊은 거냐.

하는 말들의 나열이 가관이었다. 점입 가경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우는 아 이 달래 주기는커녕 더 울린다고 해야 하나. 떡 줄 사람 고민하기도 전에 뺏어 먹는 격이다.

“네즈미가는 12지신가 소속이잖아. 의리 없이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니다. 난 너희들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안 그 래?”

“‘.(헐)!”

켄신과 싸우다가 벌어진 사태였고, 그 책임의 중심에는 혹금단주가 있었다. 그가 이리저리 사방팔방으로 전장을 넓 히는 바람에 피해의 범위가 첩첩산중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반박하지 못 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용신 가 연합으로서 참여했다. 책임에서 자 유롭진 않았다. 하물면 12지신가의 소 속감을 내세우며 뭉뚱그리고 있었다.

“저희들이 책임지고 원상 복귀시키겠 습니다.”

“피해보상은?”

“최대한 잡음이 없도록 처리하겠습니

다.”

“그래야지, 자고로 사람은 의리가 있 어야 해.”

혹금단주가 사람의 도리를 언급하자, 12지신가의 가주들은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면 당연히 도리를 알아 야 하지만, 거론의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대상의 감정이 상반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마 저 벗어났다. 최소한 핵똥을 맞은 개라 고 해야 얼추 받아들여진다.

“내가 잘 아는 건설회사가 있는데 소

개시켜 줄게.”

“저희도 거래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호의로 말한 게 아님을 깨달았다.

저 말은 내가 소개한 건설회사를 쓰 라는 협박이었다. 아니면 마른하늘에 메테오를 맞을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 러한 억하심정을 발휘하고도 남았다. 익살스러운 말투와 달리 지독한 악의였 다. 아마 자신들이 임의대로 건설을 했 으면 간과하지 않았을 위인이었다.

“대한건설이라고, 집 정말 잘 짓더

라.”

“……믿음이 가는군요.”

“내가 보증해. 혹시나 무너지면 알아 서 해야 한다는 사소한 단점은 넘어가 자고.”

“사후처리는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리 말하면 무너진다고 단정 짓는 게 되잖아.”

“관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한그룹의 계열사인 대한건설을 거 론했다. 한국 내 3개의 큰 건설사 중에 하나다. 하지만 건설경기가 오락가락하 면서 하향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일 대의 건설을 도맡아서 한다면 상당한 돈벌이가 될 것이다.

‘아니라면 굳이 범위를 늘릴 필요가 없었지.’

고의는 아니다. 겸사겸사, 일거양득을 노렸을 분이다.

“초고층으로 10개 정도 지으면 미관 상좋지 않겠어.”

“예?”

이 일대는 상업지구라고 하기에는 무 리가 따른다. 유동인구를 감안하면 초 고층 타워는 1개만 해도 남아돈다. 한 데 10개라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 는 소리란 말인가. 한마디로 주변은 다 논바닥인데 초고층 타워만 덩그러니 지 어져 있다고 봐야 했다. 하물며 초고층 타워는 돈 잡아먹는 귀신이다. 지진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일본에서 초고층 빌딩을 지으려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이 일대는 상업지구가 아닙니다.”

“앞으로는 발전할 거잖아. 대비해야 지.”

좋게 보면 설득이나 반쯤 강요다.

12지신가는 이 일대에 대한 도시개발 계획을 새로 세워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기고 말았다. 아니면 돈 낭비 제대로 한 격이다. 아무리 돈이 남아돌아도, 초 고층 타워 10개는 부담이 되었다.

“싫어?”

“아닙니다.”

싫다고 했으면 생-라면 곱빼기가 기 다리고 있었을 거다.

정우는 저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전쟁은 원래가 승자의 뜻대로 흘러가는 법이다. 전후의 보상은 당연했다.

“피해보상은 얼마쯤 예상하고 있지?”

“예? 보상은 건설사 선정으로 합의된 게 아닙니까?”

건설사 확정으로도 떨어지는 콩고물 이 천문학적이다. 그 가치를 감안하면 보상을 토해 내도 부족했다. 그런데 피 해복구와 피해보상은 다른 영역으로 구 분 지어 버렸다.

“건설은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봉사고. 설마 책정하지 않은 거 야?”

“……책정했습니다.”

이 일대는 네즈미가의 구역이다.

그 말은 네즈미가에 보상을 해야 한 다는 의미다. 보상 차원으로 보면 지극 히 합당해 보이나, 흑금단주는 선을 그 어 버렸다. 이러니 건설과 보상이 구분 이 되어 이중보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반박하지 못했다. 거절하는 즉시 가문 으로 찾아가 모조리 다 부숴 버릴 위인 이었다.

‘달라고 해도 우린 못 막아.’

‘줄 수밖에 없어.’

호흡을 가다듬은 가주들은 눈짓으로 적절한 액수를 주고받은 후, 조심스럽 게 혹금단주의 의향을 물었다.

“10억 엔이면 어떠신지?”

“누가 일본 아니랄까 봐, 회 더럽게 좋아하네.”

“날로 먹지 말라고.”

가주들의 안색이 빨주노초파남보를 경험하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롤러코 스터를 타고 있어 멀미가 심했다.

“최대한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돈 같은 걸로 구차하게 굴지 말자. 이만큼 얘기했으면 말귀가 어두운 건 아니니 알아들었겠고. 참고로 나 휴가 써서 어렵게 왔다.”

참고 사항일 분 마음에 담아 두지 말 라며 손사래까지 치는 정우의 세밀한 표현에 가주들의 주름살이 수배로 증가 했다. 평생을 연마해 온 평정심도 흑금 단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휴가에 대한 보상도 염두에 두겠습 니다.”

“신경 안 써도 돼, 나 그렇게 쪼잔한 사람아냐.”

어떻게 보긴, 굉장히 쪼잔한 놈이지.

그럼에도 태연히 아니라고 발뺌을 하 고 있었다. 가주들은 속이 뒤집히다 못 해, 폭발하는 심경이었다. 이대로 있다 가는 정말 사고 칠 것 같다. 그러나 대 가리가 잘린 켄신의 최후가 상기되었 다.

“조만간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지?”

“……그렇습니다.”

일정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묻 는다면 일정을 만들라는 의미가 되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가주들이다. 울화통이 터지지만 힘이 깡패였다. 힘없는 설움을 몸소 체 득하고 있었다.

“우리 대통령께선 영덕 대게밖에 안 먹거든.”

“……(씨발)…… 대령하겠습니다.”

대게가 먹고 싶으면 영덕에 가서 처 먹으라고 말을 하고 싶으나 그들로서는 입도 뱅끗 못했다. 지금 즉시 영덕에 대 게를 주문해야 할 처지였다.

“별거 아닌데, 우리 대통령께선 소 한 마리를 아침으로 뚝딱 해치우신다.”

“혹시 소 한 마리라는 게 부위별로 얘 기하시는 겁니까?”

“우리 대통령님께선 쪼잔한 걸 싫어 하셔.”

“……고려해서 준비하겠습니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아침에 일어나 자마자 구워 먹는 위인이 금강문주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면 안 되었다. 정우는 정상회담에서 음식 부족으로 인 해 얼굴 붉히지 않도록, 미리 언질을 해 준 것이다.

“대접이 시원찮으면, 알지?”

“국빈으로 대접을 하겠습니다.”

영빈관에서 총리 사망하는 걸 목도(目 暗)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해야 했 다. 성질 급한 대통령이라는 것도 고려 되었다.

“이번 기회에 과거사 청사하고, 한일 간에 진득한 우호를 다져 보자고. 오랜 다툼을 우리 대에서 아름답게 매조지하 는 거야. 좋지?”

“역사적인 날을 함께하게 되어 영광

입니다.”

한일 양국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협의가 되기를 바란다는 정우의 발언에 다들 썩은 똥을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 도 그럴 것이 여태 부정했던 진실을 인 정하고, 대외적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 그분인가,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 잡을 때까지 해야 한다.

“아, 용신가를 잊을 뻔했네.”

정우의 시선이 회의 탁자의 맨 끝에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용신가의 장로, 시부토를 향했다. 그는 용신가를 대표 하는 팔대가신의 일인으로 총관 다음으 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 생사 새옹지마라더니, 가주와 총관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용신가의 존재감은 하루아침에 바닥을 치고 말았다.

“너 이름이 뭐냐?”

“……시부토입니다.”

“그래, 시부토. 알지?”

“……예, 말씀하십시오!”

용신가에서도 대쪽 같은 인물로 평가 를 받은 시부토 장로다. 부러진다 해도 굽히지 않을 것 같았던 그도 괴물 앞에 서는 성향을 가렸다. 평소와 달리 말까 지 더듬고 있어, 동일인물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우리 앞에서도 뻗대는 위인이 살려고 발악을 하는군.’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을 줄이야, 인생 헛살았어.’

가신이 대단하다 해도 12지신가의 가 주와 비교하면 격이 떨어진다. 그럼에 도 고개 뻣뻣이 들고 다녔다는 건, 용신 가의 힘에 기댔다는 의미가 되었다.

“가주하고 총관이 죽어서 안됐어, 내 가 그때 참았어야 했는데. 이놈의 성질 머리가 언제 터질지 몰라서 큰일이야.”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속 성질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는 협박을 주저하지 않았다. 용신가든, 용대가리든 정우에게는 단어 한끝 차이 에 불과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런 거니, 맘에담아두진마.”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담아 두기에는 대상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이다. 용신가를 지키기 위 해서는 그의 눈 밖에 나지 말아야 했다. 행여나 그가 독한 마음을 먹기라도 하 는 날엔 용신가는 주춧돌 하나 남지 않 을 것이다.

“여하튼 불쌍해서 어쩌누. 가주도 총 관도 없는 용신가는 쭉정이잖아. 다들 용신가를 잘 보살펴 주도록 해. 나야 상 관없는 한국 사람이니 도와줄 수도 없 잖아.”

“……최대한 신경을 쓰겠습니다.”

협력하라는 말처럼 들리나, 실상은 달 랐다. 가주도 총관도 없는 용신가의 의 미를 되새겨 봐야 했다. 쭉정이나 다름 없는 용신가는 이제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가 되었다. 시부토는 괴물의 사악 한 의도에 치가 떨렸지만, 현재로선 자 비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살려면 바짝 엎드려야 했다.

‘그걸로는 부족해.’

시부토는 결심을 굳혔다. 다른 장로들 의 의견을 수렴하려다가 늦어 버리면, 영영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 이다.

“용신가는 단주님의 수족이 되겠습니 다.”

“꼬붕이 되겠다고?”

수족과 꼬붕, 의미는 비슷하나 받아들 여지는 감정은 천지차이였다. 강직했던 시부토 장로라면 응당 노화를 터뜨려야 마땅하건만, 기대치가 사라져 버렸다.

“가문의 간절한 의지입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가주들은 속으로 혀를 차야 했다. 일 본 무가의 자존심인 용신가의 장로란 자가 제 스스로 꼬붕을 자처해 버렸다. 문제는 이리되자 용신가를 건드리기가 애매해졌다.

“시부토 장로, 기대가 커.”

“최선을 다해 충심을 보이겠습니다.”

용신가를 날로 드신 정우는 이쯤에서 회의를 끝냈다. 네즈미가 연합이었던 가문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라고 했 다. 미심쩍은 듯 돌아서는 그들이지만, 그뿐이었다. 감히 명을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만이 많아 보이네.”

생라면을 공유해 주기를 바랐던 네즈 미가 연합이었다. 저들을 멀쩡히 돌려 보내고, 자신들만 금제를 가하는 건 불 합리했다. 공평하게 구타를 한 후, 생라 면을 잔뜩 주입해야 이치에 합당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괴물의 비위를 거슬렀 다가는 본인들만 생라면을 먹을 수도 있었다.

“금제를 가하시는 편이 아무래도 좋

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앞에서는 굽혀 도 뒤로는 딴 주머니를 찰 수도 있습니 다.”

“그러니 너희들이 잘 감시해야지.”

감시의 역할까지 떠맡아야 하는 현실 에 그들은 절망했다. 불합리함의 끝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일 만 더 늘어나고 있어 입을 봉해야 할 처 지였다.

“쟤들은 아직 모르잖아. 아마 내가 너 희들을 총애한다고 오해하고 있겠지. 오해가 커져서 충심의 발로가 잘못되면 안 되잖아.”

그들은 흑금단주의 계략에 경악을 금 치 못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심계였다. 사악함에서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자다. 지상 최강의 악마이자, 악당이었다. 단 순히 정의를 부르짖지 않았다. 본인이 원하는 판으로 끌고 왔다.

“보상은 알아서 하고, 난 이만 간다.”

“ 가신다고요?”

“가야지, 휴가 끝나가는데.”

“아직 정리가 안 된 걸로 아는데요.”

“그거야 너희들 사정이지.”

괴물은 악마 같은 심기분만 아니라 거대한 무책임까지 가지고 있었다. 너 희들이 알아서 해라. 단, 맘에 안 들면 엎어 버리겠다는.

‘하나보다는둘이 낫지.’

12지신가는 둘로 나뉘어 경쟁을 할 테고, 적당히 보상을 해 주면 알아서 더 잘하게 될 거다. 무엇보다 서로 간의 감 시역할을 하게 되니 배신의 염려가 줄 어든다. 차후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어 찌 될지 모르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내가 다 할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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