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공약 ⑵
“인당 훈련비가 2억이니, 3000억이면 층분하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타 식비와 숙박비는 따로 계산된 다는 것도 알고 있도록.”
-당연하지요.
이극이 맞장구를 치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망연해 있었다. 눈 뜨고 코 베이 고 있는 중이다. 3천억에 육박하는 돈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놀라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 어 누가 보면 3천만 원을 언급하는 줄 알겠다. 그러나 따져 보면 액수가 크다 고 보긴 어렵다. 무인을 양성해 일정한 경지에 오르게 하기까지 최소 10억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싸게 먹힌 것이다.
“난 할 말 다 했으니까 의견 있으면 말해 봐. 들어 보고 내 맘대로 할 테니 까.”
-없습니다.
“좋아, 각자 일 보도록. 해산.”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이극과 팽세기의 아부는 극에 달해 있었다. 물론 오대세가의 수뇌부도 의 견은 없었다. 낸다고 해도 자기 맘대로 한다고 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나 잘하 라는 의미다.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사람 가지고 노는 재주가 탁월하구 나.”
“풀어 주면 한도 끝도 없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긴 해.”
“곧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의 시작이 니, 우리도 전략을 짜 보죠.”
대선과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금 강무적당이 제 역할을 하고, 미래를 계 획하려면 대선과 총선에서 과반 이상의 득표를 해야 했다.
“난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다.”
“그러기 위해선 전략을 잘 짜야 합니 다. 어중간한 의석수와 득표율로는 이 도 저도 아닌 상황이 발생하거든요.”
정치는 무력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힘은 숫자가 가진다. 득표 율과 의석수를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과반이 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정치적 타협을 통한 협상이 이루어진다. 목적 을 완수하기 위한 시간이 길어질 수밖 에 없다.
“거짓말도 싫다.”
“소신 의견은 아주 훌륭합니다.”
당의 목적과 본인의 의사가 반대됐을 때가 많다. 정당은 이익 집단이다.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표출하기 어려우니, 정당을 통해 본인들의 의사를 피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의견 충돌 이 발생한다. 당의 목적을 따를 것이냐, 소신을 지킬 것이냐? 갈등하는 경우도 많다. 대다수는 당의 의견에 따라 본인 의 주장을 포기하고 타협하겠지만.
“우리 당은 문주님의 의견을 우선순 위에 둘 겁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기본기와 결단력,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본하면나지, 안 그러냐?”
“그렇다 치고, 절대 사익을 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 보고 정치한다냐?”
정우는 정당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금강무적당은 공정한 경쟁과 상생을 통해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걸 주목 적으로 했다. 개인과 집단의 목적에 부 합하는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금강문 과 연관된 기업에 대한 특혜도 일절 없 다. 기업은 공정 경쟁을 기반으로 하며, 국가 간의 규제에 관해서만 융통성을 발휘한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도록 하죠.”
“내가 바로 그걸 원한다, 이놈아!”
“그러고 보면 문주님과 저는 통하는 게 많네요.”
“그러면 내 사위 하라니까.”
정우와 문주는 죽이 잘 맞았다. 둘이 숙덕거리다가 실없이 웃기도 하며, 대 충 지껄이고 있었다.
김 총관은 묵묵히 들으며 답답해졌다. 홀러들어선 안 되었다. 이 안에 있는 내 용을 실제 활용이 되도록 방안을 짜야 했다. 실무 담당이라 죽을 맛이다.
‘한바탕 난리가 나겠네.’
말만 들어 보면 유토피아다. 문제는 정우와 문주가 말하는 세상을 만들려면 부딪쳐야 할 과제가 산더미라는 것이다. 가진 자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어떤 식으로든 반발하게 될 테고, 분란을 자초하는 격이었다.
“엄청난 진통이 있을 거예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나 이호극이야, 내가 감당 못 할 일 은 없어!”
정우도 모르는 네?가 아니다. 전생에서 도 작금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 력하다, 진강백 때문에 허사로 끝났다. 대문파와 세가만 잘 먹고, 잘사는 세상 을 부수려고 했을 뿐인데, 그걸 못 하게 했다.
“그보다, 어쩔 거냐?”
“ 뭘요?”
“하라 말이다. 솔직히 무섭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까 봐.”
“그 정도예요?”
이호극은 절대고수의 영역을 초월했 다. 내외기의 컨트롤이 극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컨트롤이 어렵다 니, 하라의 화술이 신화경이 이르렀다 는 반증이다.
“네가당해 보지 않아서 그래.”
“재미는 있던데요.”
“강 피디, 그 웬수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개고생 중이라고.”
“그래도 인기는 팍팍! 올려 주잖아 요.”
하지 좀 말라고 그리 닦달을 하고 있 는데, 출연하다 보면 강 피디의 의지대 로 흘러갔다. 이호극은 매번 상황이 끝 나고 나서야 당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 다. 그 와중에 하라의 투입은 설상가상 의 끝을 보여 주었다.
“대선 레이스 기간엔 예능을 하지 않 아도 되니 좀만 참으세요.”
“인생 편하게 살려면 하라 말고 내 딸
같이 순종적인 여인을 만나야 하는 거 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거죠.”
“10년 다 되어 간다.”
“그 나이 때는 하루 건너 감정이 달라 지기도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정우는 걱정이 되었다. 약속은 신뢰의 문제다. 10년을 기다린 효린의 정성을 외면할 수 있을지, 당장 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괜한 소릴 했네.’
이제 와 나가리(차方%)야, 라고 하면 효린이의 반응은?
추욱!
안색은 초췌하고, 눈 밑의 다크서클은 턱과 키스하기 일보 직전이고, 입술은 퉁퉁 부르터 있었다. 사람이 아닌, 좀 있으면 미라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심이 가득했다. 넓이 128에 달 하는 어깨도 축! 처져 순간 어좁이처럼 보였다.
하아아아!
한숨에는 인생의 고난과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래 봤자 고작 열아홈 살, 그 나이에 희로애락을 전부 겪어 본 표정 이다.
“야!”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철수는 신속히 보법을 펼쳤다.
추격자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급히 속도를 높였다. 황룡의 걸음걸이[黃龍步] 를 극성으로 운용, 따라잡히지 않기 위 해 안간힘을 썼다.
쌔애행!
추격녀(追擊女), 수연.
“아놔, 이씨!”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며칠 전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 철수다. 매일 옆에 착 달라붙어 재잘거렸던 녀석이 갑자기 거리를 두니 이상했다. 연유를 물으면 답을 하지 않고 강의실을 나가 버렸다. 기분 나브게 사람을 자꾸 피하니까 오 기가 발동했다. 사람을 궁금하게 했으 면 책임을 져야지.
‘인내력 테스트를 하시겠다?’
오늘은 반드시 그 연유를 물어보려고 했건만, 또 도망을 쳤다.
“너, 잡히면 죽어!”
"할 말 없으니까 따라오지 마.”
극성에 다다른 황룡보는 상당했다. 눈 으로 보이는 영역을 벗어나 버렸다. 바 람처럼 공간을 직선으로 뚫어 버리며 나아갔다. 하나 추격하는 수연의 보신 은 정우의 독문보신인 현현보다. 감히 그 앞에서 빠름을 논할 보법은 많지 않 았다.
슈아아아앙!
속도가 점점 더 가일층되더니 빛살이 되었다. 두 남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에 긴박감이 형성되었다. 잡히지 않으 려는 철수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연하고 거리를 벌 리지 못했다.
후아아앙
속도가 빨라질수록 후폭풍 역시 강해 진다.
학교를 종횡무진하는 수연과 철수로 인해 모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철수 와 수연도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 하고 있었고, 학생들도 능력을 가지고 있어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럼에도 학생 들의 시선이 좋지 않았다.
“잘들논다.”
“쯧쯧! 사랑싸움을 꼭 사람들 많은 데 서 보란듯이 해야 하는 거야?”
“자랑하고 싶은 거지!”
“부럽다, 난 외롭다!”
눈꼴 시리다는 반응이 대다수이지만, 부러운 시선도 꽤 있었다. 한편으론 놀 라움을 금치 못하는 부류도 존재했다.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정령학과 의 투 톱으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이렇 게까지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발군의 실력이구나.’
‘전보다 더 강해졌어.’
다른 학과의 같은 학년 중에서도 10 위권 내에 드는 학생들은 경계했다. 그 들로서는 MT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는 강력한 장애물이었다. 반드시 넘어서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쌔애애행!
수연과 철수의 술래잡기는 유니크 전 문학교의 뒷동산까지 이어졌다.
철수는 수연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특히 속도에 관해서는 자신이 있었기에 놀람이 컸다.
결국
탁
철수의 발걸음이 나가기 전, 자전거 바퀴에 나뭇가지가 제대로 걸린 것처럼 수연의 발이 끼어들었다. 피하고 자시 고 할 사이도 없이 다리가 걸리면서 철 수는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쿠다다다당!
바닥을 야멸차게 굴러 버린 철수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끝자락까지 나아가 서 멈춰 선 철수는 고통보다 속도에서 도 수연에게 졌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야,왜 자꾸 나 피해?”
“내가 언제?”
“진짜 말 안 할 거야? 그럼 두 번 다 시안본다.”
“알았어.”
수연은 강하게 나가면 철수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술 털어놓을 줄 알았 다. 그런 철수가 반기를 들었다. 살짝 기분이 상하면서 걱정도 되었다.
‘얘가 대체 왜 이래? 뭐 잘못 먹었 나?’
포기하겠다니, 수연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맘에 들지도 않았는데 달라붙 어서 귀찮았다. 상쾌한 발걸음으로 돌 아서서 내 갈 길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수연은 돌아서지 못했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말해 어서?”
“내가 너무부족해서 미안해.”
하긴, 나에 비하면 부족하긴 하지, 스 펙 면에서도.
항상 자신감이 넘쳤던 철수의 시무룩 함은 수연에게 생소하게 다가왔다. 마 치 상처받은 햄스터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 했다.
“괜찮아, 오빠는 원래 그래. 나도 만 날 져.”
수연은 철수의 기가 죽은 게 오빠 때 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전 의욕을 불태우며 몇 번이고 계속 도전했었다. 그때마다 지기는 했어도, 요 며칠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런 식으로 기가 죽을 녀석이 아니기 에 더더욱그렇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그게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이라 서.”
“중성으로 만들어 줄까?”
“?아냐!”
수연의 집요하고 과격한 추궁에 철수 는 자초지종을 토로했다. 말하지 않았 다가는 목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 목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 대는데, 철수는 눈 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본능적으 로 살기 위해서 수연의 손목을 잡았지 만, 악력이 어마어마하다.
“너하고 사귀고 싶었는데, 지키지 못 해서 미안해.”
“됐어.”
연유를 파악한 수연은 답답함이 밀려 왔다.
‘철수를 가지고 놀았네.’
철수는 분명 뛰어난 무인이자 유니크 다. 동년배 중에서는 적수가 많지 않았 다. 수연도 최대한 진심으로 싸워야만 하는 호적수다.
그러나 오빠에게는 일초지적도 되지
않았다.
-오늘은 한 팔을 쓰지 않으마.
-오늘은 두 팔을 쓰지 않으마.
-오늘은 왼발도 쓰지 않으마.
-오늘은 손발을 쓰지 않으마.
희망 고문이 따로 없었다. 하나씩 금 제를 하고도 철수를 일격혼절(一擊昏絶) 시켜 버렸다. 도전할 때마다 금제를 거 니까, 철수는 기회를 주는 줄 알고 얼씨 구나 덤볐겠지. 오빠가 허락해 주기 위 해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 다.
철수로선 최선을 다할 동기 부여가 되었다. 선배가 이어 주기 위해 이토록 물심양면으로 밀어주는데도, 통과를 못 한다면 본인이 자격이 되지 않음을 인 정하는 꼴이다.
-오늘은 내력의 50%만 쓰마.
-오늘은 내력의 40%만 쓰마.
-오늘은 내력의 30%만 쓰마.
"오늘은 내력의 10%만 쓰마.
철수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의 연속
이었다. 손발을 쓰지 않고, 내력까지 10% 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도전하 고 깨어나면 길바닥에 누워 멍하니 하 늘을 보고 있어야 했다. 뭘 어떻게 했는 지 알아야 반격의 실마리라도 찾지, 기 억도 나지 않았다.
하물며 선배는 마법학과였다. 본인의 속성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엄청난 양 보를 받았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다. 그 이후로 심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도저 히 수연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약속이니 하는 수 없지.
-도전은 아름다운 거다.
-난 열려 있으니, 언제든 와도 좋다.
철수도 차마 봐 달라곤 하지 못했다. 사내대장부로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다.
하아아!
수연은 한숨이 절로 홀러나왔다.
‘답 없네.’
겉으론 오빠가 많이 양보한 것처럼 보여도, 수연이 보기엔 희망 고문이다. 일반적인 고수라면 사지를 금제하고, 내력의 9할을 쓰지 않으면 전력의 대부 분을 잃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 오빠 는 일반적인 범주의 고수가 아니다. 오 빠의 내공 10%면 철수가 본원진기를 모조리 다 소모해도 견줄까 말까다. 설 령 같은 급의 내공이라고 해도 오빠의 순도 높은 공력이 훨씬 강력하다.
‘애초에 양보할 마음도 없었다고.’
철수만 불쌍하게 되었다. 본인의 부족 함에 자괴감에 빠졌다. 정령학과의 잘 나가는 유망주 하나를 오빠가 반병신으 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저 덩치로 쭈그 려 앉아 길바닥에 그림이나 그리고 있 는 게 정상처럼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선배님이 그러시더라.”
“오빠가 뭐랬는데?”
“네 의사를 존중하시겠데.”
“내 의사…… 설마?”
불길한 기분이 스쳤다. 설마가 현실이 되고 있었다. 오빠는 명시한 것이다. 본 인의 일격을 막아 내야 교제를 허락하 겠다고.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 스탠더 드(기준)가 되어 버렸다. 내 발등을 내 가 찍은 격이 되고 말았다.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