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버스 빌런-443화 (443/500)

제 7장

공약 ⑴

둥! 둥! 둥!

고아하고 청아한 종소리와 은은하게 퍼지는 향내가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 힌다. 천 년의 풍파를 겪어 내며 복원과 재건의 흔적들이 절의 곳곳에 남아 있 었다. 온전하지 않더라도 역사를 이겨 낸 저력이 흘러나온다.

태산북두(泰山北斗), 천년소림(天年少 林).

중화의 자부심이 묻어 나오는 웅후한 필체가 인상적이다. 작금에 와서 소림 은 관광 명소로 자리를 잡아 하루에도 수천 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었다.

개방된 공간이 많아지면서 소림이 과 거와는 달라졌다는 평이 들린다. 속세 에 물들어 세속적으로 변질되었다는 비 판의 목소리가 있다.

하나, 보이는 이미지에 불과했다.

소림은 전부를 내보이지 않았다. 드러 난 부분은 조족지혈이다. 산문에서부터 백의전과 추보당을 비롯한 건물들만으 로 소림을 판단해선 안 되었다.

방장실.

소림의 방장이 집무를 보는 장소에 범상치 않은 면면을 지닌 자들이 앉아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그야말로 일문의 수장으로 불리기에 아깝지 않았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오랜만의 출타라 오히려 즐겁습니 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빈승은 고마울 따름이오.”

“방장께선 날이 갈수록 신수가 훤해 지십시다.”

형식적이고 고리타분한 대화였다. 빨 리빨리에 익숙해진 신세대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말에 무게에 있고, 단어 에 기품이 실려 있다.

“이번 기회에 종종 모이는 것이 어떻 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소림의 빙장을 중심으로 모인 자들,

구파의 수장들이다.

여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 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사 안이 가볍지 않음을 증명한다. 하물며 자주 모임을 갖자는 말에 모두가 동의 했다. 무림맹이 결성되진 않았지만, 구 파일방의 수장이 한자리에 있다면 맹을 결성한 거나 다름없다.

“산서성은 평온합니까'?”

“욕심을 버리니, 사고는 따르지 않는 법이지요.”

청성파의 장문, 천룡진인의 물음에는 다분히 의도가 담겨 있다.

산서성은 현재 하북팽가와 소림이 양 분한 상태이지만, 실제적인 지배력은 소림이 주도했다. 소림이 하남을 넘어 산서까지 집어삼킨 게 아니냐는 추궁으 로 보이나, 사천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 시키고 싶은 청성의 욕망이 더 컸다.

오대세가가 현재 많이 약화되었다. 사 천뿐만 아니라 다른 성에 대한 구파일 방의 지배력을 높일 시기라는 주장이었 다.

“신중해야 할 사안이오.”

“지금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 니까?”

“비록 오대세가가 과거에 비해 쇠약 해졌다곤 하나, 명분이 없소이다.”

“강시와 독인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팽배합니다.”

“소문일 분, 증거가 없지 않소.”

소림 방장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청성 의 천룡진인과 아미의 정혜 사태는 마 땅치 않아 했다. 당문은 두 문파에 있어 서 골치 아픈 곳이다. 독을 사용하기에 건드리기가 껄끄럽다. 이번 기회를 살 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다.

“청성과 아미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 니오. 하나 오대세가는 우리와 달리 혈 연으로 맺어졌소.”

“그렇다 해도 우리가 뜻을 모은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 아닙니까.”

전체 전력으로 보면 구파일방이 앞선 다. 그러나 대통합을 이룬 오대세가를 가벼이 여길 수도 없다. 만약 아미파와 청성파가 사천당가를 공격한다면 오대 세가 전체가 나서게 될 테고, 구파일방 도 손 놓고 있지 못한다.

결국 엄청난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 다.

소림 방장은 전쟁을 우려했다. 한데, 의도치 않게 산서성에 대한 지배력이 강해지면서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아미 파와 청성파의 의지를 마냥 반대하기도 껄끄러웠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개방의 개왕이 엄 청난 정보를 가지고 왔다.

“오대세가의 내분은 단순하지 않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개왕은 소림의 방장보다 연배가 높았 다. 소림의 최고수로 꼽히는 불성(佛聖) 과 연배가 비슷했다. 이 중에 누구도 그 를 하대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흑룡성의 배후가 존재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네.”

“배후라니요?”

“흑룡성주가 마공을 익혔다더군.”

“확실한 정보입니까?”

“조사 중이긴 한데, 일정 부분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 사파를 규합했다곤 해 도 찌꺼기에 불과하네. 그토록 빠른 시 간 안에 백도 무림을 위협했다는 점이 의문일 수밖에. 흑룡성주 혼자서 가능 한 일이겠는가?”

“위협이라니요, 그깟 놈들은 본 문만 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개왕의 설명에 아까와는 분위기가 달 라졌다. 그 말 그대로 혹룡성의 배후에 마공을 익힌 제3 세력이 있다면 자칫 어부지리를 당할 수 있었다. 더욱이 마 공과 연관된 집단은 일반적인 무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대 방주님의 말씀대로 이에 대한 조사가 먼저 이루어지고 난 후에 따져 봐야 할 사안이라 봅니다.”

설전이 오고 갔지만, 결과적으로 소림 의 영향력을 무시하진 않았다. 또한 개 방까지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미파와 청성파는 강하게 주장하지 못한 채 물러섰다. 하나, 마음속에 자리 한 욕망은 시간을 재촉했다.

‘미적거리기는.’

‘아쉬울 게 없으니 그렇겠지.’

오대세가는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순혈주의를 포기했다. 방계와 중소 무 문을 가리지 않고 인력을 수급하고 있 었다. 어중이떠중이라고 해도, 가문의 절기를 전수받게 된다면 차후에는 더 어려운 상황이 되리라 본다.

‘어렵구나.’

방장은 저들의 의중을 알지만, 자중지 란을 경계해야 했다. 한순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커다란 재앙을 불러올 수 있 으니 말이다.

‘마치 누군가의 계산대로 흘러가는 것 같구나.’

육신통(A神通)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어도, 방장은 소림을 대표하는 3인 의 절대고수 중 하나다. 특히 미래를 견 지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금강문의 총관실.

정우와 금강문주, 김 총관이 양자 통 신으로 연결한 영상을 통해 회의를 하 고 있었다.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 회 의다. 영상에는 오대세가의 수뇌부가 자리했다. 일방적인 소집 명령에 영상 속의 인물들은 안색이 어두웠다.

“다들 표정들이 왜 그래? 오랜만에 보 는데 인상이 X같잖아.”

본색을 드러낸 정우는 반말을 서슴지 않았다. 너희는 내 노예라는 인식을 확 실하게 각인시켰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주인 앞에서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면, 삼시 세 끼 간식까지 똥만 처먹을 수도 있다는 엄포가 담긴다.

“잠깐만 기다려 봐.”

아공간을 연 정우는 소주잔 크기의 투명한 통을 꺼냈다. 통 안에는 미세한 크기의 벌레가 자리하고 있는데, 꿈틀 거리고 있었다.

톡톡!

검지로 통을 건드리며 벌레를 괴롭혔 다. 칠 때마다 왜 잘 자고 있는데 깨우 느냐며, 벌레가 아우성을 친다.

크아아악!

벌레의 심기 불편은 고스란히 스크린 에 투영되었다.

오대세가의 수장들은 신음을 내지르 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상상을 불허 하는 고통에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지 만, 무용지물이다. 의지를 벗어나는 극 심한 고통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더니 게 거품을 물었다.

씨익!

정우가 성능 테스트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문주와 총관을 보았다. 반사적 으로 돌아오는 표정은 질려 있었다.

“효과 죽이죠?”

“……시험해 본 거냐?”

“뭐, 그렇다고 해 두지요.”

“그냥 해 본 거구나.”

노력의 산물이자 실험체인 벌레의 효 과를 자랑하기 위해서 펼쳐 봤다.

정우는 이미 효과를 알고 있었다. 벌

레의 능력도 모르고 사용할 만큼 어리 석지 않았다. 각고의 실험을 통해서 완 성되었으니,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 다. 그만큼 완성도 면에서 고독 중의 고 독, 그야말로 왕고독이었다.

“나도 나지만, 넌 정말 징그럽구나.”

“전 그저 본 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 는 거거든요.”

내가 잘돼야 금강문도 잘된다는, 지극 히 자기중심적인 발언이었다. 욕먹기 딱 좋은 거만한 태도이지만, 정우의 말 이 틀리진 않았다.

“공치사를 해 달라는 게냐?”

“안 해주는 것보다는 낫지요.”

“뻔뻔하기는.”

“문주님은 제 모토입니다.”

정우와 이호극이 웃고 떠들지만, 김 총관은 질린 기색이 완연했다.

이 인간들이 정상은 아니구나 싶었지 만, 이 정도로 미친놈들일 줄은 몰랐다. 그런 두 인간을 겁 없이 건드린 오대세 가가 불쌍했다. 저들은 절대 정우의 손 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딱 봐 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두 팔을 뒤로 묶어 수갑을 채워 놓고 젓가락질해 보 라는 격이다.

“어이, 빨랑 안 일어나? 이건 7단계 중 1단계에 불과하다고.”

...I

“좀 더 인내심을 발휘하라니까.”

영상 속의 인물들, 오대세가의 핵심 수뇌부는 기겁했다. 고통은 고통대로 다 받으면서도 기절이 안 된다. 기절하 고 싶어도 육신의 통제를 벗어났다. 끝 없는 지옥무저갱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고작 7단계 중 1단계일 분이 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을 건드렸는지, 뼈저리게 체 감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괴물 같은!’

‘어쩌자고, 이런 자를!’

당문의 암제와 가주, 독봉의 충격은 더 컸다.

그들도 나름 독과 고독에 관해서는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부했거늘, 일반적 인 상리를 벗어났다. 고독도 문제이지 만, 금제 자체가 범상치 않았다. 무언가 를 획책하려고 하면 자체적으% 방어를 한다. 인공지능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금제가 똑똑해지고 있어 해체가 불가능 하다. 하물며 거리를 무시하고 고독이 발동했다.

“그래도 넌 신경을 써 준 거다.”

-감사합니다! 단주님! 층성을 바치겠 습니다!

팽세기와 이극은 온전했다. 벌레의 영 향을 받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 서도 정우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거든.’

정우는 일부러 보여 주었다.

나에게 저항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 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해. 행여나 배신 하려고 한다면 최악의 고통을 선사하리 라는 공포를 새겼다. 짐작과 현실은 엄 연히 달랐다. 이제 저들은 금강문의 수 족이 되어 움직일 것이다.

“서로 간의 오해로 다소의 충돌이 있 었지만, 합심해서 잘 이끌어 가 보자 고.”

-하명만 내려 주십시오

팽세기와 이극은 적극적으로 대답했 다. 다른 세가의 수뇌부보다 정우를 오 랫동안 겪어 본 그들이다.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뻔히 예상이 되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대답이 영 시원치 않네, 2단계로 올

려나 볼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뒤늦게 위험을 깨닫고 대답했다.

“늦었어.”

-……크아아아아악!

여자고 사내고 인정사정없다. 전신의 기력이 빠져나가는 고통과 함께 육신에 서는 배설물까지 토해 내게 된다.

“이런, 모자이크.”

정우는 더러운 장면을 걸러 내기 위 해서 스크린에 모자이크를 걸었다. 다 분히 지저분한 영상이 여과 없이 투영 되었다. 냄새가 나지 않을 거란 걸 알면 서도 문주와 김 총관이 킁킁거리는 걸 보면 시각적인 효과가 상당했다.

“심한데.”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요.”

정우는 딱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 다. 반대의 입장이라면 더욱더 심했을 것이다. 역지사지가 좋은 말이기는 하 나, 현실적으론 불가능했다.

‘고독도 진화형이거든.’

금제분만 아니라 고독도 진화하며 동 화를 일으킨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한 불신과 통수를 정화한다. 시간이 지 날수록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이후에는 층성이 지극히 당 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키우는보람이 있다니까.’

진화하여 어떤 생명체가 될지, 정우는 유리병 안에 담긴 고독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른바 반려충(伴=이었 다. 반려동물 중에서는 곤충이 기르기 딱 좋았다. 집에서 소란스럽다고 성대 를 잘라 낼 필요도 없고, 발정 난다고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서 자 기 자식처럼 여기는 걸 보면 인간의 이 중성이 오진다.

“씻고 오도록.5분 준다. 실시.”

육혼이 엉망이 된 오대세가의 수뇌부 는 그 즉시 튀어 나갔다. 가만히 있다가 또 어떤 봉변이 기다릴지 두려웠다. 처 량하게 변해 버린 처지에 좌절할 시간 조차주어지지 않는다.

5분은 짧았다.

대충 처리를 하고 나온 오대세가의 수뇌부는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 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현실을 인 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흑룡성주에 대한 정보를 홀렸으니, 구파일방도 섣불리 나서진 못할 거야.

아마 시간이 좀 걸리겠지.”

-그러나 강시와 독인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가 어찌 될지는 가늠하기 어렵 습니다.

대화는 정우의 주도 아래, 이극이 장 단을 맞추고 있었다. 강시를 활용하고, 독인을 썼다는 걸 개방이 냄새를 맡았 다. 확실히 전신이 거지들의 집단이라 서 그런지,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혼란 좋지, 무림은 혼란스러워야 제 맛이거든.”

“그렇지요. 무림이 원래 그런 세상 아

닙니까.”

“인구도 많은데, 한 3억 정도는 죽어 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10억 이상입니다. 암요.”

오대세가 수뇌부의 동공은 커질 대로 커졌고, 입은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 괴 물 같은 자라는 건 경험해 봐서 알지만, 상식도 괴물이었다. 일반적인 잣대는 어불성설이다. 스케일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7} 대륙에 와서 벌인 살행의 수만 해도 엄청났다. 오대세가의 무인 중에 반수 이상이 그의 손에 아작 나 버 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 정도의 수 는 아무것도 아니 었다.

“농담 한번 한 걸 가지고 얼빠지기는, 날 살인마로 보는 거라면 아주 곤란해.”

-저는 농담인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극, 네가수고가 많다.”

-단주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일 따름 입니다.

사람 가지고 노는 능력이 신의 영영 에 도달했다.

오대세가의 수뇌부들 중 암제는 보통 이 아니거늘,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오락가락했다. 누가 보면 치매에 걸린 노인네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내가 뽑아놓은 녀석들 있지?”

_예.

“이쪽으로 연수 보내야겠다.”

-알겠습니다.

“연수 비용은 각출인 거 알지?”

?물론입니다.

정우는 돌아오기 전 각 세가에 들러 방계와 중소 무문에서 쓸 만한 놈들을 선별해 놓았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고, 재능이 조금이라도 보이고, 반골 기질 이 있는 놈들로 골라 놨다.

오대세가의 대통합을 이룬 후, 대호법 이 되어 내린 첫 명령이었다. 300을 선 별해 놓고, 적당히 가르침을 내려놓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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