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암제(暗帝) ⑴
오대세가의 핵심 멤버는 날이 밝는 대로 당문을 제외하고 각 성으로 돌아 갔다.
그 전에 금한령에 의해서 중지되었던 대한그룹과 연계된 모든 유통 산업을 원위치 시키기로 협정을 맺었다. 불합 리한 결정이 아닌, 객관적이면서도 공 정한 처우였다. 오대세가와 연결된 정 관계 인사들이 꽤 되었다. 관치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중국은 당만 구워삶으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접니다.”
■빨리도 전화한다.
“이제라도 했으면 된 거죠.”
-해결은 된 게냐?
유 회장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고 있 는 다른 사업에 비해 중국과의 교역에 서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언론 매 체를 통해서는 아니라고 반박하지만, 실제적으로 통상 협정에서 압력을 받아 수출이 난항이었다.
중국과의 교역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우리나라도 교역을 아예 끊어 버리자고 감정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실제로 중 국과의 무역 중단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미국 다음으로 막대한 물량의 교역 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굴욕적인 협상 이 아닌 한, 최대한 실리를 택해야 했 다.
물론 차후에도 막무가내로 나온다면 강력한 제재도 필요는 했다. 외교는 끌 려다니기만 해선 한도 끝도 없다. 국제 사회에 만연한 한국이 호구라는 인식을 바꾸어 놓아야 했다.
“당연하죠, 저만 믿으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설득한 거죠. 덤으로 사천성, 산둥성, 안휘성도 얻었어요.
-정말로?
“앞으로 장사하는 데 지장은 없을 겁 니다.”
전화기 상 유 회장의 목소리는 꽤나 격앙되었다.
억지를 부리고 있는 중국과의 교역
전쟁이 이토록 간단히 해결될 줄은 몰 랐다. 하물며 하북성분만 아니라, 3개의 성까지 덤으로 얻었단다. 수완이 좋은 거야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난 놈이었 다. 되는 놈은 확실히 뭘 해도 된다.
유 회장은 몹시 궁금했다.
일단 되놈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상식적인 선에서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굉장히 강압적인 데다가, 국력을 중요 시 했다. 자신들보다 강하면 굽실거리 고, 약하면 알력 행사도 서슴지 않는다.
-말로 설득이 될 놈들이 아닐 텐데, 도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게냐?
“기어오르기에 살짝 밟아 줬죠.”
기어? 밟아?
한 기어 6단쯤 을렸냐?
-오대세가를?
“이제 오대세가도 제 겁니다.”
-……?
해외여행만 하면 다 자기 거라니, 유 회장은 할 말을 잃었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 땅에 깃발 꽂으면 자기 땅이 된 것과 비슷하려나.
중국에서 큰일을 하고 있다는 건 하 라를 통해서 듣고는 있었지만 모대세가 를 집어삼킬 줄이야. 오대세가는 구파 일방을 제외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 사하는 거대 세력이었다. 중국의 삼분 의 일을 먹어 치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굉장한 일을 하고서도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일본의 네즈미가를 먹 어 치웠다고 했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 이 밀려왔다. 스케일이 커져도 너무 커 지고 있었다.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지나치게 잘되고 있었다. 인생은 성공 의 단맛만 있지 않았다. 실패의 쓴맛도 있었다.
-일을 과도하게 벌이는 거 아니냐?
“순리를 따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
으셔도 됩니다.
-너 잘못되면 하라를 어떻게 보라는 거냐?
“절 믿으세요. 하라는 행복할 겁니 다.”
?홍, 잘난 체는.
정우는 유 회장의 우려를 고맙게 받 아들였다.
전생의 삶 동안 누군가의 걱정을 받 아 본 기억이 없었다. 무를 위해 태어난 천하무적의 절대고수에게 근심은 가당 치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동정한다고 날을 세웠을 수도 있었다. 이제야 걱정 과 동정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하라가 요즘 금강문주에게 얼마나 시달리는 줄 아느냐? 안쓰러워서 못 보 겠구나.
“아닐걸요. 그리고 그게 요즘 트렌드 예요.”
-땅바닥을 마구 구르는데 트렌드라니, 내가 늙었다고 아무것도 모를 줄 아느 냐!
유 회장은 손녀가 몸을 망가뜨리면서 까지 방송을 하는 게 맘에 걸렸다. 일전 의 실패로 인해서 상심이 컸는지, 막나 가고 있었다.
“하긴, 저의 하이개그에 익숙하시니 성에 차시진 않겠죠.”
-……뭔 개그!
땅바닥을 뚫고 들어갈 지하개그가 어 째서 하이개= 둔갑하는 건지.
정우하고 대화를 하고 있으면 젊어지 기보다는 노화가 촉진되는 기분이다. 그만큼 시대를 역행하다 못 해, 고립화 시켰다.
“제가 오랜만에 귀를 정화시켜 드리 겠습니다.”
-시끄럽다, 헛소리할 거면 이만 끊는 다.
시동을 걸기 위해 목을 풀었던 정우 는 유 회장의 단호한 발언에 미간을 찌 푸렸다. 해외 출장으로 그간 풀지 못했 던 하이개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흔 치 않은 기회를 주려고 했거늘, 원천 봉 쇄해 버렸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급박한 세태 속 넘 치는 풍자와 해악을 담고 있으니 반드 시 경청해야 한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 으니, 고갈되는 국민연금처럼 계속 내 야한다.
“들어야 할걸요?”
- 싫다면?
“중국의 유통망부터 끊어 버릴 겁니 다.”
-이놈이 할 소리가 따로 있지, 고작 그거 안 듣는다고 뭘 끊어
“고작이라니요, 저의 노력이 담긴 결 정체이자 순수 창작물입니다. 할아버님 이 창작의 고통을 알기나 해요?”
-창작은 개뿔! 무엇보다 유통망을 끊 으면 나만 손해나는 거 아니다.
“오대세가가 제 거라니까요, 다른 데 로 돌리면 그만이죠.”
정우가 막 가자 유 회장은 똥줄이 탔 다.
중국의 엄청난 유통망을 개그 경청 하나로 날려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왜 실패했냐고 이사들이 물어보면 할 말도 없다. 설마 진짜로 그럴까? 라는 의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우는 충분히 그렇 게 하고도 남을 미친놈이니까.
-……해 보거라.
“그럴 줄 알았어요, 원래는 듣고 싶으 셨죠? 탁월한 선택이세요. 절대 후회하 지 않으실 겁니다.
유 회장은 후회가 밀려왔다.
듣고 싶지 않다. 귀가 썩을 게 분명하 다. 저놈의 썩어 빠진 개그는 들어 주기 가 정말 여의치 않았다.
예상대로 고막 테러를 당하고 말았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래야 하는지 정체성의 혼란까지 왔다. 어디서 이런 되도 않는 개그를 모아 놓았는지, 그야 말로 똥이다. 똥인 줄 알면서도 맛을 봐 야 하다니, 그 심정,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언제까지 변소 개그를 들어야 할지, 첩첩산중이다. 중국에 가더니 이 상한 표절 능력만 상승했다. 차라리 포 맷 그대로 사서 고대로 하는 편이 나았 다.
“우주인을 처음 본 태국인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했는데?
“열라 봉따이!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
-……?
이게 왜 웃기지? 웃어야 하는 건가?
뽕따이가 너 죽었다는 뜻 아닌가?
유 회장은 심각한 정신적 혼란을 겪 었다. 개그도 영화나 드라마처럼 어느 정도는 연출이 필요하고 맥락이 들어맞 아야 한다. 하지만 이놈의 개그에는 맥 락이 아예 없다.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 도 모르겠고, 지 혼자 웃으면 재밌는 건 가?
- 정우야.
“예, 할아버지.”
-그냥 유통망 끊어라.
“왜 그러세요?”
유 회장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굳이 무리해서 중국 시장 을 진출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지금 가 지고 있는 걸로 누리고 살아도 충분했 다.
어둑어둑해진 장원으로 수십의 그림
자가 벽을 넘었다.
사사삭!
장원 담벼락의 높이는 족히 4m에 육 박했다. 보통 사람은 뛰어넘기 어렵다. 그들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가볍게 담 을 넘어 소리 없이 착지했다. 장원 안에 들어선 그림자의 지휘자는 의외로 왜소 한 체격을 지닌 노인이다.
멈칫!
노인은 지시를 하려다가 멈추었다. 짜 놓은 계획을 실행하기 전, 물거품이 되 었음을 확인했다. 아니다 다를까.
번쩍!
빛이 들어오고 어두웠던 공간이 선명 해졌다. 활동이 편한 검은 무복을 입은 자들의 면면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스윽!
노인은 무심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었군.”
“그쪽도 예상하고 있었잖아.”
준비를 하고 기다렸으니, 대비는 당연 했다.
기습 실패에도 노인은 두려운 기색이 라곤 전혀 없다. 무심한 시선 속에 담긴 노안에는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누 대에 걸쳐 이룬 가문의 역사가 자신의 대에서 무너지고 말았으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다.
노인은 분노한 심정과 달리 경거망동 하진 않았다.
그는 체감하고 있었다. 자신을 압박하 고 있는 기세가 일반적이지 않음을. 놀 랍게도 저 앞에 선 청년의 기운이 읽히 지 않는다. 그럼에도 심혼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이 전해졌다.
“네놈이더냐?”
“그래.”
“예의가 없구나.”
“우리가 예의 차릴 사이는 아니지 않
나?”
노인의 두 눈이 매서운 한기를 붐어 냈다. 더운 열기가 식으며 한밤의 기운 을 영하로 떨어뜨린다. 절대의 경지에 이른 무시무시한 고수임을 자각하게 해 준다. 무형의 한기는 살기와 융합하여 강력한 살수가 되었다.
솨아아아!
기세만으로도 능히 절정의 고수를 격 살한 치명적인 살의가 담겼다. 절대고 수 중에서도 최상급에 이르렀다. 현존 하는 대륙의 고수 중에서도 다섯 손가 락 안에 들 존재감을 자아냈다.
“본가를 건드리고 무사할 성싶으냐?”
“허세 부리기는, 그런다고 꼼수가 통 할 것 같아‘?”
노인의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작금의 살기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독 을 제어하여 무형살기와 조화를 이루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에겐 그 어떤 타격을 주지 못했다. 심적으로 흔들기 라도 했다면 놀라지 않을 텐데, 만만치 가 않았다.
하나, 자신이 누구이던가.
오무제(五武帝)의 암제(暗帝), 당지독.
일선에선 죽었다는 풍문이 떠돌았지
만,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 건재하다. 독인을 완성하면서 독공과 무공도 비약 적으로 상승해 독성(毒聖)의 전무후무한 경지에 올라섰다.
“네놈의 껍질을 벗겨 죽어 가는 걸 지 켜보겠다.”
“협박은 통하지 않아.”
정우가 손짓하자 당명천과 당명희가 걸어 나왔다.
당명천과 당명희는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뵐 면목 이 없었다. 당문의 숙원을 이루기는커 녕 최악의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 어떤 말을 한들 변명에 지나지 않음 을 모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못난 녀석들.”
당지독에게 남매는 자랑이었다.
당문의 부홍과 번영을 이루어 줄 거 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처구니없게 도 가문을 이끌어 갈 가주와 총관이 항 복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그리 살 바에 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자결하여 가문의 명예라도 지켜야 했다.
“혈육이라고 하여 가문의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매정한 아비로군.”
당문의 지독함은 다른 세가와 비교를 불허한다. 가문을 위해선 혈족의 희생 도 당연시할 만큼 잔혹했다. 해서 어지 간해서는 당문과 악연을 맺지 않으려고 한다.
“저 아이들로 날 협박할 순 없을 거 다.”
“당가타는 잘 있나?”
정우도 암제라면 이리 나올 거라 예 상했다.
가문을 위해 수^ 년의 세월을 독인 을 완성하는 데 썼다. 본인의 삶보다 가 문을 더 중시하는 자다. 말로는 간단해 도, 실천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 가. 암제의 독심과 뚝심, 인내심까지 전 해져 온다. 그러니 자식들로 항복을 받 아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 았다. 그러나 당가타라면 얘기가 달라 진다.
“?네놈!”
예상대로 암제의 안색이 급변했다. 어 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완고 함으로 뭉쳐진 얼굴에서 변화가 일어났 다.
“당가타마저 발설한 것이더냐?”
“……저희가 아니에요. 저자는 애초에 알고 있었어요!”
“닥쳐랏, 가문의 혈족으로 당가타를 거론하고도 살기를 바란 것이냐!”
“저희는 그저……
당명천과 당명희는 억울하지만, 반박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한들,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의 눈엔 가문을 배신한 역도에 불과했다. 하물며 자신들의 아 버지이지만 저만큼이나 화를 내는 경우 는 본 적이 없었다.
‘……죄송해요!’
‘그는 괴물입니다!’
당명천과 당명희는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허용 되지 않았다. 육신과 영혼에 가해진 금 제와 고독이 발동되면 상상하는 범위 그 이상의 고통을 겪는다. 영육의 통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다시는 겪고 싶 지 않은 최악의 금제에 당하고 말았다.
“네놈이 안다 한들, 당가타는 호락호 락하지 않다.”
“믿는 바가 있으니 행차하셨겠지.”
차후 당문을 이끌 기재가 있었고, 기 관 장치와 독진으로 결계를 쳐 놓았다. 수성을 목적으로 한다면 당가타는 난공 불락의 요새였다. 설령 핵폭탄이 터진 다고 해도 버텨 낼 방공호까지 완벽했 다.
“아, 이걸 어쩌나?”
정우는 휴대 전화를 꺼내 홀로그램 영상 모드로 전환하여 허공으로 띄웠다. 낱알처럼 분사된 홀로그램이 순식간에 공간을 메우며 영상을 완성했다. 영상 은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엄청 난 데이터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무제한 요금제라 큰 문제는 없다. 설령 더 나온다고 해도 팽가에서 알아서 처 리해 줄 것이다.
“...아니?”
박살 난 정문, 곳곳에 부서진 잔해들 사이로 찢겨진 주검들이 나열되었다. 생판 모르는 자들의 죽음으론 암제의 냉철함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러나 영상 속 장소와 시체는 암제의 동요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