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장
연출 실패 (3)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 은살려주마.”
“됐고, 지금이라도 돌아서면 문을 부 순 건 없었던 일로 해 줄게.”
문 값은 청구하지 않겠다는 대범함이
돋보인다. 정우 스스로도 이렇게까지 아량을 베풀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물론 통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건방진 빵즈, 주둥이만 살았구나.”
“보기 드문 짱깨의 호기도 대단해.”
정우는 인종, 국적의 차별은 선호하지 않지만. 상대가 차별을 원한다면 그대 로 돌려주기는 한다. 원래 참으면 병 된 다. 당하면 당한 대로 갚아 주어야 인지 상정이지. 참는다고 능사가 아니라, 인 내가 지속되면 호구가 되는 세상이다.
빠직!
황보무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믿고 있던 결계가 부서졌음에도 주둥이 가 자유분방했다. 더 이상 묵과하지 않 았다. 그러나 직접 나서기에는 급이 맞 지 않는다고 봤다. 눈짓을 보내자 천왕 단의 3명이 빗살처럼 튀어 나갔다.
쌔애앵!
정우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천왕단 을 보았다. 본인들 딴에는 기세를 잔뜩 끌어 올리며 살기충천하지만, 개미가 열 낸다고 화낼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 다. 그냥 오면 오고, 가면 가는구나, 하 고 덤덤하다.
손을 쓰려는 찰나.
깨톡!
메시지가 와 휴대 전화 홀로그램을 개방했다.
인증 사진과 함께 온 금강문주의 전 언.
-한 마리.
-두마리.
-서른 마리.
통신이 연결되자 30개의 깨톡이 한 번에 날아와서 꽂혔다. 칼날 사마귀를 죽이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는 금 강문주의 인증 사진이 인상적이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정우는 문주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해 서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단순 무식의 대명 사 금강문주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야 마띵하다. 문주와 함께한 세월이 20 년이 되어 간다. 눈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곤 했다.
“혹시?”
이상하게 승부욕을 자극한다.
“사리야, 자동카메라 모드.”
-자동카메라 모드, 동작 센서 작동.
카메라의 인공지능이 진일보해 목소
리만으로 웬만한 구동은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근래에 들어 인간의 체온과 신 경 전기 자극으로 휴대 전화 배터리를 완충할 날도 머지않았다. 이쯤 되면 인 공지능한테 잘해야 하는 시대였다. AI가 삐지면 휴대 전화에 내장된 기억들이 외부에 유출될 수도 있다.
“일단.”
정우의 손바닥이 휘둘러졌다.
파리채 스매싱!
휘익!
쫓아도, 쫓아도 달라붙는 날 파리의 집요함이랄까? 귀찮음과 짜증이 극에 달한 삼겹살 원주인의 신경질이 잘 버 무려진다.
푸악!
치고 들어가 목표물을 세 조각으로 썰어 버리려고 했던 천왕단원.
맥없이 캐삭뺑당하며 퇴장하고 말았 다. 주검은 참혹했다. 바닥에 내팽개쳐 진 개구리처럼 짓뭉개졌다.
일장삼절명(一掌三絶命).
정리된 공간,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스물일곱 마리 남았네.”
숫자를 맞추기 위해 남은 수를 고려 해 보는 정우다. 손을 들어 나올 놈들의 면면을 찍어 보았다. 우연인지 몰라도 마주친 자들이 외면한다.
아차!
순간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적당히 수를 쓴다는 게 힘 조절이 잘 안 되었다. 다행히도 황보세가와 제갈 세가는 천 명이나 되었다. 수장이 전장 의 승패를 고려할 때 수적 우위는 막대 한 영향력을 준다. 이래서 수가 적당해 야한다.
‘단주급은 아니니 괜찮겠지.’
단원 3명 죽었다고 물러설 거 아니잖 아.
툭하면 튀어나오는 인권충이 반발할 스토리이기는 한데, 적을 사람으로 여 기면 그때부터 답이 안 나온다. 적은 적, 범죄자는 범죄자. 싹수가 노란 것들은 애나 어른이나 지워 버리는 편이 세상 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그래야 당한 사 람들이 억울하지 않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피의자가 피해자보다 잘사는 나 라는 답이 없다.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서는 피해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나 라가되어야 한다.
부르르!
뒤늦게 사태를 인지한 황보무진이 격
렬한 살기를 뿜어냈다. 놈이 뭘 하는지 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원 3명을 허무 하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천왕단은 황 보세가를 지탱하는 무력단이다. 일개 단원이 아닌, 세가 내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다.
깨톡!
-마흔 마리.
승부욕을 자극한 깨톡이 계속 울린다.
“서른일곱 마리잖아…….아!”
정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주의 노림수에 잠시나마 넘어가 버 릴 뻔했다. 남은 서른일곱 마리를 채워 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성되었다. 게 임 상 만렙에 도달하기 전 딱 1포인트 남았을 때의 심정과 비슷하다.
‘이게 뭐라고 지고 싶지 않잖아.’
승부욕을 채우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 요하지만, 정우는 끝내 참아 내었다.
전생과 달리 인내심이 많이 생겼다. 이만큼이나 성장하다니, 꽤나 뿌둣하다. 적이라도 두 번이나 선택의 기회를 주 고. 전생의 적들은 선택의 기회조차 주 어지지 않았었다.
“세 번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그럼 더 이상은 안죽어.”
“건방진 놈, 한수 득의를 봤다고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오늘 죽지 못한 걸 후회하게 해 주마『 흉흉한 살기가 공간을 장악했다.
동료의 죽음에 분개한 황보세가 무인 들의 살기가 군집을 이룬다. 목숨 빚은 목숨으로 갚는 법, 죽이고 말겠다는 격 렬한 살기가 불타오른다.
씨익!
정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20억에 육박하는 되놈들의 개체 수다. 개미들 수백 마리가 죽어 나간들 티라 도 날까.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되놈들 의 생산 능력에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
돌아서며 씨익! 옷는 흑금단주.
당명천과 당명희는 오싹함을 느꼈다. 분노에 기름을 부어 놓은 상태였다. 사 실을 말한들 제갈세가와 황보세가는 듣 지 않을 것이다.
크크.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어디 하나 빈틈없이 맞물린다.
정갈하게 판을 깔아 놓은 정우는 기 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배후로 검은 구 름이 밀려오고, 무거운 연주가 들려오 는것 같다.
“얘들아, 연장 꺼내라.”
“예, 단주!”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다면 받아 주 는 것이 예의.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으 로서 마땅히 성대하게 맞아 주어야 한 다.
두둥!
명을 받은 혹금단은 신속히 기간트를 꺼내 탑승을 완료했다. 일련의 동작이 완벽하다. 숙련도가 남달랐다. 쉬는 동 안 기간트 탑승 훈련을 해 시간을 줄였 다. 공력과 에너지 스톤의 융합으로 무 시무시한 기세가 장원을 지배한다.
우우웅!
기계가 정교하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미세한 소음이 소름끼친다. 검은색으로 무광 처리한 기체가 어두운 혹안(黑眼) 을 번뜩이자 지옥의 야차를 방불케 한 다. 로봇 만화에 심취한 메카닉 오덕에 게는 꿈의 장면이다.
헙!
황보세가와 제갈세가의 무사들은 헛 바람을 삼켰다.
기간트에 대해서는 들어 봤고, 10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드러난 정경은 예상을 훨씬 압도한다. 그도 그 럴 것이 100기에 달하는 기간트가 흉흉 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심장이 쫄깃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기세가 꺾이려고 하자, 황보무진이 나 섰다.
“가소로운, 고작 기간트를 믿고 설쳤 던 것이더냐?”
“빙고, 기간트가 있으니까 입이 살더 라고.”
정우는 기간트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마구 풍겼다. 나, 이거밖에 없 으니까 얼른 덤비라는 고단수의 도발이 다. 이러고도 달려들지 않을 무인은 무 인도 아니라는.
“버러지 같은 놈! 기물 따위에 의존한 대가를 치러 주마.”
“난 그런 놈이니 너희는 기물에 의존 하지 말고 순수 무력으로만 덤벼라.”
황보무진의 호통은 단순히 혹금단주 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제갈세가와 황 보세가의 무사들에게도 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낭패는 한 번으로 족하 다. 기간트의 위용에 제 실력을 발휘하 지 못할 수도 있었다.
‘방심 못할 위인이군.’
제갈성도 간파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무진이 단순 무식해 보이기는 해도 상황을 주도하는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름이 바뀌려고 하자, 그 즉시 개입해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이 는 머리로 배운다고 해서 익힐 수 없는 재능이다.
‘경시해선 안 되겠지.’
산서성에서 10기의 기간트로 남궁세 가의 공격을 막아 냈다고 했다. 기간트 가 기선 제압을 위한 보여 주기식 용도 가 아닌, 성능도 뛰어나다는 반증이다.
또한 일대일의 구도보다 다수의 집단전 에서 굉장한 파괴력을 지녔다.
‘기간트를 세가로 가져가야 한다.’
제갈성은 기간트가 탐났다.
제갈세가도 내부적으로 기간트를 설 계하기 위한 공학연구소를 완성했다. 하지만 세가에서 완성한 기간트를 실전 에서 쓰려면 갈 길이 멀었다. 출력과 속 도, 관절의 유연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보완하기 위해서는 기간트를 분해해 처 음부터 연구해야 했다. 별도로 자체 생 산과 수리를 하려면 마도공학자가 있을 터. 그를 사로잡아야 했다.
‘넘겨줄 성싶은가.’
황보무진도 기간트가 탐나긴 마찬가 지다.
무인으로서 기물에 의존해선 안 되겠 지만, 기간트의 전투수행 능력까지 무 시하진 않았다. 가문의 전력을 끌어올 리기 위해서라도 기간트는 필수 불가결 한요소다.
허어!
욕심이란 끝이 없다.
‘사람 마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고 민이 많아서 배는 부르겠다. 전투가 끝 나지도 않았거늘, 다 이긴 양 전리품부 터 욕심내고 있으니 우습기까지 하다.
좀 전의 과했던 손속은 어느새 잊힌 사건이 되었다. 죽어 버린 세 마리가 굉 장히 초라해진다. 사람 목숨이 이토록 간단히 삭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 프다.
깨톡.
-쉰 마리.
그 와중에 사태 파악 못 하고 깨톡을 보내고 있는 금강문주다.
칼날 사마귀의 처절한 외침이 사진에 서 들려온다. 마이너스(-) 47이라는 숫 자가 굉장히 거슬리기는 했다. 자리를 수성해야 한다는 말 같지도 않는 당위 성이 생성된다.
“본격적으로 놀아주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센스 는 개불, 황보세가와 제갈세가의 같잖 은 호기를 짓밟아 주기로 했다. 호기도 사람 봐 가면서 부려야지, 되놈들의 우 쭐함이 꼴 보기 싫다. 시간을 끌기보다 는 속전속결, 전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런다고 달라지진 않겠지만.’
오랫동안 함께한 부부는 눈빛만 봐도 통한다고 한다.
정우와 흑금단이 그랬다. 주인의 의지 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물론 지금과 같은 독심술의 경지에 이르는 데까지 일방적인 희생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냥이라며 시도 때도 없이 처맞은 적 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