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엉망진창 ⑵
“왜 안 오는 건데?”
“시간이 좀 늦어졌을 분이에요.”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곧 올 거예요.”
“혹시, 구라치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혹금단주는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 다.
당명희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식은땀 이 흘렀다. 수틀리면 언제든 협상을 뭉 개버릴 위인이기에 조심해야 했다. 게 다가 가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가 반 드시 필요하다.
“이거 구린 냄새가 나는데.”
“냄새라니요, 사람잡지마세요.”
“뀌었냐?”
“예?”
“음소거 방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욧!”
혹시나 알아차렸을까 노심초사했던 당명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 허를 정확히 찔렸 다. 설마 이 급박한 상황에서 저딴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할 줄 누가 알았 으랴, 기가 막힐 따름이다.
“하도 굳어 있기에 농담 좀 했기로서 니 오버하기는.”
“지금이 한가하게 농담이나 할 때가 아니잖아요.”
“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거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
요‘?”
“그럼 말이지, 내가 지금 개소리라도 한다는 거야?”
당명희는 상종 못 할 인간이 지구상 에 있다면 눈앞에 있는 흑금단주라고 단언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진지하 게 하니, 더더욱 화딱지가 치솟는다. 차 라리 재미라도 있으면 반응이라도 하지. 너무 재미가 없다.
“굳이웃음을 참지 않아도 돼.”
“하나도 안 웃기거든요.”
“설마?”
“진심이에요.”
정우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분위기도 갑작스럽게 냉랭해진다. 절 대고수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주변까지 도 영향이 미친다. 만상의 조화를 어그 러뜨리며 공간을 차단한다. 일그러진 공간에서 사시사철의 변화가 빠르게 진 행되었다. 몰아일체의 조화지경에 도달 한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극상승의 무 력이었다.
“웃겨, 안웃겨‘?”
“……(이런 미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
당명희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인간 유형은 처음이었다. 설마 진 심으로 하는 말일까? 라는 의심이 들었 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기서 또다시 재미없다는 말을 했다가는 날벼 락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헙!
가공할 기파를 감지한 당화운과 당무 정이 다가오다 멈칫하고 말았다. 공간 을 차단하며 밀어내는 기운의 정체와 발원지를 확인하자 피가 싸늘하게 식었 다.
‘……알아차렸나?’
‘제기랄, 어쩌지?’
당화운과 당무정은 갈피를 잡지 못했 다.
공격을 하자니, 드러낸 혹금단주의 무 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더 강했다. 이토록 패도무쌍 의 기운은 처음이다. 무엇보다 기운에 실린 기세는 실로 무자비하다. 다가오 는 즉시 죽여버리겠다는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목숨을 건다!’
그들은 목숨을 걸 결의를 다졌다. 죽 더라도 해봐야 했다. 이대로 총관의 죽 음을 방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 차피 그녀가 죽으면 자신들도 죽은 목 숨이었다. 흑금단주가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설령 죽지 않는다 해도 더한 고 통이 기다릴 테고.
그때.
우웅, 팟
첩첩이 집중되어 강력한 기운으로 응 집되었던 공간의 결계가 풀어지면서 사’ 방으로 퍼져 나갔다. 돌풍이 일대를 휩 쓸고 지나가며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자고로 진심은 통하는 법이지.”
“……(진심이라고?)!”
당명희는 쌓인 울화가 폭발할 뻔했다.
진심도 진심 나름이지, 방금 그 지랄 을 떨고 할 말인가?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무형살기를 오지게 뿜어냈었 다.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기세에 갈가 리 찢겨 나갔을 것이다. 하물며 응수를 하지 않았다면 이대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개똘아이같은 놈이!’
똘기가 충만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이 인간이 정상이 아님을 수차례나 경 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를 가 분히 벗어났다. 개그 안 받아줬다며 협 상을 엎어버리는 위인이 정상은 아니지 않나.
이 망할 놈의 개그 덕후.
개덕 같은놈아
멍!
결사태세를 갖추었던 당화운과 당무 정은 굳어버렸다. 설마 했었거늘, 조금 전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 다.
“너희들 뭐 해?”
“……아무것도 아니오.”
“꼴값 떨지 말고 제자리나 지켜.”
“……알겠소.”
당장에라도 결판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통할 위인이 아니기에 당 화운과 당무정은 속으로 삭여야 했다. 한편으로 한심하고 답답하다. 자신들이 언제 이런 처우를 받아보기나 했단 말 인가. 어느 순간 캐릭터도 이상해지고 있었다.
‘저놈 때문이다!’
흑금단주로 인해 그동안 쌓아 왔던 진중했던 이미지가 망가져 버렸다. 억 장이 무너지지만, 말을 해봤자 손해만 가득이었다.
“햇살이 좋네.”
..미친놈!
오밤중에 햇살이 어디 있다고!
말 같아야 호응을 하기라도 하지, 이 건 숫제 대답을 하기도 힘들다.
당명희와 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 었다. 상종해봤자 심각한 내상만 입는 다. 함께 자리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짜 증이 밀려왔다.
“가볼게요.”
“그러시든지.”
멀어져 가는 그들, 정우는 미소를 짓 고 있었다.
“모른 척하기도 힘드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말을 못 하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다. 이게 다 안정된 생활 연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특유의 입담과 개그가 조화를 이루었으니 금상첨화였다.
무지하게 자연스럽다, 리스펙트해.
“자, 판을 깔아줬으니 놀아보자고.”
정우는 판의 틀을 완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리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마치 치우는 사람 따로 있고, 어지른 사람 따로 있는 것처럼. 내 집이 아니기에 어질러만 놓고 있었다. 어느 하나 봉합을 하기는커녕 첩첩산중, 설 상가상으로 만들었다.
“정리안되면 하는수없지.”
굳이 정리를 하고자 하는 마음도 딱 히 크지 않았다.
혼란이 가중될수록 내부단속을 하는 데도 힘이 든다. 그 점을 노렸으니, 반 이상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대륙의 평화와 균형은 되놈들이 알아서 할 문 제다.
이틀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이 극에 달하 는 당명희였다. 혹여 혹금단주가 눈치 라도 채면 곤란했다. 그의 행동을 면밀 히 관찰 중이긴 하지만, 용이치는 않았 다.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 당문의 가 주가 찾아왔다.
“괜찮으신가요?”
“면목이 없구나.”
당명천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주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남아 있는 무력은 겨우 백을 넘지 않았다. 10 기의 독인 중 남아 있는 건 2기에 불과 했다. 제갈세가가 펼친 화룡대진(火龍大 陣)에 독인이 타버렸다. 어지간한 화기 에는 영향을 받지 않지만, 제갈세가의 화진은 1만 도를 넘어섰다.
“다들 꼴이 왜 이래? 거지새끼들도 아 니고.”
“말을 삼가세요, 이분은 대당문의 가 주세요.”
되놈들은 왜 이렇게 앞에다가 대(大) 자를 붙이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다고 더 커지기라고 하는 건가. 본 인을 치켜세우는 방식이야 나라마다 다 르다고 해도, 낯짝도 두껍다.
“가주고 가발이고! 이것들이 날 호구 로 보나. 이게 무슨 지원이야!”
“사정이 있었을분이에요!”
“지랄하고 있네.”
정우의 막말에 당문의 무인들의 안색 이 돌변했다.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오 기는 했어도, 자신들은 당문의 정예다.
“말이 심하군.”
“심하긴, 벌써 두 차례나 엿 먹인 주 제에 뭘 잘했다고.”
한번은 독을 쓰고, 이번에는 거짓말을 했으니.
따지고 보면 다 맞다. 화를 내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하나 다 잃고 돌아온 당명천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다 못해 네이팜을 던진 격이다. 격렬한 노기가 흉흉한 분위기 를 형성했다.
“해보자는 건가.”
“패잔병 주제에 자존심 상하셨다 이 거냐.”
“놈 함부로 말하지 마라!”
“하면 어쩔 건데.”
“네놈에게 당문의 위엄을 보여주겠 다.”
당명천은 더 이상 모욕을 참지 않았 다.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반도의 오랑 캐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위이잉!
촌음간에 당명천의 손바닥에 극양의 기운이 모여든다. 당문의 독문장법, 삼 양신장(三陽神掌)으로 거대한 암벽도 일 장으로 녹여버리는 극양극패의 파괴력 을 지녔다.
꽈0M앙!
공간을 부숴버리는 개세적인 파괴력 의 발현이었다. 퍼져 나가는 기파로 인 해 대지의 거죽이 벗겨져 나가며 위력 을 증명했다.
커어억!
10보 후퇴와 함께 억눌린 신음.
쿨럭!
내상을 입었는지 식도를 타고 비릿한 핏물이 토해졌다.
당명천은 손바닥을 적신 핏물과 상대 를 바라보며 현실을 불신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오왕의 일인인 독왕이었다. 단 일합의 격돌로 내상을 입다니 믿어 지지 않았다.
“당문의 위엄을 보여준다며, 꼴랑 이 거냐.”
“?이놈!”
공세를 잡은 정우의 주먹질이 이어졌 다.
파파팟!
형을 벗어난 무형의 권공, 대충 날리 는 듯 보이지만 막아서는 당명천은 죽 을 맛이었다. 막아도 막은 게 아니다. 충격이 쌓이면서 기혈을 들끓게 한다.
당명천이 밀리자, 당명희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가주는 당문의 중심이다. 그 가 이대로 무릎을 꿇으면 당문은 회복 하지 못했다.
“멈추지 않으면 독을 발동시키겠어 요!”
“수작이나 부린 주제에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저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후회하게 될 텐데.”
“당장의 오해보다는 미래를 대비할 때예요.”
이기적인 선택일지라도, 당명희에겐 당연한 일이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어 떤 선택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설령 수치스러운 결정이라도.
정우는 손을 거두었다.
“손님이 온 걸 다행으로 알아.”
손님?
이 시간에 손님이 올 리 없다. 그렇다 면 답은 하나다. 황보세가와 제갈세가 가 기어이 비서까지 추격해 온 것이다.
장원을 포위하는 그림자, 족히 2천에 달했다.
황보세가와 제갈세가의 무인들이다. 한데 그런 것치곤 수가 적은 편이다. 두 가문의 주력을 합하면 1만에 육박해야 한다.
단 무력으로 비교하면 얘기가 달라진 다. 가문의 정예 무인으로만 선별되었 다.
“예상보다 피해가 컸네.”
“그러니 이번에 반드시 끝장을 봐야
해.”
대화를 나누는 자는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신황과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천이 다.
그들은 안휘성의 끝자락에서 당문의 주력을 격파하고, 여기까지 추적을 해 왔다. 하지만 함정으로 유도했음에도 피해가 꽤 컸다. 당문의 주력을 궤멸시 키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무인을 잃었다. 특히 독에 중독된 무인이 많아 피해가 예상 범위를 벗어났다.
“독인을 무력화시키지 않았다면 피해 는 더 컸을지도 모르네.”
“저주받을 마물을 만들어내다니, 용납 할수 없는 짓이지.”
황보세가와 제갈세가는 명분을 내세 울 기회다. 당문이 독공의 가문이라고 는 하나, 독인은 예외 대상이다. 독인을 완성하기 위해서 당문이 행한 일은 보 지 않아도 번하다. 수없이 많은 실험을 했을 테고, 희생자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의문일세.”
“무엇이?”
“당문이 독인을 대동하고 있다는 정 보의 출처가 여전히 오리무중이네.”
폐쇄적인 당문의 습성상 정보를 알아
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그런 당문이 작정하고 숨긴 독인이니만큼, 정보■가 없었다면 막대한 피해를 봤을 것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홀렸을지 도.”
“그렇다고 이대로 보낼 수도 없지 않 나.”
당문의 정신적 지주인 가주가 살아 있었다. 그를 사천성으로 살려 보낸다 면 후일 큰 후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 다. 당문의 고집과 편협함, 집요함을 알 기에 필히 제거해야 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정리하면 되
지 않나, 막말로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 다면 그것 역시도 우습지 않나.”
“자네 말이 맞아.”
의혹이 있다면 아예 오지 말았어야 했다. 여기서 망설여봤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대한 전력 손실 없이 당문을 제거한다면 하북팽가와 남궁세가는 어 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장원을 포위하고 좁혀가는 찰나.
스윽!
장원의 결계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