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간 보기 (1)
산의 중턱, 인적이 드문 산길을 따라 방향을 잡은 그림자가 어둠을 뚫고 나 아갔다. 밤이 깊어진 산은 등산하기 어 렵다. 산에 사는 전문가도 길을 잃기 일 쑤다.
그림자는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 었다.
사사삭
신법을 펼치며 산길을 능숙하게 밟아 나갔다. 고속으로 움직이면서도 그들은 연신 주변을 돌아보았다. 쫓기는 자의 행동과 다르지 않았다.
하!
한 시간을 더 올라가자 목적지에 도 달했다.
구름에 가렸던 월광이 고개를 내밀어 일대를 비추었다. 드러난 전경은 목적 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깎아지른 절벽과 숲으로 우거진 지대. 관광차 왔다면 고산준령(高山酸W)의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하겠지만, 목적 달성을 원하기에는 사막에서 바늘 찾는 기분일 것이다.
월광에 비친 그림자는 남녀였다.
사내는 훤칠한 키에 조각으로 빚어놓 은 듯 잘생긴 미남이고, 여인도 어디 가 서 빠지지 않는 이목구비와 곡선의 미 학을 이룬 몸매를 지녔다.
둘 다 수심(愁心)이 깊어 보였다. 망연 한 눈빛 속엔 허탈함이 깃들었다. 모든 걸 잃어버린 자의 고뇌가 젊은 남녀에 게서 느껴진다.
“오빠, 여기가 맞나요?”
“저기다.”
남매 중 사내가 가리킨 장소는 절벽 아래, 수목과 수풀로 가려져 있었다. 사 람이 살 공간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인 다.
사삭
수림이 흔들리더니 검은 그림자 여럿 이 빠져나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긴 장했던 여인이 검을 꺼내 들려고 하자, 사내가 손으로 제지했다.
검은 그림자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
났다. 그들은 남녀를 보고 가까이 다가 가 예를 올렸다.
“살아 계셨군요.”
“비굴하게 목숨을 연명했을 분입니 다.”
“비굴하다니요, 살아 있으니 된 것입 니다.”
“그리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요. 복수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기꺼 워했다.
모든 걸 잃었고, 회복할 구심점마저
없었던 가운데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남매는 희망적이지 않았다. 살아 돌아오는 과정이 저들이 원하는 그림과 달랐다.
‘하아, 나로서는.’
‘우린 그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어요.’ 남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원치 않는 일이라도. 그렇지 않으면 남아 있는 모든 걸 잃게 된다. 가문의 명맥이라도 건사하려면 절대적이었다.
“준비는 됐습니까?”
“가주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심점을 잃고, 터전마저 빼앗 길 처지였다. 제왕이 사라진 성을 놓고, 승냥이들끼리 주인이라 자처하고 있었 다.
정우는 산동성에서 비행기를 이용하 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지만, 고속열차 와 차로 움직였다. 그편이 시간은 걸리 더라도 동선 노출이 되지 않았다. 확실 히 대륙은 한국과 크기가 달랐다. 기본 1천 킬로미터를 깔고 간다.
안휘성으로 가는 동안 대륙 곳곳에서 이상 징후의 랜덤 케이브가 오픈되었었 다.
이번 케이브는 이전과 또 달랐다. 물 량도 많았지만 마물의 전투력이 상당했 다. 인간형에 가까워진 마물은 특이한 장치를 사용해 피해가 꽤 컸었다.
정우는 케이브가 열리는 장소에 있었 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케이브는 그 나라에 귀속되어 타국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국제 협약을 맺었다. 정식 요청을 하지 않고 개입하게 되면 국제 분쟁의 빌미로 작용했다.
‘날 떠보는군.’
의도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랜덤 케이
프 오픈 시 특이 파동을 감지할 순 있어 도, 정확한 시간까지 예측하진 못한다.
당명희는 피해 지역을 우회하지 않고 지나갔다. 마물이 튀어나와 인명피해가 커지는 광경을 지켜보게 했다.
“피해가 예상보다 커지네요.”
“그런데 손 놓고 있을 셈이야?”
“나서시게요?”
“당문이 나서야지, 명색이 정파잖아. 협을 추구한다면서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되지.”
“안타깝지만 이 일대는 당문의 구역 이 아니에요.”
당명희의 말은 당문이 이 구역을 관 리했다면 오늘과 같은 사달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가 담겼다. 자신감 이면에 당가의 야욕을 노출시켰다.
“정의도 때에 따라 다른 모양기군.”
“대호법은 아니신가요? 시도 때도 없 는 정의는 정의랄 수 없지요. 오히려 무 책임한 민폐일 분이에요.”
“짜증나지만 맞는 말이야.”
“의외로 정의로우신데요.”
“당문이야말로.”
대화 속에서 서로의 심기를 파악하려 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당명희는 의도적이지 않은 수준에서 대호법을 계산해나갔다. 그렇기에 심리 의 변화를 읽어내는 작업이 중요했다. 예측은 언제나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 무의식적인 언행과 작은 변화가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전망 좋네.”
정우는 살풍경을 그저 감상하기만 했 다.
무고한 인명의 피해는 분명 안타깝다. 그러나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까지 연연 해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연민이야말로 정우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럼에도 관심을 기울인 척, 나 서라고 당명희를 자극한 것은 협의를 추구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서다.
‘금강문도 정파라고 할 수 있으니, 구 색은 갖추어야지.’
그뿐.
위선은 떨지 않는다.
안휘성 합비.
도시 외곽의 변두리에 허름한 건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 일대가 당문 에서 마련한 안가汝家)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집을 잘도 구했네.”
“보통이죠.”
외부에선 일반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아예 다른 세상이 나온다. 지하 로 더 넓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케이브 와 연동을 시켰다. 실상 공간을 쪼개고 이어 붙여 거리와 시간을 줄여놓았다.
‘오랫동안 공을들였군.’
하루아침에 이토록 완벽한 안가를 구 축하진 못한다. 남궁세가는 물론 다른 시선까지도 피해야 하기에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문이 팽가와 남궁 세가가 전쟁을 치르기 이전부터 안휘성 을 탐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오대세가는 외부에서 보기에 협력 관계지만, 내부적으론 치열한 경쟁을 해왔어요. 우리만 이런 게 아니에요. 아 마 각 성에 이런 식의 안가를 가지고 있 을걸요.”
“누가 뭐랬나?”
정우는 머쓱해진 척 회피했다.
그러자 당명희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팽가와 남궁세가의 전쟁 이전부터 본가가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 나요?”
“귀신이군.”
“뭐, 조금은 사실이니까요.”
정우는 감정을 다양하게 표출했다.
아닌 척,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 후 당명희의 의도를 읽었다. 오랫 동안 준비한 안가를 보여주고 싶지 않 았을 텐데 보여주었다. 신뢰한다는 직 간접적인 표현이다. 믿음을 주기 위한 일종의 방편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고 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수법이다.
“일단 씻고, 식사부터 할까요?”
“좋지.”
혹금단은 대동하지 않았다.
단체로 이동하지 않고 세 명씩 조를 이루어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기로 예정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알아서 다들 제자리로 찾아오기에 걱정 하진 않았다. 다만 차후 사용할 적금단 은 예의주시해야 했다.
‘많이들수록 좋은 거지.’
적금(赤金)이 아니라 적금(積金)인 걸 알면 환장할 테지만.
정우는 가급적 대범하게 행동했다.
당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내 집이 다 여기고 있었다. 사소한 부분은 관심 을 배제하고 다소 부주의한 모습을 보 였다.
그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강자의 여유로 희석되고 있으니까.
‘곧 깨닫게 될 거야. 호호호.’
대호법의 자신감에 미소를 짓는 당명 희였다.
황보세가와 제갈세가가 안휘성에 대 한 지배력을 본격적으로 늘리고 있는 와중에도 공을 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 었다. 작은 부주의가 커다란 실수가 되 어 목을 죄게 될 것이다. 그가 예상보다 훨씬 강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준비되었다면 꺼내봐라.’
정우와 당명희의 속내는 엇갈렸다.
둘 다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 현실은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차후에 웃게 될 놈과 피눈물을 흘리게 될 년이 누가 될지 주목이 되었다.
정우는 준비된 거처에서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드륵!
치파오를 차려입은 여인이 방문으로 들어왔다. 걸을 때마다 가슴골에서부터 허리까지, 여러 의미를 담는다. 풍만하 면서도 탄력이 느껴지는 여인의 아름다 움을 맘껏 봄내었다.
“상차림이다 됐어요.”
“식전에 어떠냐?”
“좋아요.”
“됐다. 자고로 여인은 튕기는 맛이 있 어야지. 쯧쯧쯧!”
여인은 순종적이었다. 언제든 받아들 일 준비가 되었다. 그런 여인의 태도에 정우는 불만족스럽게 대했다.
여인은 현모양처처럼 묵묵히 자기 일 을 수행했다. 하나 순종적인 눈빛 아래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녀는 당명희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수족이었다.
정우가 거실로 걸어 나왔다.
원형의 식탁에는 산해진미가 놓여 있 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들었을 요리 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데 당명희가 직 접 마지막 메인 요리를 들고서 주방에 서 나오는 게 아닌가.
“요리도 할줄 알아?”
“이 나이에 요리 못하면 욕먹어요.”
“허드렛일은 하찮은 족속들이나 하는 거야.”
“간혹 하다 보면 즐겁기도 해요.”
정우의 비아냥거림에 거실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당명희는 가문의 직계혈통이며, 총관 이었다. 존대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영 광이거늘, 팽가의 대호법이되더니 반도 의 오랑캐가 주제를 모르고 있었다.
“눈깔들이 꽤 친근하네. 그런데 말이 야, 다들 그렇게 보다가 골로 갔거든.”
중화인의 자부심은 어딜 가지 않는다. 밑바닥부터 깔려 있어, 알게 모르게 나 타난다. 자기가 아니면 오랑캐라는, 변 질된 자부심으로 정우는 화를 내기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어느새 무형의 기세가 공간을 장악했
다. 짓누르는 패도는 중화의 우월감을 허용하지 않았다. 곱게 수그리고 물러 서지 않으면 기세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는 압박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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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I o’
암천대의 대주, 당무정의 검미가 꿈틀 거렸다.
‘강하다.’
당명희에게 귀띔을 받기는 했지만, 이 렇게까지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하 물며 여전히 기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 고 있었다. 더 했다가는 거실 안에 피바 람이 불 것이다.
어둠의 달, 암월(暗月)을 끌어올려 저 항을 하지만, 역량의 본질이 다르다. 본 격적으로 나서면 혼자서는 막아낸다 장 담하기 어렵다.
그만큼 팽가의 대호법이 뿜어내는 기 세가 상당했다.
‘검제와 검왕을 이겼다더니, 허명이 아니었구나.’
그렇다 해도 당문의 무인으로서 변방 의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 은 오기가 발동했다. 기세에 밀리지 않 으려고 암월을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꼴값을 떠네.”
정우는 암천대주의 도발을 힘으로 찍 어 눌렀다.
크윽!
기세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무정은 암월이 맥없이 눌리자 경악 을 금치 못했다. 들어서 아는 것과, 직 접 마주한 체감은 격이 달랐다. 이대로 라면 버티지 못하고 심맥에 상처를 입 을 수 있었다.
털썩!
정우는 기어이 당무정을 찍어 눌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세의 범 위 밖이기는 하나 영향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