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교섭의 묘미는 밀당 (2)
-진짜 너무한다.
“내가 뭘?”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청상과 부로 만들 셈이야?
“일 때문이라고 했잖아.”
정우로서는 하라의 짜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면 간다고 얘기를 하고 가라고 해 서 그렇게 했다. 가기 전날 온 정력을 소모해서 쾌락을 선사해주었다. 지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하고. 잘 갔다 오라 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며칠이면 몰라, 벌써 석 달이 라고!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통화는 자주하잖아.”
전화 안 한다고 해서, 전화도 한다.
많이 발전했잖아.
-예예,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요.
“굳이 흘릴 필요는 없어, 하라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자꾸 이러 면 나도 데려가!
“너도 스케줄 바브잖아, 난 다 이해한 다고?
-그건 이해가 아니라 무관심이지.
팩트체크에 정우는 살짝 당황했다.
하라의 예리함이 날이 갈수록 진화를 거듭하여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예리했지만 속내를 숨기 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특수 능력자와 연애를 하면 힘든 점 중에 하 나가 바로 이것이다. 천원일기공을 괜 히 전수해주었나 하는 후회가 조금 밀 려온다.
‘화제를 돌려야겠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한도 끝도 없 다.
이걸 어쩌나.
하라가 더 빨랐다.
호홉이 살짝 길어지는 타이밍을 읽어 낸 것이다.
-나야, 일이야?
“말이 왜 그렇게 나오는
이거야말로 진짜로 어이없는 질문이 었다.
정우로서는 납득이 하나도 되지 않는 다. 선택을 할 게 있고, 못 할 게 있지. 이런 식의 질문 좀 하지 말았으면 한다. 하물며 일은 먹고사는 것과 관련이 있 었다.
일과 사랑?
선택을 하라면 직업이다.
막말로 직장 잃고, 사랑 택하면 개고 생으로 직행한다. 대다수의 여인은 실 업자를 남편으로 두지 않는다. 직장이 건실해야 사랑도 건사할 수 있다. 이를 사랑이 아닌 물질적인 속물 마인드라고 비난하지만, 인간은 속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아닐 것 같지?
살아보면 안다.
사랑만으로 현실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넌 그게 문제야?
“또 뭐?”
-그냥 나라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누가 진짜로 일을 그만두래? 까놓고 말 해서 너 그거 안 해도 사는 데 지장 없 잖아.
이건 맞는 말이다. 일하지 않으면 먹 지도 말라고 하는데. 지금부터 평생 일 하지 않아도 놀고먹을 수 있다.
“널 선택할게.”
?■늦었어
이런 씨X!
욕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어 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데, 하라 랑 말싸움하면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비 중으로 따지면 30에 1 정도, 남은 29는 반대로 복장이 터지지만.
그러나 확률은 의미가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당황을 했다는 건, 명
백한 오점이다. 한 번 기 싸움에서 밀리 면 평생 고생한다는 소릴 들었다. 그래 도 막무가내는 현명하지 않았다. 언제 든 팩트로 조져야 한다. 그것이 설령 사 랑싸움일지라도.
“이번에 전설의 황후로 드라마 컴백 한다며.”
-안 하기로 했어.
“왜?”
- 알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알아두면 평타 치는 무공편에 카메 오로 나올 거야. 뭐, 카메오가 고정 되 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그치, 정우야?
이런 젠장.
한순간 방심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사전에 하라의 스케줄을 살폈 었다. 전설의 황후 캐스팅까지 마쳤다 는 소식을 듣고 나서 강 피디에게 원하 는 시간대를 넌지시 흘렸다.
강 피디가 요즘 문주님한테 빠져 있 으니, 시간 조절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시청률도 잘 나오고 있으니, 방송국도 두말하지 않을 테고.
한데 하라가 캐스팅이 다 됐다고 했 던 전설의 황후의 여주인공을 발로 차 버렸다. 전설의 황후는 김희숙 작가의 드라마로 캐스팅만 되면 톱스타가 된다 고 알려졌다.
“미친거아냐, 김희숙 작가라고.”
-그게 뭐? 평양감사도 나 싫으면 그 만이지. 난 예전부터 오글거리는 역할 을 잘 못했어. 왜 당황하셨나요?
역시 기회가 오니 찌른다.
내 여자친구답게 날카로운 맛이 있다.
“당황하긴,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 지.”
-시청률이야 대충 아무렇게나 해도 잘 나오겠지. 강 피디님과 금강문주님 의 작품인데. 그치, 정우。卜
성질 건드리면 망쳐놓고 말겠다는 하 라의 선전포고다.
프로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하라가 고 의적으로 프로그램을 망치진 않겠지만. 정우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사태의 연속 이었다. 설마 주연 작품을 카메오 출연 때문에 걷어찰 줄 누가 알았으랴. 하라 의 돌발적인 행동은 계산 밖이었다.
의외성 하나는 죽여준다.
-나 얼마큼 사랑해?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일격으로 보 여줄까‘?”
지금의 울분을 무공으로 표현하면 도 시 하나는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사랑하면 곤란해.
“효린이도 많이 컸지?”
...그거 범죄야!
“곧 스무 살 넘겠지, 약속 시간이 얼 마안 남았네.”
-알았어, 빨리 끝내고 돌아와. 기다릴 게.
전화를 끊은 정우는 편치 않았다.
‘젠장, 유치했다.’
정우는 고작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
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전생의 나 를 아는 누군가가 봤다면 내 얼굴 가죽 을 뜯으려고 칼 들고 설칠 게 뻔하다.
그러다 내 손으로 다 죽이면 허무할 거아냐.
하하하!
정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살면서 지금처럼 실없는 소리를 하고,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계획대 로 흘러가도록 완성품을 만들어내려고 만했었다.
‘완성이라.’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다.
그간 알게 모르게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모양이다. 더 강해 지려고, 진강백을 짓밟아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했다. 더 강해지고, 더 영리 해지고, 더 계획적이어야 한다고.
‘비어 있어야 채울수도 있는 건데.’ 현천은 무한을 의미했다.
채울 수도 비울 수도 없는 영역이다. 10단공이라고 한정을 지어놓고, 도달하 기 위해 발버둥을 친 꼴이다. 비움도 채 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영역 자체가 되어야 했었다. 10단도 끝이 아닌 시작, 미완성의 영역임을 인정해야 한다.
투득!
알의 껍데기가 깨어지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탈각.
벗어던진다.
규정지었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영 역에 도달한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깨 달음이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했다. 정우는 항상 묻고, 대답하고, 궁구했었다. 단순히 하 라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순 없다. 탐구하고, 궁구하였기에 작 은 힌트로 탈각을 이룬 것이다.
스륵!
감았던 눈을 떴다.
“달라졌네.”
흐름이 또 다르다. 마치 모든 흐름의 근원을 파고들어 낱낱이 파헤치는 기분 이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근원에 도 달해 있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바로 달라지 진 않는다. 육체의 수련도 필요하다. 신 의 영역에 도달한 권능도 발휘할 육체 가 있어야 했다.
지금도 육체의 발달 수준은 극한을 넘어섰다. 다만 깨달음으로 인해 감각 이 살짝 비틀어져 있었다. 기간트를 사 용하듯 싱크로율을 맞추어야 한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잘 갚았다 고 할까나.”
정우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신용한다.
받았으면, 갚는다. 가장 기본적인 철 칙이다. 솔직히 이거 하나만 잘 지켜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기본을 지 키지 않는다.
“문주님도 잘 짓밟아줘야겠지.”
홍보에 열을 올리느라 훈련을 게을리 해선 안 되었다. 대선 주자 이전에 금강 문의 문주이자 경쟁자였다. 세계 최강 의 대선주자로서 활약하려면 훈련은 필 수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잘 키운 문주 하나 열 문주 안 부럽다 고.
정우는 곧장 케이브를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깨달음을 얻었으면 바로 시작해야 한 다.
‘단계는 의미가 없었어.’
10단에 집착하지 말았어야 했다. 집 착을 할수록 손에 쥔 모래알갱이와 같 았다. 궁극의 영역은 그 자체로 무한을 그린다. 규정된 틀에 놓아서는 도달할 수없다.
오늘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다.
‘궁합 좋네.’
하라와는 밤에도 낮에도, 여러모로 잘 맞았다.
그녀와의 격렬한 다툼이 좋다.
남궁세가와의 전쟁 이후 팽가의 남은 무인의 수는 다 합쳐도 1천을 넘지 않 았다. 절반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 고, 남은 절반은 주력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과거에 비하면 상전벽해라 할 전력의 약화다. 하물며 가주는 부상으로 일선 에서 물러나 있었다. 대호법과 장로원 이 중심을 잡고 있긴 하나, 완벽하진 않 다.
이런 와중 세가 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적금단과 세가의 무인들 간의 미묘한 간극이 점차 벌어졌다. 대호법이 친히 적금단을 가르치면서 반감이 쌓여갔다. 팽가를 구한 영웅이라는 도금이 벗겨지 면, 그땐 어떤 사달이 벌어질지 예측불 허다.
‘서운하게 하면 안 되는데.’
당명희는 팽가의 묘한 분위기 속에 숨어 있는 반감을 읽었다.
당장은 대호법이란 자의 그늘이 필요 해 숨을 고르고 있지만, 언제든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은 관심에서 멀 어진다고 여길 때 서운함이 커진다. 이 때 기회를 만들어주면 쌓여 있던 서운 함이 폭발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 러가기 마련이다.
‘위로를 해줘야겠지.’
팽가와의 협상은 명분을 얻기 위한
수단일 분, 본래의 목적은 대륙의 지배 권을 늘리는 것이다. 당문의 이름으로 팽가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오대세가 를 집어삼킬 계획이다.
그녀는 남궁세가의 오만함을 비웃었 다.
힘만 믿고 설치다가 패가망신을 면치 못한 것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면 모를까, 준비하지 않고 서두른 대가는 처참했다.
‘그 오만함이 우리에겐 기회가 되었지 만.’
사천당문은 정파의 일원임에도 독을
쓴다는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 러한 반감에서 벗어나려면 누구도 함부 로 견주지 못할 힘과 세력을 가져야 한 다. 독을 쓴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로 강력한.
이극이 별채로 찾아왔다.
“대호법이 독대를 수용했습니다.”
“고마워요.”
“감사는 성공했을 때 하시오.”
“그가무섭기는 한가 보네요.”
“당연히 무섭소, 그는 오만하지만 젊 습니다.”
“충고로 받아들일게요.”
이극은 당명희를 대호법에게 안내했 다. 그녀의 정체를 세가에 알리지 않았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대호법분 이다.
‘으음.’
대호법의 거처에 당도하자 강렬한 패 기가 전해졌다.
당명희는 이극의 충고가 과하지 않음 을 느꼈다.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대호 법의 성향이 그려졌다. 본인에 대한 자 부심이 강한자다.
“당 총관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이극은 예를 올린 후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