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입질이 오다 (1)
어둠이 하늘과 대지를 장악한 시간.
하늘은 맑지 않았다. 검은 구름과 안 개비가 월성(月星)을 가려 칠혹 같은 어 둠을 자아낸다. 검은 그림자가 지배하 는 가운데 장원을 비추는 빛이 안개비 에 굴절되어 스산해 보인다.
현재와 과거가 조우한 고루거각으로 이루어진 장원, 규모가 상당하다. 눈대 중으론 짐작조차 되지 않을 높은 장벽 이 장원을 둘러치고 있었다.
장원의 정문엔 사천당가라 적힌 현판 이 자리했다.
그랬다.
장원은 오대세가의 한 축, 사천당가다. 청성파, 아미파와 함께 정파에 속하며 사천을 삼분하는 거대세력이다.
암천관(暗天館).
장원의 중심, 사천당가의 핵심 수뇌부
가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장소. 근 래에 들어 자주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 다.
음영이 뚜렷하며 사각의 턱을 지닌 중년의 사내.
그가 당가의 가주 독왕(毒王) 당명천.
검왕, 도왕과 함께 오왕의 일인으로 불린다.
“예상을 빗나갔군.”
“송구합니다.”
당가의 총관으로 대소사를 관리하는 독봉(毒!峰), 당명희.
나이가 오십에 이르렀음에도 이십대
중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당명천의 동 생이기도 하다. 송구하다는 말과 달리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예상과 다르 다 해도, 결과적으로 최상의 시나리오 였기 때문이다.
“다른 가문에 비해 우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도 할수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과거와 달리 교통이 발달했다고 해도 대륙은 넓다. 사천성에 본가를 두고 있 는 당가와 달리 황보세가와 제갈세가는 산동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무너지고 무주공산이 되
어버린 안휘성은 각 세가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본격적인 세력의 충돌은 벌어지고 있지 않지만, 태풍 전 야일 분이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균형을 위해 세가 간의 다툼을 자제하 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형세에 불과했 다. 서로 싸워봤자 이득이 아니기에 때 를 기다렸다. 무엇보다 제갈세가와 황 보세가가 안휘성을 차지하면 가문 간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다.
사천성은 예로부터 다양한 문파가 힘 을 겨루고 있으며, 현재는 아미파와 청 성파가 구심점이 되어갔다. 세력을 넓 히려고 해도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당 장 아미파와 청성파를 건드렸다가는 구 파일방과의 전면전도 각오해야 했다. 그러니 더더욱 안휘성이 중요해졌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말해보거라.”
“안휘성을 당장 차지하는 건 좋지 않 습니다.”
“좀 전과는 다르지 않느냐.”
“안휘성은 남궁세가의 대지입니다. 비 록 검제와 검왕이 팽가에 당했다고는 하나, 남은 잔당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협상을 해야할때입니다.”
당명희의 발언은 가주뿐만 아니라 장 로들에게도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제갈 세가와 황보세가는 안휘성의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서 지부를 건설하기에 바빴 다. 이미 상당수의 무인을 안휘성으로 파견했다. 이런 때에 행동이 아닌 협상 이라니, 안휘성을 장악하겠다는 목표와 어긋났다.
“혹시 남궁세가의 잔여세력과 손을 잡자는 것이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설령 손을 잡는 다 해도 검제와 검왕이 죽고 후계마저 행방이 묘연합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세가의 인정을 받기는 힘들지요.”
“하면 대체 누구랑 협상을 하겠다는 거요, 제갈세가와 황보세가가 순순히 응하지는 않을 텐데.”
“이번 전쟁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세가도 제삼자에 불과합니다. 명 분이 없기는 다른 세가와 마찬가지긴 하나, 당사자가 남궁세가만 있는 건 아 니지요.”
발상의 전환이었다.
당명희의 해석에 모두는 감탄을 터뜨 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까지 안휘성 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의 당사자를 철저히 배제시키려고 했었다. 그들이 나서면 여러모로 껄끄럽다고 봤다. 하 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당사자야말로 권 한이 있었다. 명분을 세우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방법은 없었다.
“협상만 된다면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 과연.”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명희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녀가 단순히 가주 의 동생이기에 총관에 오르진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좋다, 실행하라.”
“예, 가주.”
-아빠는 홍길동 봤냐?
?웃다가 사레 걸릴 뻔했다. 진짜로 날 아다니면 어떡하냐고!
?술래잡기하는데, 분신술을 쓰면 어 떻게 잡아?
-호신강기에 손에선 장풍 나가잖아.
-예능 맞냐, 액션 지리던데.
금강문주는 ‘아빠는 홍길동’에 출연했 다.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가장의 고단한 하루를 보여주는 일상 예능이다. 물론 누구도 일상 예능으로 보진 않았다.
예상대로 금강문의 일상은 색달랐다.
직업이 무인이다 보니, 일상이 액션 블록버스터다. 그걸 있는 그대로 담아 내기만 해도 예능을 한 차원 다르게 승 화시켰다.
이른바 액션 블록버스터 일상 예능이 라는 타이틀로.
이뿐이랴.
효린이가 방송에 나오면서 인기가 급 상승하고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효 린이는 성 여사의 미모를 고스란히 흡 수해 시청자의 눈을 호강시켜 주었다.
-와, 인형이다, 사기 캐 아니냐!
-동 나이대의 여자애들 다 처바르겠 네!
■유전자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냐!
-당장 걸그룹 데뷔해도 되겠다.
아빠는 홍길동은 강 피디의 작품이다.
그의 손에서 10부작, 시즌제로 탄생 되었다. 처음에는 또 똑같은 포맷이 아 니냐는 비판이 있었지만, 약간 다른 주 제로 색다른 맛을 잘 살려내었다. 하물 며 간혹 보여주는 금강문주와의 티격태 격 신이 케미를 배가시켰다.
“다음 작품도 부탁드립니다.”
“또! 지금도 찍고 있으면서.”
“우리 사이에 또라니요, 섭섭합니다.”
“자꾸, 뭘 계속하라는 거야?”
방송이 몇 번 히트를 치더니 이거저 거 다 시키고 있었다. 투덜거리면서 하 고 있는 자신을 볼 때마다 이호극은 당 한 기분이 들었다.
“알아두면 편한 무공편도 괜찮고요.”
“난 초식은 신용 안 해, 역량부터 키
워야지.”
“그러니까요, 역량을 키우는 방법을 보여주는 겁니다.”
“한다는 게 아니잖아.”
“할 거면서요.”
“안해.”
이호극은 매일 찾아와서 자신을 방송 토템처럼 사용하는 강 피디가 굉장히 귀찮았다. 이 인간하고 방송을 하면 인 기는 올라가는데, 여러모로 사람 피곤 하게 만든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시키면 또 해야 하는 상황을 잘도 만든 다.
강 피디는 이호극을 공략하기 힘들다 싶으면, 성 여사와 효린이를 적극 활용 하고 있었다.
“어째 효린이는 볼 때마다 예뻐지네.”
“아니에요.”
“아니긴, 누구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아니냐?”
“맞아?요. 꼭 제 남자로 만들 거예요.” 효린이의 의지가 활활 타오른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감정이었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 누군가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편단 심일 것이다. 그때 가서도 변함이 없으
면 고려해보겠다는 망언을 번복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서운하시겠습니다, 문주님.”
“서운하긴, 린이의 사명인데.”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이란, 항상 바늘 방석이거늘. 남자친구를 환영하는 부모 는 흔치 않았다. 하물며 작업의식을 가 지란다.
“예‘?”
“아니다.”
딸 키워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던 강 피디로서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 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호극은 효린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금강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우를 혈족 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 변치 않는 딸의 마음을 아버지로서 열심히 응원하고 있 었다.
‘역시 내 딸!’
사람은 한 우물을 파라고 했다. 끝까 지 파다 보면 뭐라도 나오게 되어 있었 다. 정우라는 장벽이 어렵기는 하나, 인 생이 순탄한 길로만 갈 수는 없다. 효린 이도 자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만큼, 포 기란 없어야 했다.
“여하튼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강 피디, 자네 날 너무 우려먹는 거 같아.”
“우린다고 우러날 분도 아니면서.”
“어딜 만져.”
강 피디는 금강문주의 엄살도 좋게 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방송 의 아이템이었다. 뭘 해도 다 통하고 있 었다. 하물며 우린다고 해도 저 강철같 이 단단한 신체는 절대 우러나오지 않 는다. 흔들리지 않는 뚝심과 일관성이 방송 콘셉트와 어울리면서도, 간간이 보여주는 의외성이 핵재미를 선사했다.
“이번에 카메오로 오기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어?”
문파 안으로 여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사위를 집중시키는 스타의 포 스가 굉장하다. 시선 집중력 하나는 최 강이다.
현재 국민여동생에서 여신으로 거듭 나고 있는 유하라.
하라의 등장에 이호극은 물론 이효린 까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설마 했다. 진 짜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전번에 방송 잘 봤다고 한 말에 자극을 받았을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적과의 동침을 허락했을 줄이야.
하라가 만만치 않음을 직시하게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가라 고 했지.’
하라의 인기는 여전히 상당했다. 그러 나 경쟁 상대인 금강문주는 호락호락하 지 않았다. 하물며 예능 피디 중에서도 단연 원톱인 강 피디와의 조합은 이길 수가 없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섭외 가 왔지만, 콘셉트만 봐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럴 바에는 강 피디 사단으로 들어가서 경쟁력을 키우는 편이 낫다고 봤다.
‘쟤도 만만치 않아.’
하라는 효린이를 방송에서 보고 깜짝 놀랐었다. 마냥 어리다고만 봤는데, 어 느새 훌쩍 자라 국민여동생의 타이틀을 이어받으려고 했다. 정우의 마음이 쉽 사리 변하지는 않겠지만, 나태해지면 위험하단 판단이 섰다.
스윽!
이호극이 경계심 가득한 시선으로 하 라를 훑었다. 무인답게 가장 먼저 보는 건 외모가 아닌 전투력이었다.
“많이 강해졌구나.”
“문주님만 하려고요.”
“실력 한번 볼까?”
“방어만 하신다면요.”
이호극과 하라의 신경전이 상당했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이호극도 하라도 서로 경계하기는 해도, 실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빈틈없이 단단하시네.’
‘우습게 보면 곤란하겠어.’
강 피디의 준비성은 철저하다. 설렁설 렁 하는 것처럼 보여도 완벽주의자였다. 금강문주와 유하라의 티격태격을 재빨 리 잡아내었다. 촬영 후 비하인드 스토 리로 내보내면 아주 재미난 그림이 나 올 것이다. 실상 하라의 방송 커리어와 함께 유니크라는 점도 캐스팅 과정의 중요한 요소였다. 아무래도 일반인보다 는 안전 면에서도 확실히 우위에 있었 다.
‘예상대로야.’
강 피디의 방송 흥행을 위한 후각은 동물적이다. 톱 피디의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연이은 흥행을 하는 게 우 연이 아님을 증명한다.
밀실.
외부에서 내부를 연결하는 통로인 문 이 닫히면 진공 포장된 밀폐용기처럼 개미새끼 한 마리도 새어 나가지 않는 다. 통풍 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면 숨 막혀서 죽을 만큼 완벽한 비밀 공간이 었다.
룰루랄라月
어두컴컴한 밀실은 아니더라도, 홍얼 거리기에는 꺼림칙한 밀실이거늘, 음색 이 밝다. 음산한 기운이 뭉쳐져 있어, 조금만 있다 보면 음의 기운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귀신 보기 딱 좋은 정 서다.
하나 정우에게는 오랜만에 전생의 정 취를 만끽하는 추억의 장소였다. 과거 를 돌이켜 보면 현세가 보인다고 했으 니, 다크함이 유니크하다.
“캬아, 옛날 생각난다.”
그때는 음산한 공간에서 작당 모의를 수시로 하곤 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세상을 지배 할 수 있을까? 음모 양산의 공장장이었 거늘. 전략을 세우고 작전을 실행하면 매번 시산혈해를 이루어 진강백의 속을 뒤집어놓았었다.
물론 진강백이 역정을 내며 길길이
날?뛰었을 거라고는 단정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녀석이나 인간미하고는 거리 가 멀었으니까. 그저 정의를 위해서 최 선을 다했다는 짐작을 할 분이다.
“마의가 엉뚱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능력은 쩔었지.”
현대 의술과 최첨단의 생명공학을 배 웠다면 마의는 훨씬 더 대단한 병기를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쪽으로는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 았다. 독특함과 창의성만 놓고 보면 이 시대의 의사와 과학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매번 상상초월의 기발한 아이 템과 병기를 완성하곤 했으니까.
“그립다.”
말잘 통했는데.
정우도 마의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강함에 있어서 규격을 한정시키진 않는 다. 그때도 배울 게 있으면 배웠다. 본 인의 강함에만 도취되어 배움을 등한시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진강백 이라는 호적수가 없었다면, 나 잘난 맛 에만 살았을지도 모른다.
“요걸, 반쯤 섞고.”
정우는 연구를 게을리하진 않았다.
“내가 베끼는 건 좀 했지.”
마의보다 창의력 면에서 떨어지기는 했어도, 습득력 하나는 천하제일이다. 마의가 나중에는 그만 좀 단물을 빼먹 으라고 투덜거린 적도 있었다.
어떤 면에서 정우는 주군임과 동시에 친구이자 제자였다. 마의는 나이가 꽤 많았다.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은 흔 치 않았다.
“신독은지금 봐도 굉장해.”
명품은 세월이 흘러도 명품이라고 했 던가.
신독(神毒)이 그렇다.
말 그대로 신을 죽이는 독.
절대고수마저 한 줌의 혈수로 녹여냈 던 희대의 극독, 무형지독은 가분히 뛰 어넘었다. 마지막 연구가 끝나기 전 진 강백이 기습하는 바람에 써먹지 못한 건 아쉽게 되었다. 6번째 인생에서 만났 다면 신독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다 됐다.”
정우는 완성된 시약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작업 중 약간의 오류가 있어 고생은 했지만, 시술 재료는 제작이 끝났다. 이 제부터는 투여를 하고, 완성품을 기대 하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