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통수는 5번으로 족해 (2)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왜, 네 여자를 곤란하게 해서 짜증 나냐?”
“세경이 뭔 잘못이야, 장인어른이 잘 못한 거지.”
“요즘 들어본 말 중에 가장 말도 안 되는 개소리구나.”
“아니, 왜?”
“가족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해도 되겠지.”
세상을 참 편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가족과 난 다르다. 그런 말은 가족을 떨 어뜨려 놓고 자생할 수 있을 때나 하는 말이다. 온갖 혜택은 다 받고 있으면서, 정작 문제가 있을 때는 자기 결정이 아 니라고 외면한다면, 그건 쓰레기나 다 름없다. 자립조차 하지 못한 자식, 부모 의 책임이 클 수도 있으나. 공생 관계인 이상 부정해봤자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덮어놓고 싸지른다고 부모는 아니지 만, 세경이의 모든 건 팽가에서 나왔지. 막말로 팽가가 아니면 프리패스 카드를 맘대로 사용할 수나 있었겠어.”
“하아, 넌 진짜 인정사정없구나.”
강천은 부정하지 못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더 열불 터진 다. 차라리 억지 주장이면 반박이라도 할 텐데.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이해 력이 딸리는 자신도 이렇게 잘 이해가 되는데, 두말할 수도 없다.
“틀렸어, 인정사정은 있지. 항상 합리 적인 결정을 하니까.”
“네똥 굵다.”
“똥은 네가 더 굵어.”
“……설마 농담한 거야?”
“웃기지‘?”
다 인정해도, 이건 절대 인정이 안 된 다. 좀 전까지의 합리성과 설득력도 개 그에 관해서는 논외 대상이었다. 이토 록 불합리하고, 안 웃긴 개그는 본 적이 없을 지경이다.
“이제 다 끝난 거 아냐?”
“끝나긴, 시작인데.”
“어째서?”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불합리하다면서.”
“감정이 상한 인간은 그딴 거 따지지 않거든.”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
“선택에 따라 달라질 거야.”
강천은 불안했다. 최악만은 피하고 싶 은데, 정우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문제는 정우의 예상이 빗나가지를 않는 다는 점이다. 세경이를 생각하면 정우 를 말려야 하지만, 실상 말린다고 뜻대 로 될것 같지 않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 기분이네.”
“헛소리, 그건 죽어버린 로미오와 줄 리엣을 모독하는 짓이다.”
“나와 세경이가 어때서?”
“딱 봐도 아니잖아.”
어딜 감히! 무덤에 파묻힌 셰익스피어 가 경기를 일으키겠다. 네가 로미오고 세경이가 줄리엣이면 수많은 사람들에 게 죄짓는 행위다. 사람들의 마음에 남 아 있는 고귀한 사랑에 대한, 정서테러 다.
팽 가주가 돌아왔다. 함께 갔던 2천의
무인 중 남아 있는 건 6브개, 그 안에서 온전한 무인은 절반에 불과했다. 세가 의 역사에 길이 남을 참상이었다.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면서 최 악의 사태를 맞이했으니 아이러니하다.
팽우경은 무너져버린 가문을 보며 망 연함을 지우지 못했다. 웅장함과 화려 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바람만 불어도 부서질 폐가가 남아 있었다. 그 나마도 남아 있는 가솔이 정리를 해서 이 정도다.
빠드득!
악다문 입술에서 뼈가 어그러지는 소
리가 들린다. 팽우경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세경 이 나와서 인사를 올렸음에도 본체만체 했다.
팽세운도 그동안의 고초를 상기할 만 큼 초췌해져 있었다. 가문의 후계로 인 정을 받고 세가를 떠날 때만 해도 자신 감이 넘쳤거늘, 패기를 잃어버렸다.
부르르!
팽우경은 자신의 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격노했다. 하늘을 향 해 원망의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언 제까지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순 없었 다. 세가를 정비해야 한다. 곧 다른 세 가에서도 이번 사태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그 전에 가문을 정비하고 온전 하다는 걸 확인시켜야 했다.
“조속히 가문을 정비하고, 외부의 시 선을 차단한다.”
“예, 가주.”
한 달이 홀렀다.
하북팽가는 전력을 다해야 했다. 가문 에 남아 있는 모든 인력과 재력을 쏟아 부었다. 그리하고도 온전한 모습을 찾 기가 어려웠다. 무인과 속성능력자, 인 력을 대거 동원하여 가문의 외형이나마 원래의 형태로 복원은 시켰다.
남궁세가는 공격을 당하기 전 가문을 비웠다. 그 인원은 지부나 안가로 분산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남궁세가의 본 가에서 얻어낸 건 많지 않았다. 그럼에 도 지부나 안가를 찾는 데 시간을 쓸 여 유가 없었다.
하북팽가는 산서성의 절반을 얻었음 에도 실제로는 속 빈 쭉정이에 불과했 다. 이득은커녕 손해가 너무 커서, 안휘 성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지도 못하는 처지다.
“눈치를 챈 듯합니다.”
“돌아가는 정황은?”
“다른 세가에서 안휘성을 눈독들이고 있습니다. 당장은 명분을 세우는 데 주 력하고 있지만, 결국 속셈을 드러낼 겁 니다. 또한.”
“또 뭐?”
“소림에서 산서성의 지배력을 강화하 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의 연속이다. 남궁세가와의 격전에서 승리를 하고도, 공은 다른 세 가의 차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열불이 터지는 상황이다. 하물며 혹룡성과의 전투로 얻은 산서성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소림이 움직였다는 건, 구 파일방 간에 합의가 있을 공산이 크다. 가지고 있는 영역 이외에 산서 이북까 지 권역을 넓히는 과정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지부에 파견할 무인이 부족하잖아.”
“용병이라도 모집하는 편이 어떠십니 까?”
“세가의 형편이 어렵다고 동네방네 광고할 셈이더냐!”
팽우경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가를
정비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 이유는, 전체를 판단하고 조율할 머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팽자겸과 총관부에 소속된 가솔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정확한 판단 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은 혹금단이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미련한, 그것이 빌미가 될 수 있으니 까 그렇지.”
북무원주의 말에 화가 더 치미는 팽 우경이다.
흑금단이 계약을 파기하고 움직였기 에 남궁세가와의 결전에서 승리를 했다.
그 점은 높이 평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세가가 보기에는 외인을 끌어들여 승리한 꼴이 된다. 조사가 끝나면 그걸 빌미로 세가의 영역을 잡아먹으려고 할 게 분명하다.
“가주의 말씀대로, 흑금단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네.”
침묵으로 일관하던 우호법 팽우원이 입을 열었다.
혈검이 대외적으로 모습을 보인 반면, 그는 가주의 배후에서 움직이지 않았었 다. 하지만 세가의 사정이 어려워져 팽 우원을 비롯한 전대장로가 전면에 나서 고 있었다.
“이대로 가게 되면 금강문에 소속된 가문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보네만.”
“저도 그 말에 동의를 합니다. 지금이 라도 준비하지 않으면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팽세운도 한 수 거들 었다.
팽세기의 공적이 뚜렷한 반면, 본인은 공적은커녕 들러리가 되어 있었다. 이 번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혹금단 이 팽세기를 지원하는 이상, 어떻게 해 서든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다 행히 우호법과 전대장로가 흑금단의 개 입을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
팽우경은 아들의 속셈이 뻔히 보임에 도 내색하진 않았다. 아들을 나무라봤 자,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 되었다. 선택을 한 이상, 책임을 져야 했다.
“흑금단은 만만치 않은 전력입니다.”
“자칫 분열을 초래하여 세를 약화시 킬 수 있습니다.”
수뇌부의 절반은 회의적인 반응이었 다. 혹금단을 처리하려고 해도 간단치 가 않았다. 하물며 검제와 검왕을 동시 에 제압한 흑금단주가 버티고 있었다. 가주의 앞에서 내색할 순 없어도, 흑금 단주와 대립을 했다가는 엄청난 피해를 양산할 것이다. 어쩌면 다시 재기하기 도 어려울 수 있었다. 당장은 위험을 감 수하기보다 내실을 다질 때라고 봤다.
팽우경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다스리지 못하는 힘이 다.’
흑금단은 계약을 어겼다. 그 결정이 세가를 살렸지만, 팽우경의 명령을 무 시한 꼴이다. 하물며 이에 대해서 묻지 않도록 강제적인 계약을 이끌었다. 언 제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설 위험 도 크기에 제어를 해야 했다.
“이번 전투에서 그는 검제와 검왕을 쓰러뜨렸습니다. 신중을 기할 사안입니 다.”
“그렇기는 하나, 전투의 과정을 보면 실력만으로 이루어낸 결과는 아니야. 놈은 검제를 이기기 위해서 검왕을 사 로잡아 빈틈을 노렸어. 물론 그 자체로 대단한 역량이지만 공략 못 할 정도는 아니지. 하물며 남궁세가의 장로를 상 대한 건 따로 있다고 하더군.”
흑금단주의 무력도 상상을 초월하지
만, 그가 가지고 온 마녀와 기간트의 조 합이 아니었다면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 이다.
“하오시면 어쩌시려는 겁니까?”
“굳이 흑금단을 대적할 필욘 없지.”
팽우경의 자신감을 읽었을까, 회의적 이었던 자들도 말문을 닫았다. 방법이 설명될수록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 긍했다. 그대로만 진행된다면 세가는 천군만마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계 획이 죽은 총관을 통해 진행되었던 계 획이었다. 그가 세워놓은 계획을 은밀 하게 완성시켰다.
정우와 혹금단은 세가의 영웅이 되어 귀빈 대접을 받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반도의 오랑캐 라고 하여 무시하지 않았다. 기간트를 운용한 멋진 삽질이 각인되었다. 하물 며 검제와 검왕을 제압한 흑금단주다. 같은 무인으로서 젊은 나이에 절대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맘껏 먹고.”
“예, 단주님.”
정우는 흑금단에게 휴식을 내어주었 다. 북경 일대를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 고, 맛있는 것도 먹고, 돈을 펑펑 쓰라 고 했다. 당연히 모든 비용은 하북팽가 에서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영웅 대접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북경의 특급 식당의 지정된 방을 예 약한 정우는 코스 요리를 시식하고 있 었다. 각양각색의 요리가 줄을 잇는다.
드륵!
여닫이문이 열렸다.
치파오를 입은 여인이 몸매를 과시하 며 들어왔다. 몸 전체에 색기로 도배를 했는지 달아오르는 몸을 주체하기 어렵 게 했다.
“변신술이 대단하군.”
“단주님만 하려고요.”
독심호리 여운향^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모습을 변용하고 있었다. 실체 를 알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전 에 여운향은 본모습을 혹금단주에게 보 여주었다. 그건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믿음의 증거였다.
“원래도 예쁜데, 굳이 그럴 필요 있 나.”
“이 바닥에서 오래 살려면 어쩔 수 없
죠.”
“나는 믿고?”
“안 믿으면 나만 손해죠.”
여운향은 솔직히 놀랐다. 태원 지부에 서 권패를 가지고 놀기는 했어도 상대 는 검제와 검왕이었다.
‘탁월한 선택이었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흑금단주 는 무서운 자다. 또한 심기가 굉장히 깊 었다. 전투력만 강했다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지 않았다. 이용하기 딱 좋은 대상이니까. 반면에 혹금단주는 이용은커녕 적이면 가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