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엇갈림 (3)
휘리릭!
정우의 휘젓는 손짓에 열 명의 대원 이 바늘에 꿰인 실처럼 엮여 들어가더 니, 탈곡기에 털린 낱알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단순한 손짓이 아닌, 의념 (意念)이 실려 있었다. 의지가 공간을 잡 아채고 있으니, 영역에 닿은 자들은 속 절없이 당할 수밖에. 빠져나가려면 정 우의 의형을 넘어서야 했다.
저벅, 저벅!
정우는 막아서는 검대를 뚫어내고 있 었다.
휙휙!
쿠다다당!
파리를 쫓듯 좌우로 휘젓는 손짓에 말려들어간 대원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복수는커녕 허무한 최후의 연 속이었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알면 달라져.”
이름하고 별호가 그렇게 중요하나?
이름이 가진 무게가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현재는 해 당사항이 없었다. 별호가 높다고 해서 전투력이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무 명이라고 해서 낮아지지 않는다. 사기 (士氣)적인 측면에서 이득을 볼 수도 있 으나, 그것도 차이가 크지 않을 때나 가 능한 일이다. 사기가 증진되었다고 해 도 개미는 개미, 주식투자의 공매도가 가능한 공룡에게는 개미지옥이었다.
저벅, 저벅!
50명을 쓰러뜨리고 나니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수월해졌다.
곳곳에서 비명이 울리고 있는 걸로 봐서, 대량학살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 었다. 정우는 내 집이 아니기에 대수롭 지 않아 했다. 되놈이 되놈을 죽이면, 이놈되놈■이라고 해야 하는지 말 같지 않은 고민부터 해봤다. 이 와중에도 개 그력의 보완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정우만의 독 특함이다.
‘좀 빠르나?’
시간 약속을 정한 것도 아니니 적당 히 맞춰서 가면 되었다.
정우는 설렁설렁 정해진 길을 따라가 면서 막아서는 놈들만 저세상으로 보내 주었다. 화창한 봄날 나들이를 하고 있 는 사람처럼 산뜻해서 전장과는 어울리 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넋 놓고 있다가 당하 는 경우가 허다했다. 관광객이 지나가 는데, 일일이 아는 체를 하지 않는 휴양 지의 주민처럼.
“다 왔네.”
시선이 향한 곳에 주검이 널려 있었
다. 그중에 인연이 있던 자들도 꽤 보인 다. 특히 한국에서 같은 배를 탔던 맹호 십도도 포함되었다. 천지분간 못 하고 나댈 때부터 싹수가 보였거늘, 예상대 로 죽어버렸다. 잘 죽었다고 염불은 외 워주지 않았다. 듣보잡을 일일이 기억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 했 다.
“적당히 나댈 것이지, 쯧쯧. 내 그럴 줄알았다.”
맹호십도의 주검은 멀쩡하지 않았다. 잘려 나간 신체가 따로 떨어져 있었다. 재생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속성이다.
쿨럭!
벽에 기댄 채 선 자, 그만 홀로 남았 다. 남은 자들은 전부 주검이 되어 꽃다 발처럼 펼쳐져 있었다. 물론 상대가 마 음을 먹었다면 진작 저세상으로 직행했 을 텐데, 굉장히 느긋했다. 승부의 추가 완전히 기울어진, 승자의 여유라고 보 면 적합하겠다. 텅 빈 가문을 무주공산 으로 입성하고, 학살을 자행하고 있으 니 정파인의 마지막 양심일 수도 있고.
“다행히 죽기 전에 보게 됐습니다.”
“……혹금단주!”
팽자겸의 육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예리하게 베어진 옷 사이로 연신 핏물 이 홀러나왔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건 그의 의도와 관계가 없다. 검왕의 여유 가 삶을 연장시켜 주었을 뿐이다.
맹호십도의 일호를 죽인 후, 검왕은 나서지 않았다. 제왕검대만으로 맹호십 도와 세가의 무인을 도륙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자리에서 혹금단주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꿈틀!
검왕과 귀성도 낯선 자의 등장에 미 간을 찌푸렸다.
계산된 전략의 범위 밖의 존재가 등 장했다. 상황에 따라 발생할 변수를 충 분히 염두에 두었지만, 산서성에 있어 야 할 절명사신의 등장은 의의일 수밖 에 없다. 그들조차도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지 못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았 다.
정우는 팽자겸을 보며 위로를 해주었 다, 말로만.
“이런, 치명상을 입으셨구려.”
“……어째서 여기에?”
“당연히 남궁세가가 공격할 줄 알았 으니 왔지요.”
“……알았다고?”
정우의 대답에 팽자겸은 물론 검왕과 귀성도 놀랐다.
알고 있었다면 팽가는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팽가는 대비는커 녕 무방비로 남궁세가의 습격에 시산혈 해를 이루고 있었다. 전후의 사정이 맞 지 않았다.
기력이 다해가면서도 언성이 높아?진 팽자겸이다.
“……알고 있으면서 왜 말하지 않은 것이냐?”
“절 희생양으로 쓰지 않았습니까.”
팽자겸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태원 지 부는 남궁세가의 습격에 불바다가 되어 야 했다. 그 틈에 남궁세가를 쳐서 끝장 을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웬걸! 혹금단 주는 돌아가는 정황을 모두 알고 있었 다.
“말한들 믿지 않았을 테고.”
“?이노옴……
정우는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모두 다 사실이다. 지부를 공략하지 않고 본 가를 노린다고 전해도 팽가는 믿으려 하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살기 위해 수 를 쓴다고 오해를 했을 게 분명하다.
부르르!
소모품이 되어버린 팽자겸은 치를 떨 어야 했다. 흑금단주를 이용하기는커녕 되레 이용당하고 말았다.
**.죽어서도..용서하지...!”
팽자겸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치 명상과 심적인 충격이 연이어 오자, 버 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그야말로 허무한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정우는 곧 흥미를 잃었다.
인간은 살아 있을 때나 가치가 있지, 죽으면 썩어버릴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 자리에서 죽은 건 계획 의 일부다. 팽자겸은 팽가의 두뇌다. 병 기에 대해 일부러 홀렸다는 걸 눈치챌 가능성도 있었다. 머리 돌아가는 놈이 있으면 곤란하기에, 그 전에 처리해야 했다.
“지금이 딱좋지.”
팽자겸이 죽기 전에 나타날 수 있었 음에도 정우는 목적을 위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로를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했 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먼저 그따위 허 접한 수를 쓰지 않았으면 아름다운 공 생관계가 되었을 텐데. 인간의 추악한 욕망은 공생을 원치 않았다.
스윽!
정우의 시선이 검왕을 향했다.
남궁천도 피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나?”
“번한 수니까.”
“그 뻔한 수에 팽가는 당하더군.”
“그거야 팽가니까, 그렇지.”
심기를 긁어대는 말에도 남궁천은 서 두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 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을 리 없다. 제왕 검대가 겹겹이 지키고 있음에도 버젓이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절명사신은 범 상치 않았다.
“전략을 꿰뚫어 본 건 칭찬해주마. 그 러나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
남궁천은 팽가와 절명사신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파악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협상을 하고선 희생양으로 버렸 으니 좋아질 수 없는 관계다.
“혼자도 관계없지만, 혼자는 아니야.”
“혹금단이 왔나 보군.”
“놀라지 않네?”
“그런다고 전세가 바뀌진 않는다.” 당황스러운 전개이기는 하나, 남궁천 을 흔들진 못했다. 그는 본인의 실력과 남궁세가의 무력단을 믿었다. 3천의 무 인을 데리고 온 반면, 혹금단이라고 해 봐야 2백을 넘지 않았다. 권패와 귀창 대, 전검대를 제압하기는 했어도, 수의 차이를 이겨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머릿수를 믿는 모양인데, 안 될걸.”
“반도의 애송이가 명성을 얻더니, 세 상이 작아 보이는 모양이지.”
“너희가 좀생이란 건 알지, 어쨌든 다 모였으니 한판 뜨자.”
“곧 차이를 깨닫게 해주지.”
남궁천의 두 눈에 살의가 담겼다. 조 금 전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거슬렸다.
한편으로 반도의 오랑캐만 아니면 세가 의 발아래 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 러나 대중화의 순혈로서 오랑캐를 받아 들일 순 없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갑자기 증폭한 기경이 거대한 와류를 이룬다.
꽈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이 일어났다. 위 력은 멈춤 줄 모르고 끝을 향해 내달렸 다. 기경을 막아선 남궁세가의 무인들 이 버티지 못하고 피륙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공간을 뒤덮은 핏물이 가라앉 기도 전에 여인이 정우의 후방을 쇄도 해 들어와 자리했다.
씨익!
정우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지원군이 있다는 듯 가슴을 탕 탕! 두드리며.
“어때?”
남궁천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최후가 되면 절명사신이 빠져나갈 수 도 있기에 만약을 대비해서 장로들을 불렀다. 세가의 전대장로까지 포함해서 열 명이다. 이들이 있다면 혹금단주가 무슨 수를 써도 살아 나가지 못한다. 한 데 또다시 변수가 등장했다. 제왕검대 를 공력으로 쳐내버리고 뚫고 들어왔 다.
‘공력만 놓고 보면 아래가 아니다.’
남궁천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계집의 신위는 둘째 치고, 쏟아낸 경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경지를 넘어서는 공력을 가지고 있었다. 섣불리 대적해선 안 된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언제까지 지켜만 볼 거지?”
홈칫!
어둠의 장막으로 가려진, 빛이 넘보지 못하는 사각의 빈 공간. 정우가 말하자, 어둠이 먹물처럼 파장을 일으키며 동요 를 한다.
남궁천의 안면에 놀람이 자리했다.
‘ 설마?’
빈 공간 속에서 흩어졌던 기감이 완 성되어 실체를 드러낸다. 어둠을 이불 처럼 쓰고 있었다. 곧 백발이 성성한 왜 소한 체격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지팡 이를 짚고 선 폼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 해 보이는데, 섣불리 다가서길 거부한 다.
“놀랍군.”
“머리카락이 보였거든.”
숨바꼭질의 기본을 모르니, 들키지.
하나 그 말은 노인에게 통용되지 않 았다. 그의 동화술은 초월경에 도달해 있었다. 감추고자 한다면 살왕(殺王)이 라고 해도 찾지 못한다. 다른 이도 아니 고 반도의 오랑캐에게 동화술이 발각될 줄은 몰랐다. 감각이 놀랍도록 예민하 거나, 공간 속성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쨌든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었다. 감각이야말로 무인의 전투 력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니 까.
노인은 동화술이 밝혀졌음에도 동요 하진 않았다. 제왕의 무게를 오랜 세월 떠안은 그의 부동심은 철과 같이 단단 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처음부터.”
“팽가가 호랑이를 불러들였군.”
“곧 죽을 자의 평가는 달갑지 않은 데.”
“하하하, 입심은 더 대단하구나.”
남궁천과 혁리무군, 장로들마저 절명
사신의 도발에 혀를 내둘렀다. 다른 이
도 아니고 남궁세가의 전대가주다. 남 궁천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전까지 검제 (劍帝)로 불렸었다. 일선에서 물러났다 곤 해도 자타공인 최강의 검수다. 검의 제왕 앞에서 저런 망발을 지껄이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검제 남궁휘.
보통은 분노해야 하건만 노인의 심기 는 잔잔한 호수의 수면과 같았다. 도발 에 흔들리지 않는 연륜과 경험이 자리 했다.
“평정심이란 건 말이야, 한없이 단단 하다가도 한없이 약해지더라고. 오늘 그걸 가르쳐줄게.”
정우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반응이 이상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능 력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이 있다면 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능력과 신념이 무너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끝까지 의지를 관철한다면 그때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좀처럼 못 봤다.’
인간은 강철처럼 단단한 신념을 지니 기도 하나, 유리잔처럼 쉽게 깨지기도 한다. 양면성과 다양성,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극과 극, 흑과 백.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못한 다.
“허세가 지나치면 만용이라고 하지,
어디 그 만용을 한번 보여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