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개미지옥 ⑴
‘저럴 수가!’
창천검대를 압도하는 흑금단의 활약 에 이극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현실 파악 못 하고 달려드는 불나방의 객기 가 아니었다. 일전에 사흑문을 대적할 때와는 또 달라졌다. 어쩌면 그동안 전 력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던 걸 수도 있 었다. 고의적으로 보여준 진의만을 믿 고 전략을 짰으니, 대공자의 실패는 당 연했으리라.
‘자신감의 발로였구나!’
기습을 해도 어렵다고 봤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반대의 현실 이 기다리고 있었다. 혹금단의 무시무 시한 전력에 이극은 기가 질렸다. 광기 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전투는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저런 광경은 귀영각주에 올라서도 본 적이 없었다.
흠-
정우는 창천검대를 제압해나가는 흑 금단의 눈부신 활약에 묘한 표정을 지 었다. 평소처럼 하라고 했거늘, 평소보 다 더 집요했다.
‘너무 조였나.’
혹금단의 광기가 예상보다 더 미쳐 있었다.
돈줄을 막아놓고, 극소량으로 개방한 후유증이 나타났다. 마치 고블린이 반 짝거리는 물건을 광적으로 탐하는 것처 럼.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200명의 혹금단 중 뒤에 선 50명은 전투에 참여 하지 않고, 쓰러진 창천검대를 탈탈 털 고 있었다. 마치 방앗간에서 쌀을 도정 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양말조차 남기 지 않는다.
사람은 맨몸으로 태어나 맨몸으로 간 다고 하지만, 홀딱 벗겨진 창천검대의 부끄러움은 남궁세가의 몫이었다.
부들부들!
창천검대가 털리는 광경에 남궁진은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인정하 기는 싫은 현실이지만, 오랑캐가 창천 검대를 압도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창 천검대는 전멸한다. 치욕스럽더라도 나 서야 할 때다.
의지가 곧 검으로 투영, 신검합일을 이루어 검형을 완성한다. 목표는 흑금 단의 전면에 선 자들, 기세를 끊어낼 필 요가 있다.
스왁!
검경을 발출할 찰나.
스치고 지나간 예리한 기운이 남궁진 의 심와(心W를 서늘하게 했다. 무시하 고 검경을 출수했다가는 위험하다는 경 종이 울렸다. 기공을 실타래처럼 뿜어 내어 육신을 호신강기로 보호할 수도 있겠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휙!
보는 것만으로 심혼(心魂)을 베어버릴 날카로운 기경, 공력의 출회수가 입신 지경을 넘어서야만 가능하다.
그런 자를 경시할 만큼 남궁진은 무 모하지 않았다.
돌아선 시선 속에.
느긋하게 칼을 빼 든 흑금단주가 서 있었다.
“공격하지 그랬어.”
공격하는 타이밍에 암습을 가하겠다 는, 의도를 훤히 내비쳤다.
천한 살수나 하는 짓이다. 무인이라면
응당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일임에도 당 당하니 남궁진의 심기를 지속적으로 건 드렸다.
“반도의 썩어빠진 오랑캐답게 비겁하 구나!”
“대국의 당당한 무인께선 수단방법을 가리라고, 난 가리지 않을 테니까.”
가려주면 고맙지, 무인다운 멋있는 죽 음 따윈 세상에 없다. 죽은 자가 부끄러 움이나 수치를 느끼는 것도 아니고. 실 상 죽은 자의 명예는 산 자를 위해서 존 재할 뿐이다.
남궁진의 기도가 서늘하게 변했다.
“한 줌의 이득에 득의해하지 마라!”
“한 줌치고는 많은데.”
쓰러진 창천검대의 수가 절반을 넘어 가고 있었다.
태원 지부의 평무인이 남아 있기는 하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주요 전력은 창천검대와 철면검호다. 두 가지가 사라지면 태원 지부는 오합 지졸이나 다름없다.
“오랑캐 따위가 감히 대중화의 무인 을 농락하려는 것이더냐!”
비꼬기 신공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 는 정우였다.
현실을 적절히 이용하기에 사실적이 며, 현장감이 넘쳤다. 이로 인해 철면은 깨져버린 유리잔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후우우!
폭발해버린 분노, 남궁진은 심호흡을 해 가라앉혔다. 오랑캐의 격장지계에 흔들렸음을 깨달았다. 전투에서 흥분은 극독이었다.
“허튼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나 봐, 그러는 동안에도 죽 어나가는 수하들이 가엽지도 않나.”
정우는 지속적으로 염장을 건드렸다.
남궁진의 두 눈에서 한광이 번져 나
왔다. 분노를 완전히 갈무리했다. 오랑 캐의 수작에 넘어갈 때가 아니었다.
“죽여주마.”
철혼기(鐵魂氣)를 바탕으로 하여 완성 된 남궁세가의 비기, 철검육식(鐵劍A式) 을 꺼내 들었다. 철검육식은 원래 십 식 으로 구성이 되었으나, 오랜 고련을 거 쳐 육 식으로 재탄생했다. 초식이 줄어 들었다고 해서 위력이 줄어들지는 않았 다. 검형의 오의가 압축되어 새로운 형 식으로 바뀌었다.
이를 완성해낸 자가, 남궁진이다.
차기 검호로서, 남궁세가의 일대검객
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재능이다. 직 계가 아닌 방계임에도 검왕의 맥을 잇 는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육신의 기맥을 회전한 철혼기가 남궁 진의 검형을 완성해나갔다. 유형의 기 운으로 중첩되어 완성된 검강이다.
우우웅!
1미터에 육박한 검강의 위용은 상당 했다.
파아앙
남궁진은 주저하지 않고 일수유(一煩 與)를 펼쳐, 철검육식의 단혼파(斷魂破) 를 부렸다. 혼을 자르고, 부수는, 극강 의 패검이었다.
콰아아앙!
찰나지간 충돌이 일어났다.
광폭함의 결정체, 발생된 파장과 편린 이 공간을 어지럽게 난도질했다. 극강 공력의 상충에 일대가 들썩였다.
후아앙
후폭풍이 휩쓸고 나아감과 동시에 검 과 도가 무수히 많은 그림자를 그려냈 다.
철검육식의 뇌검영(雷劍影)이었다. 수 놓은 그림자는 허상이 아닌, 실제의 완 성된 검형이다. 일기일검(一氣一劍)의 경 력이 집중되어 파괴력을 더했다.
투앙, 투아앙
시끄러운 굉음의 연속. 강기와 강기의 충돌로 빚어낸 합작품은 여기저기에 빛 의 포화를 자아냈다. 섬광이 번뜩일 때 마다 심혼이 부서져 나가는 충격이 공 간을 지배했다.
합의 맞춤이 일목요연하다. 어느 하나 도 맞춤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없 이 완벽한 교합을 이룬다.
그것이 남궁진의 뇌리를 섬뜩하게 했 다.
‘……오랑캐 따위가 어떻게?’
일합으로 끝을 내려고 부렸던 단혼파 를 막아냈을 때 검신을 타고 흐른 기경 은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났다. 자칫 잘 못했으면 철혼기가 일합으로 무너져 버 릴 뻔했다. 강철같이 단단한 철혼기가 이토록 흔들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뿐이랴, 단혼파가 통하지 않아 백철광 (白鐵光)과 뇌검영을 연이어 펼쳐내었음 에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
“재롱다 부렸냐?”
“건방진 놈!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흠집조차 내지 못한 현실에 남궁진의 이성은 무너져 갔다. 방계로서 이 자리 에 오르기까지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한데 반도의 오랑캐 따위에게 조롱거리 가 되고 있었다. 참기 힘든 모멸감이 휘 몰아쳤다.
-철검육식, 극의 철혈탄〈鐵1炭).
속성개방, 전력저하!
철혈탄은 남궁진조차도 몇 번 사용해 보지 않는 최강의 초식이다. 이분이랴, 8급의 유니크 속성, 전력 저하를 증폭 시켰다. 본인을 중심으로 한정된 공간 일수록 전력저하 속성의 위력이 강해진 다.
슈아앙!
남궁진은 일수유를 극한으로 밟아 거 리를 좁혔다. 철혈탄의 파괴력이 지나 치게 강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지만, 주 저하지 않았다.
“끝이닷!”
거리를 잡았다.
검형이 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 다. 비슷한 경지라고 해도 전력 저하에 당하게 되면 가지고 있는 능력의 3분지 1도 발휘하지 못한다.
쿠아아앙!
강기를 응축하여 단숨에 폭발시키는 수법이 철혈탄이다.
일순 공간이 흔들리며 균열이 발생하 듯, 파장이 범위를 넓혀갔다. 촘촘히 일 어난 날카로운 편린에 스치기만 해도 영혼까지 갈가리 찢겨 나갈 것만 같다.
후아아
나선으로 휘몰아치는 후폭풍은 용의 숨결처럼 무시무시했다.
지부 전체가 영향을 받아 부스러졌다. 일정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버 티지 못하고 바람에 휘말렸다. 억울하 게 휘말린 자들도 있을 수 있으나, 둘에 게는 의미가 없었다.
부르르!
멈춰 선 공간.
남궁진의 안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두 눈엔 의문과 불신이 복잡하 게 뒤섞였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결 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의 가슴이 선혈로 적셔지고 있었다. 심장을 관통한 칼이 등을 뚫고 나와 핏 물을 머금었다. 육신을 완벽히 보호해 주었던 철혼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이 말 같지도 않은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했다. 찢겨진 육신의 내부, 식 도에서 핏물이 목구멍으로 솟구쳐 오른 다.
“……대체…… 어떤 사술을 부린…… 것이냐?”
“사술? 그렇게 안목이 없어서야.”
대국이든 소국이든, 나라의 힘이 개개 인의 역량을 평가하진 않았다. 나라가 강하면 개인도 강하다는 착각을 하고 사니, 우물 안 개구리 소리를 듣는 거지. 무엇보다 천재는 나라를 가리지 않는다. 약소국에 태어나 비루한 인생으로 전락 했다면, 그자는 천재가 아닌 범인에 불 과한 것이다.
“……난 대남궁세가의 무인이다……
모욕하지 마라!”
“너 따위가 뭐라고.”
“……그럴 리 없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 된다.
속성을 사용해 전력이 약화되었음에 도 철혈탄을 막아내고, 반격을 가했다. 그것이 사술일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 가. 하찮은 잡술이나 사술에 당할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기를 바랐던 것이 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차。], 속성으로 전력이 약화되어도 의미가 없었다. 비 교를 하면 코끼리와 개미의 차이였다. 코끼리의 힘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고 해서 개미가 상대가 되겠는가.
“?…"네놈은 대?…"체?”
“오랑캐에서 격상했네. 그래도 되놈보 단 낫지.”
삶의 기력이 빠져나가고 있는 남궁진 의 시야는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죽어가는 와중 남궁진은 생명의 끈을 쉬이 놓지 못했다. 모든 전력을 쏟아내 고 속성까지 개방했음에도 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오랑캐라 폄하 했지만, 진실한 실체는 세상을 잡아먹 고도 남을 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괴물이 세가를 노린다.
“……세가는…… 안 돼!”
“호오, 가문 사랑이 대단하시네. 하지 만 인구 많으니 괜찮아. 너 가는 길에 같이 보내줄 테니까, 외롭진 않을 거 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편안하게 보내주 는 장례 서비스였다. 외롭지 않도록 단 체로 보내주겠다는 배려까지 완벽하다.
“완전 카리스마 있지, 안 그래.”
파직!
칼날을 통해 전달된 전사경이 관통된
심장을 노골적으로 괴롭히더니, 기어이 박살을 내버렸다.
부들부들!
심장이 파열된 남궁진은 경련을 일으 키다, 숨이 멎었다.
세가를 위하는 마음은 채 보상을 받 지도 못했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동공 에는 미련과 안타까움이 남았다.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최악의 악당을 불러들 였다.
“건드렸으면 책임을 지는 게 바른 세 상이지.”
정우는 냉혹했다.
하찮은 연민이나 동정심은 없었다. 물 론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감히 날 동정하는 놈이 있다면 결코 가만두 지 않는다. 그것이 무림에 적을 둔 무인 의 자세다. 무인은 동정이 아닌 무력으 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헉!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에 이극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홀러내 리는 침마저도 경악을 담고 있었다. 이 극은 지금 온전히 현실을 맞이하고 있 는지, 뺨을 꼬집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 었다.
“철면검호를 저토록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자였다니,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철면검호는 허망하게 죽을 만큼 약하 지 않았다.
그를 상대하려면 팽가의 최상위 고수 가 필요했다. 하물며 남궁세가의 오대 무력대인 창천검대까지 있었다. 이런 막강한 전력이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무 너져 버렸다.
허!
궤멸지경에 처한 창천검대는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처절하게 발악을 하고 있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를 문다고 하지만, 창천검대의 발악은 흑 금단의 광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마지 막까지 철저하게 뭉개고 있었다.
“……탈탈 터는구나!”
바닥에 쓰러진 창천검대는 죽어가면 서도 좋은 꼴 못 봤다.
맨몸으로 실오라기도 걸치지 못한 채 겹겹이 포개지며 탑처럼 쌓였다. 무인 이라면 수치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 나, 흑금단은 그딴 것 없었다. 본인도 자긍심이 없는 마당에, 남의 자존심을 챙겨줄 것 같나. 흑금단에게는 말 같지 도 않은 개소리다.
무엇보다 포개지든 뭉개지든 저승에 는 갈 것 아닌가. 얼마나 좋아. 차라리 지금 죽는 게 저들에게는 행복한 결말 이다. 괜히 살아 있다가 더러운 꼴 면치 못한다.
단 흑금단의 개인적인 사견이다.
창천검대는 발악했다.
“……저렇게 죽기는 싫다!”
“이……악마 같은 놈들아!”
“사람이 어찌 이리 잔인할 수…… 있 단 말이냐!”
“차라리…… 그냥 죽여라!”
창천검대는 쓰러진 동료를 터는 흑금 단의 만행을 저주했다. 저처럼 발가벗 겨진 채 인간 탑의 재료가 되고 싶진 않 았다. 그러나 부질없는 발악이었다. 흑 금단은 그마저도 역이용해 창천검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 차근차근 떨어뜨렸다. 실로 무서운 최적화, 상대가 약할수록 훨씬 강해진다. 혹금단의 무시무시한 장점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강자한테 도 강하지만, 약자한테는 어마무시하다. 그러니 약세를 보이는 순간, 게임은 끝 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발의 역전, 기 대하지 마라. 운을 기대하기에는 흑금 단의 악운이 지나치게 강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