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장
창당 (2)
정우는 카드의 단맛을 오랫동안 맛보 도록 했다. 카드의 맛을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호극은 중독자가 되었다. 마 약을 처음에는 공짜로 푸는 방식과 비 슷하다.
“그런 못된 협박 어디서 배운 거냐!”
“아시면서, 원하는 게 있으면 수단방 식을 가리지 말라면서요. 아주 좋은 거 배웠습니다.”
이놈의 자식이 배웠다고 바로 써먹네.
응용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아주 칭찬 해야 마땅하나 욕부터 나오는 이호극이 다. 학창 시절에도 공부하고는 담을 쌓 고 살아왔다. 이 나이가 돼서 공부를 하 라니, 차라리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 어들고 싶을 지경이다. 물론 그런다고 뒈질 가능성은 제로다. 그래서 하는 말 이기도 하고.
“카드는 내 토템이다. 건들지 마라.”
“선택은 문주님이 하셨습니다. 전, 분 명히 물었습니다.”
“요런 건 몰랐지.”
그냥 다 되는 줄만 알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일이기도 하고. 정치가 어렵다면 어 렵지만, 간단하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 되는거다.
이호극은 정치를 통해 이득을 챙길 마음이 전혀 없었다. 물질적으로는 많 이 풍요롭다. 권력을 가지겠다는 의미 가 아니다. 그저 돌아가는 사회가 마음 에 안 들 뿐이다. 그러니 이권에서 자유 로웠다. 그것만 해도 정치인으로서 엄 청난 장점이다.
‘본다고만 하면 되겠지.’
이호극은 들어주는 척만 하기로 했다. 그러나 통할 대상이 아니다.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놓지 않았다.
“갔다 와서 물어볼 겁니다.”
“치사하게 이러지 마라, 한판 뜰까?”
“국가를 책임지는 중대사예요. 쉬운 일만 하시려고요?”
“그래도 그렇지, 이건 심하잖아.”
“다 때려치울까요?”
이제 와서, 이렇게 판을 벌이고.
아쉬울 것 없다는 정우의 태도에 이 호극은 움찔했다. 철면피로 유명하기는 해도 판이 너무 커졌음을 안다. 당 대회 에서 본 민심의 열기를 엄중히 받아들 이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렇게까지 판을 벌이고 그 만두면 얼굴 팔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 는다. 지금까지의 인기는 물거품이 되 어 사라질 게 분명하다.
“내가 널 모르냐,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잖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죠.”
정우의 단호함에 이호극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막말로 알고는 있어야 하는 일 이다. 그로 인해 평생 해보지도 않은 공 부를 하게 생겼다. 실상 지금 그만두면 욕은 이호극이 다 처먹는다. 정우는 다 시 시작하면 그만이었다.
“차후 국정을 운영해나갈 때도 필요 한 제반사항이에요.”
“알아, 인마!”
잔뜩 까칠해진 이호극의 태도에 정우 는 피식거렸다.
저 덩치로 토라진 모습을 보이다니,
굉장히 안 어울린다. 이호극의 육신은 참으로 정직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오밀조밀하게 뭉쳐진 근육들이 표현을 한다. 근육 연기에 관해서는 아마 자타 공인 최강일 거다. 그래서 포스터도 상 체를 드러낸 모습으로 할까, 고민 중이 다.
‘좋은일만할 순 없지.’
금강문주에게 필요한 정치 입문서라 고 보면 된다.
막말로 정우는 2천 페이지가 아닌 2 만 페이지를 달달 외우고 있었다. 물론 외웠다고 보면 곤란하다. 모든 내용은 정우가 철저히 검토하고 확인을 거쳤다. 우리나라의 기초 제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지향적인 공약을 완성 했다. 정우조차도 나라의 플랜을 세우 는 일이라 몇 번이나 검토를 하고 수정 을 해야 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설치는 꼴은 못 보겠거든.’
똥이 더럽다고 피하기만 해선 안 된 다.
주변에서 똥냄새를 풍기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배수처리를 해야 한다. 그래 야 오물이 쌓이지 않는다. 인간의 습성 이 동물과 비슷하다는 걸 알게 하는 대 목이다. 쓰레기가 몰려 있으면, 거기다 버려도 되는 줄 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은 이해해도, 알면서도 버 리니. 어쩌면 짐승만도 못할지도.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한판 뜨죠.”
“아주 내 맘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 나.”
“싫으세요?”
“싫기는, 조져주마!”
“고상하시네요. 크크크!”
무문연합의 수장이 되고, 막대한 권한
을 칼처럼 휘두르고 있는 이호극이다.
모든 정책의 기반은 정우에게서 홀러 나왔기에 지나치게 합리적이었다. 공감 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무문에게는 손 해가 나는 일이지만, 대외적인 이미지 를 위해서 집행했다.
문제는 그 모든 이득이 금강문에게만 간다는 사실이다. 무문연합이 사실상 금강문의 하수인이라 떠들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불만을 토로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억울하면 이기든가.
문주들에게는 짜증나는 현실이었다.
이호극은 언제든 무문연합의 수장 자 리를 내놓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호극 을 넘어서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대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천무문주가 몇 차례 도전을 더 해봤으 나, 결과적으로 엄청난 꼴불견을 당해 야했다.
이호극은 체면이나 나이를 따져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도전할 엄두가 나 지 않았다. 실제적으로 넘버 2를 자처 하는 권영일도 이호극의 대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호극에게 있어 필생의 맞수는 정우분이라는 사실을 거듭 되새 기는 계기가 되었다.
“정우야.”
“왜요?”
“우린 전생에 부부였을 거다.”
“끔찍하네요.”
“그래서 죽이고 싶다!”
“죽여보세요.”
문주와 호법은 오늘도 이러고 놀았다.
흑룡성이 무너지면서 사파는 모래알 처럼 분열되었다.
사파의 12가문 중 10개의 가문은 멸
문당하고, 남은 두 문파도 봉문을 당했 다. 갈 곳을 잃은 사파의 무인들은 정체 를 숨기고 수면 아래로 숨어들었지만, 정파는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이 문 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단속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었다. 실제로는 사파 가 다스린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백도 진영 내부의 쟁투였다.
특히 산서성의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대립이 부각되 었다.
하남성을 지배하는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이 산서성의 절반을 가져가면서 남 은 지역을 놓고 연일 부딪치고 있었다.
하북팽가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남궁세가의 지배구역인 안휘성과의 거리를 감안하면 하북팽가의 권리가 더 컸다. 명분에서 앞서고는 있는데, 사파 무림을 척결하는 기간 남궁세가가 산서 성 전투에 관여하는 바람에 꼬이고 말 았다. 나중에 나타나 한 발 보태고, 이 득을 챙기려는 행태였다.
-남궁세가.
안휘성의 패자, 검의 제왕.
창천의기(蒼天義氣), 검협만리(劍依萬 里).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검호의 성지. 검에 관해서는 오대세가 중 최강 이며, 구파일방의 무당파, 화산파와 능 히 견줄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전대의 검제와 현 가주인 검왕 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어 역대 최강의 전력을 구축하고 있다.
-창천각(蒼天閣).
남궁세가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가주 의 직무실.
가문의 상징과 깉은 장소로 세가의
고루거각 중에서도 최상층에 위치했다. 사각의 형태로 이중 삼중 둘러쳐진 남 궁세가의 중심이었다. 세가 내에서도 직계혈통만이 출입이 가능하다. 방계는 특출 난 경우가 아닌 이상 죽었다 깨어 나도 밟지 못하는 혈족의 성지다.
유려하고 멋들어지게 완성된 창천각 은 아름다움과 규모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높은 아성, 검호의 자부심이 깃들 만하다.
창천각엔 가주와 총관, 장로가 자리했 다. 각 성에 파견된 장로들을 제외하고 세가의 주요 인사가 모였다고 볼 수 있 다.
“팽가의 움직임은?”
“현재로선 별다른 동향이 없습니다.”
“산서 지부에 검호를 보냈는데도?”
“그렇습니다.
남궁세가와 팽가의 대립은 오래전으 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항상 결판 이 나지 않았다. 오대세가의 균형을 원 하는 다른 세가는 대결의 파장이 번지 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파일방 의 견제를 내세워 중립적인 관계를 유 지했다.
이번에는 전과 상황이 많이 달랐다.
“소문의 출처는 파악했나?”
“석가장의 하오문 지부에서 나온 걸 로 추정이 됩니다.”
“추정이라고?”
“송구합니다.”
“함정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말의 앞뒤가 맞지는 않았다. 분명 소 문의 출처를 확실하게 찾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총관은 함정을 거론하지 않았 다. 팽가의 가주가 부상을 입었고, 반도 무림과 손을 잡은 사실을 알아냈다. 단 순 소문이 아닌, 증거를 기반으로 한 것
이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은 사각의 탁 자의 상석에서 장로들을 돌아봤다. 무 심한 시선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어찌했으면 좋겠나?”
“가주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전대 가주와 비슷한 연배의 대장로 남궁환이 뜻을 모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가주는 의향을 묻 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따르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자 신보다 연배가 낮다 하나, 남궁세가의 주인은 가주다. 장로도 가주의 의지를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왕은 하나로 족하지.”
“그렇습니다.”
도왕 팽우경을 가리켰다. 평소와 다르 지 않은 무덤덤한 말투지만, 그 안에 서 린 의미는 살벌했다. 팽가를 남궁세가 의 발아래 두겠다는 선전포고다.
그렇게 회의가 끝날 무렵.
총관이 넌지시 의사를 타진했다.
“일본무가에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웃기는군, 무시해.”
남궁천은 근본적으로 천하고 미개한 족속하고 어울리는 걸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 중화 이외에는 오랑캐에 불과했 다.
“그렇게만 보실 게 아닙니다.”
“어째서?”
“팽가와의 전쟁에서 소모되는 모든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향후, 지원도 약속을 했습니다.”
“대가는?”
세상에 공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 며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은 국지적이라 고 해도 상당하다. 무인 간의 전투로 입 은 피해까지도 계산이 되어야 했다. 팽 가의 세가 약해졌다고 하나, 오대세가 의 한 축이다. 손실 없이 제압하긴 어렵 다.
“세가의 유통로를 원하고 있습니다.”
“굳이 필요한 일인가?”
남궁세가의 자본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미개한 오랑캐의 더러운 돈까지 탐을 낼 필요는 없었다.
“굳이 지킬 의무도 없지요.”
“후후, 그렇군.”
검왕은 오대세가의 수장으로 만족하 지 않았다. 장차 대륙 전체의 주인이 되 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 팠습니다! 허억, 허억!”
하루 종일 삽질을 하고, 또 삽질을 하 고 있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기간이 수개월이 되자 삽질의 대가가 되어갔다. 그러나 반경 5미터, 깊이 10미터를 파 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것도 모종삽으 로 그걸 반나절 안에 끝냈다는 사실만으 로 청년의 신위는 대단했다.
땅을 파는 데 굴삭기가 필요하지 않 은 지고의 경지에 올랐다. 드디어 오늘 완벽한 구덩이를 팠다. 하루 안에 끝내 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었다.
이제 끝이구나!
햇볕에 탄 구릿빛 피부와 막노동으로 단련된 사지의 근육은 땀으로 번들거리 고 있었다. 전투 근육과는 다르지만, 응 용은 가능해졌다. 과거와는 몰라보게 달라진 외형이었다.
그때 이 모습이면 더 많은 여자들과 정욕에 빠졌을 텐데, 작금의 현실은 시 궁창에 불과했다.
“메워.”
“..2”
청년이 멈칫하자, 혹포를 걸친 사내는 주저하지 않고 발길질을 날렸다.
뻐억!
멍하니 있다가 처맞은 청년은 허공과 대지를 회전하다 데굴데굴 굴러 자신이 판 구덩이로 홀인원이 되었다. 구덩이 에 빠진 청년은 쥐 죽은 듯 누운 채 하 늘을 봐야 했다. 자신이 판 구덩이 속에 갇힌 기분, 묘하다 못해 오싹하다.
“튀어 와.”
지옥사자의 울림이 이럴까.
청년의 고막을 강타하는 나지막한 목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항거불능 악마 의 속삭임이었다. 청년은 무시하지 못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대신한다.
어디서 그런 힘이 불쑥 솟았을까?
청년은 사력을 다해 튀어 올라 흙을 비집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만 더 하면 구덩이를 빠져나오게 된다.
톡
“으아아악!”
대지를 잡은 손을 쳐내는 발놀림에 청년은 비명을 내지르며 10미터 아래로 맥없이 떨어졌다. 보통 사람은 이쯤에 서 떨어지면 죽거나, 사지가 부러지는 게 정상이거늘 청년은 어느새 회복이 되었다.
“올라와.” 빠드득!
“이 가냐?” 흠칫!
“아닙니다!” 후후.
“아니긴 하지.”
삽질도 억울한데, 정신적 데미지도 상 당하다.
그러나 어쩌랴, 악마는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청년은 무슨 짓을 해 서든 구덩이를 빠져나와야 했다. 맘 같 아서는 흙 파먹고 죽어버리고 싶은데, 빌어먹을 몸뚱이가 거부하고 있었다. 흙만 먹어도 죽지 않고, 배설이 잘되어 흙을 기름지게 만들었다. 내가 지렁이 도 아니고.
아등바등!
겨우 올라가면 또다시 톡 차버린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짚지 말고 뛰 어오르란다. 말이면 다인 줄 아나. 하나 감히 엉길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 공포 와 두려움이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침 입했다.
‘?…"제발!’
간절히 빌면 언젠간 이루어질까? 그 딴 말은 희망고문에 불과했다. 청년의 절절함은 사내의 무심함에 철저히 짓밟 혔다.
타앗!
마지막 순간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 튀어 올랐다.
이제 드디어 나올 수 있게 되……기 는 개뿔! 위에서 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찰나 두더지 게임의 망치가 아닌 두더 지가 되어버린 청년이다. 비명을 내지 르며 구덩이로 쏘옥, 빠져버렸다.
“크아악!”
짜식, 잘 팠네.
깊이가 있는 구덩이다. 울림판이 좋으 니 쩌렁쩌렁 잘 울린다.
정우는 혹금단의 단주로서 최약체인 막내조차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 는 중이다. 출장 가기 전 밀린 채무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꼼꼼함까지 더해 서.
보아라, 이 구덩이를, 불과 얼마 전까 지만 해도 쭉정이보다 못한 놈이 알맹 이 한 톨 정도는 생겼다. 갱생의 길에 한 발짝 내딛게 되었다.
“올라와.”
“……다리……가부러졌습니다!”
“그래서?”
“팔도 부러졌습니다!”
“목 빼고 뼈 개수 좀 늘려주랴.”
“……올라……갑니다!”
처음엔 대답 잘못했다가 뼈마디가 2 억 개로 늘어나는 진기명기를 경험했었 다. 사람의 몸을 그처럼 잘게 부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절했다.
부르르!
유호진은 10미터 깊이의 구덩이 위에 서 내려다보는 정우의 무심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한순간의 실수로 지옥으 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인세에 지옥 이 있다면, 여기였다. 차라리 죽고 싶은 데, 빌어먹을 육체는 치료가 되고 있었 다.
어그적, 어그적!
이가 아니면 잇몸이라고 했던가, 유호 진은 기어 올라왔다.
그사이 회복된 육체의 불가사의함은 절망으로 빠뜨렸다. 유호진은 흑금단 최초 빚쟁이로서 특별 관리 대상이다. 또한 인턴 흑금단이기에 3년 약정으로 훈련을 받으며 정규직의 50%만 제공받 는다. 이걸로 하루 10%의 복리로 계산 되고 있는 100억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까지 매진해야 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과거로 돌아가면 저 인간을 절대 건 드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