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협상 ⑴
정우의 예측대로 팽가에서 사람이 왔 다.
뜻밖인 점은 현재 하북팽가의 대소사
를 관리하는 팽자겸이 직접 행차했다는
것이다. 가주의 직속 중에 누군가가 오 리라 봤지만, 팽자겸은 예상외다. 그가 팽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에 더더 욱
‘사태 파악은 빠르군.’
내우외환으로 평정심이 무너질 만도 하거늘, 팽 가주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 렸다. 물론 은밀하게 진행된 암계를 파 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럴 시간도 없을 테고, 당장 남궁세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기회는 기다린다고 오지 않거든.’
시류를 아는 자가 때를 기다려야 기
회가 오는 법이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 기만 하는 자에게 기회는 많지 않다. 기 회란 스스로 만들 줄도 알아야 했다. 돌 아가는 사태를 분석해서 최상의 여건을 창출해내야 한다.
“일정이 바쁘셔서 당장 시간을 내기 는 어렵습니다.”
“어째서인가, 분명 약속 날짜를 보내 지 않았나.”
“팽가의 일방적인 약속일 분이지요.”
흑금단주로서 팽자겸을 맞은 정우는 순순히 맞춰주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예의를 지키고는 있으나, 어딘지 모르 게 비딱한 태도를 유지했다.
‘자, 어쩔 거냐?’
팽가에서 서신이 왔고, 정해진 날짜에 만나자고 했다.
정우는 그 오만한 행위를 받아주지 않았다. 금강문과 팽가는 동등한 협상 을 맺었고, 쌍방을 인정하기로 합의되 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약속은 언제든 파훼할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문 과 달리 다급한 쪽은 팽가다.
‘이놈, 날 시험하고 있구나.’
팽자겸은 사태파악이 빨랐다.
혹금단주는 자신의 반응을 통해서 팽
가의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려는 것이다. 현재 팽가의 사정은 어느 정도 는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여러모로 불리한 여건이었다. 자칫 분란을 일으 켰다가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힘들다.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팽자겸은 속내를 감추며 담담히 말을 꺼냈다.
“일방적이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네. 날짜를 정해서 보냈으면 가타부타 결정 을 내려야 하거늘, 금강문은 받아들이 지 않았나. 그렇다면 암묵적인 합의가 된 사안이라고 보네만.”
“상황에 따라 날짜와 시간이 변경될 수 있다고 보냈습니다.”
“본 세가와 금강문의 거래보다 더 중 요한 일이 있다는 겐가?”
“판단은 문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전 그저 지시사항을 전달할 분입니다.”
충분히 자존심이 상하는 발언이다. 금 강문의 지시사항에 따르든지, 아니면 돌아가라는 축객령이나 다름없다.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오대세가의 한 축인 하북팽가의 자존심을 지속적으로 건드 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금강문에도 이
득이 아니네, 당장 석가장 일대의 유통 산업이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어.”
“문제가 있다면 대가를 치르는 게 이 치에 합당한 일입니다.”
정우의 원론적인 답변에 팽자겸은 답 답해졌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곤 하나, 무역자유화 시대다. 세계는 점점 일원 화된 경제 시스템으로 운용되기에 국제 표준 규격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 럼에도 WTO의 약관을 교묘히 비껴가 며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한 꼼수를 쓴 다. 그런 국가 중에 하나가 중국이다.
자유경제가 되었음에도 공산정부가 통 제를 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현재 석가장 내 유통산업 제재의 근 원은 반한정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미 국과 한국의 군사시스템의 공조 강화로 인한 감정적인 대처를 경제 보복으로 나타낸다. 이는 굉장히 불합리하며 WTO가 정한 방법에 위배된다.
“사태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면 더 큰 피해를 양산할 수 있네.”
“합법적인 근거 없이 제재를 하겠다 면 사업을 지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텐데. 대중 무
역의 비중을 확인해봐서 알지 않나. 세 계에서 중국만 한 시장은 미국을 제외 하고 없네.”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 본문이 입을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세계 소비 시장 1위는 미국이고, 그 다음이 중국이다. 중국의 자본력을 무 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금강문과 연 계한 하이퍼 팩토리와 대한 그룹은 핵 심 공장을 중국에 짓지 않았다.
당장 피해를 보는 유통산업은 중국 내에서 생산된 물품 위주다. 실제 피해 를 보는 양은 크지 않았다. 역으로 하이 퍼 팩토리와 대한 그룹이 가지고 있는 핵심부품이 끊어지면 조립가공 무역으로 먹고사는 중국의 손실이 더 크다. 장기 적으로 보면 양쪽에 큰 손해를 입고, 그 피해는 한국이 더 받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알고서 부린 꼼수였구나.’
팽자겸은 금강문과의 거래 내용을 몇 번이고 검토를 해봤다.
금강문은 중국 내 소비시장의 장악을 원할 뿐, 핵심 사업은 진출시키지 않았 다. 팽가를 내세워 정부를 압박하는 카 드로 쓰고,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을 때 까지 대비한 것이다. 실로 치밀하고 무 서운 심계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어 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흑룡성의 압박 이 워낙 강경했었고, 전략병기가 완성 되지 않은 시기였다. 후일 남궁세가와 의 경쟁을 위해 전력의 손실을 최소화 할 필요가 있었다.
‘전력을 아낀 게 화근으로 다가왔어.’ 팽자겸은 새로운 눈으로 혹금단주를 보았다.
금강문에 도착하기 전 혹금단주에 대 해서는 확인을 마쳤다. 그가 팽가에 와 서 세운 업적은 실로 놀라웠다. 겁천마 검 초명학은 능히 일대의 패웅을 자처 할 만한 무력을 갖추었다. 그런 그를 제 압했다는 사실만으로 혹금단주는 일반 적인 범주를 벗어난 무인이다. 변방의 무인이라고 깔보던 세가의 무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장본인이다.
더 무서운 사실은 그가 젊다는 것이 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강해질 테고, 지금도 그 당시와는 또 다르게 성장했 을 터.
“팽가는 현재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 네, 이는 금강문에도 책임이 있는 사안 일세.”
“그렇다 해도 계약을 위반하진 않았
습니다.”
팽가가 금강문을 봐주고 있다는 소문 이 돌면서, 배신자라는 오명까지 뒤집 어쓰고 있었다. 당장은 팽가의 위상에 눌려 있다고 해도, 남궁세가가 가세하 게 된다면 그땐 손을 쓰기 힘들다. 그럼 에도 금강문은 한 발 물러선 채 관망을 할 분이었다. 이는 좋지 않았다. 가문을 위해서라도 금강문을 정면에 내세워야 했다.
“너무하는구나.”
팽자겸의 경호를 위해 파견된 자가 정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금강 문의 행태에 분노했다. 팽가의 무인으 로서 총관의 수모를 더 이상 간과할 수 만은 없었다.
우웅
무형의 기세가 정우를 압박해 온다. 절대의 무력을 갖춘 자만의 특기, 무형 살기다. 살기만으로 능히 목표물을 격 살할 위력을 지녔다. 그가 범상한 수준 의 무인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요즘은 개나 소나 경지가 다 올랐네.’
정우의 개인적인 사견이다.
절대의 반열에도 급이 있었다. 다들 과거와는 비교도 하기 어려운 진전을 이루었으나, 격차가 줄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같이 오르면, 오르지 않 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 그렇다고 개나 소나라는 표현이 전부를 말하진 않는다. 절대의 반열은 특별한 소수만의 개척지 이기는 했다.
팟
살기가 충돌하려고 할 때 흐름이 비 틀리면서 끊어졌다. 외부로 퍼져 나간 기운을 급히 갈무리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팽자겸이 총관이기는 하나, 그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잘못하면 총관에게 해가 미칠 수 있기에 반드시 막아내야 했다.
후아앙
객실의 내부가 크게 흔들렸다 가라앉 는다.
팽우진의 두 눈에서 번갯불이 토해지 듯 강렬한 신광을 번뜩였다. 당장에라 도 혹금단주를 격살해버리고 싶은 살인 충동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보낸 무형살기가 되돌아와 총관을 노렸 다.
“방자한!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정우의 말투가 바뀌었다.
공격하면 가차 없다.
“네놈■이 한 짓을 발뺌할 셈이더냐!”
“나는 그저 되돌려주었을 분, 남의 집 에서 소란을 피운 당신만 할까.”
팽우진은 팽가의 장로이자 하북삼도 의 일인이다. 그의 위치를 감안하면 결 코 함부로 대해선 안 되었다. 하물며 자 칫 총관이 위해를 입을 뻔했다. 설령 그 것이 자신으로 인해 발생했다 해도 해 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금강문은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 는 것이냐!”
“훗! 팽가만 하려고.”
정우가 팽가를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 면 후한 대접이었다. 반도의 무인이라 고 하여 폄하하고, 무력을 검증해보려 는 얄팍한 수작을 벌였었다. 반면에 정 우는 객실에 모셔놓고, 기다리라고 했 을 분이다. 누가 더 무례한 행동을 벌였 는지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팽가가 손해 를 보게 될 거다. 그리고 이런 식의 검 증을 딱히 싫어하지도 않는다. 하다 보 면 열 받은 팽가가 나댈 게 분명하고, 주먹으로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감히 본가를 업신여기는 것이더냐!”
“아니꼬우면 한판 뜨든가, 누군 성깔 없는 줄알아.”
팽우진의 평소 성향은 냉철한 편이다. 매사에 지성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그 러나 팽가를 모욕한 상대를 내버려둘 만큼 인내심이 강하지 않았다.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더욱이 시 험해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절명사 신으로 불린 혹금단주의 무력을.
‘후회하게 해주마.’
팽우진은 혹금단주를 폄하하진 않았 다.
그의 무력은 진짜였다. 겁천마검에 이
어, 혈검을 패퇴시켰다면 결코 호락호 락한 상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신 은 하북삼도의 제일도(第一刀) 건천도 팽우진이다. 무엇보다 최근에 깨달음을 얻어 환골탈태를 이루었다. 내경과 외 경이 조화를 이룬 완전체에 도달했다. 지금이라면 겁천마검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시건방진 놈, 작금의 선택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손님 주제에 설치기는.”
금강문에서 손님은 객일 분, 주인이 왕이다. 손님 주제에 겁도 없이 설치면 망신은 기본이다. 그러니 어설프게 건 드릴 생각이면, 얌전히 고개를 처박고 주는 대로 받아 처먹어야 한다.
“건방을 떠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 네놈에게 대국의 예의를 가르쳐주마!”
“깨달음 좀 있었다고 자신감이 하늘 을 찌르네, 하지만 그 정도론 안 될걸.”
정우는 팽우진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하북삼도와 삼형제 간에 다툼이 벌어졌었고, 이호극이 나타나는 바람에 멈추었다. 그때의 팽우진과는 기질이 많이 달라졌다. 냉철함 뒤에 호전성이 숨어 있었다.
‘대국이 대국다워야지, 밴댕이 소갈딱 지잖아.’
대국의 예의란 게 얼마나 허무맹랑하 고 어이없는 허세인지 알 수 있는 대목 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 이에 불과하다. 대국이라면서 본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법칙을 만들어놓고, 틀 에서 어긋나면 힘으로 깔아뭉갠다. 그 것이 예로부터 대국이 해왔던 만행이다. 결국 강자의 예의일 뿐. 약자는 대의명 분을 충족시킨다 해도 결과적으로 강자 의 힘 앞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잔인하지만 인류의 역사다. 그 리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도 하다. 현 실도 과거와 다르지 않은 역사의 일부 였다.
‘과연 어느 정도일까?’
팽자겸은 팽 장로를 만류하지 않았다. 세가의 처지가 어려워 원조가 필요하다. 당연히 좋게 보이도록 애를 써야 한다. 하지만 금강문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 인해봐야 했다. 겁천마검을 해치웠다고 는 하나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석 연치 않은 대공자의 죽음도 그렇고. 과 연 겁천마검을 대적할 만한 실력이 되 는지 검증이 필요했다.
‘그 입만큼 실력을 보여봐라.’
팽 장로를 상대할 수 있다면 전력으 론 충분하다. 건천도의 무력은 과거와 는 확연히 다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팽가의 전대 장로들과도 자웅을 겨룰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정우도 팽자겸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 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팽가의 가주 가 총관을 이유 없이 보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한편으로 이극을 완전히 신뢰 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귀영각주로서 가주의 신뢰를 받아왔던 이극으로서는 참기 힘든 수난의 시간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힐수록 더 아 픈 법이거든.’
팽가의 삼공자가 이공자와 팽팽함을 유지하는 배경에 이극이 있었다. 그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기에 더더욱 독해졌 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 가장 많은 변화를 이룬 자가 이극일 것이다.
‘애를 태워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