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내로남불 (3)
‘하아, 다 떠나서 이렇게까지 개발릴
수도 있는 거냐고!’
하라의 짜증 원인은 시청률 때문이다.
그녀는 사전 제작 드라마 ‘이년이 왕
후래.’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드라 마 제목부터 특출 났고, 사전제작으로 시놉시스도 검증이 끝났다. 대본을 읽 어보니 제목과는 달리 상당히 치밀한 구성으로 웰메이드 드라마였다. 촬영이 끝난 직후 감이 왔다. 방송이 되면 높은 시청률은 물론 한류 드라마의 반열에 오를 거라 기대했었다.
웬걸.
동시간대 방영되는 프로그램에 제대 로 발렸다. 줄초상이 났다고 봐도 무방 하다. 본 사람들은 잘 만들었다고 칭찬 하지만, 시청률 격차가 워낙 컸다. 대적 불가,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라도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상대 프로 그램이 스페셜 방송까지 3주나 더 하는 바람에 5퍼센트를 간신히 넘기고 종영 했다. 정규 방송에서 애국가 시청률이 나오지 않은 걸로 다행으로 여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판권계약기 끝나기는 했어도, 화제성이 떨어져서 투자금액의 절반도 회수하기가 어려워졌다. 쪽박 제대로 찼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저씨 따위에게 지다니! 분하다!’ 동시간대 프로그램이 금강문주의 일 상이었다.
완전히 저격당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연일 금강문주에 대한 기사만 나와서 ‘이년이 왕후래’는 지하 깊숙이 묻혀버 렸다. 재방송 시청률이 좋은 편이긴 했 어도 기대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이건 의도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우연이야, 그때 네가 방송에 나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
“우연 좋아하시네, 어떻게 책임질 거 야?”
“책임을 내가 왜 지냐.”
“여자친구가 출연하는 드라마에 대형 똥을 투척하고선 모른 척하겠다는 거 야?”
“연예인이 똥이 뭐야, 상스럽게.”
“연예인은 똥 안 싸냐!”
싸도 그렇지.
하라와 정우는 만난 지 10년이 넘어 간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족화 현상 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리낌이 없다고 해야 하나, 연인 간의 밀당이 없었다. 아무리 예뻐도 남녀 간에는 밀고 당기 는 쫀득한 맛이 있어야 오래간다는 정 석을 뭉개버렸다.
하지만 당연했다. 정우는 내숭 떠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좋으면 좋고, 싫으 면 싫다고. 단호한 선긋기를 선호했다. 연인은 닮는다고, 함께한 시간이 길어 질수록 하라도 속내를 감추지 않게 되 었다. 자연스럽게 신안이 발동해 상대 방의 마음을 알면서도 감추었던 시간이 길어져 정우 앞에서는 솔직한 편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신안이 통하지 않는 상 대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벌써부터 그러 면 쓰나. 크크크크!’
정우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동시간대에 방영이 되도록 강 피디와 사전에 조율을 했었다. 실상 ‘이년이 왕 후래’도 상당한 팬층을 가지고 있는 웹 툰 원작이다. 쉽지 않은 승부가 될 거라 고 봤지만, 사전에 편집본을 본 후 과감 히 결단을 내렸다.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경이로운 수 준이야.’
정우는 강 피디의 실력을 인정했다.
돌아이로 봤거늘, 방송의 천재다. 문 주의 말대로 대충 찍는 것 같았는데. 편 집해놓은 영상은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 러가면서도 포인트를 정확하게 꼬집고, 임팩트를 적절하게 주었다. 이게 쉬운 듯 보여도, 해보면 안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자막이 예술이었지.’
자막이 없었으면 지금처럼 이슈를 일 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자막을 제때에 넣어주는 센스가 신의 경지에 다다른 강 피디다. 그를 스카우 트할 때만 해도 비용이 너무 크다는 구 설수가 나왔었지만, 지금은 쏙 들어갔 다. 강 피디로 인해 대한엔터의 주가가 큰 폭으로 오르기까지 했다.
정우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하라의 방송을 거론하며 물타 기를 시전했다.
“연기가 이제는 달인의 경지에 올랐 다고 칭찬받았으면서 엄살은.”
“그렇긴 해. 사다리에서 미끄러질 때 남자 주인공이 받아주면서 주고받은 대 사가 압권이었잖아.”
“맞아.”
정우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라가 정면을 가득 채우며 얼굴 가 까이 접근했다. 혀를 내밀면 닿을, 호홉 과 호흡이 겹치는 근접거리였다. 주변 에 사람들도 많은데도 거리끼지 않는 다.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하라의 신안과 천원일기공은 극성에 도달한 지 오래다. 주변에 장막을 쳐놓고 있어 누 구도 하라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보고 있는 시선에는 평범한 커플이 나 란히 걷고 있을 분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하라만의 고유한 향기가 콧구멍을 간질거린다. 본인은 살 냄새라고 하는데, 꾸준한 관리의 산 ?물이다.
“……왜 그래?”
“사다리에서 미끄러진 적 없거든.”
“그럼 돌다린가?”
“돌다리엔 가지도 않았거든! 너 안 봤 지?”
“?크흠.”
이런, 함정을 파 놓았을 줄이야.
하라가 코앞의 지근거리를 사수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앙탈을 부렸다. 그런 개수작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여자 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정우를 심층적 으로 분석했기에 가능한 함정이었다. 연인 간의 밀당이 없을 분이지, 속임수 는 난무했다.
속임수 & 속임수.
함무라비법전을 동봉한다.
“보지도 않고서 드라마가 좋다는 둥 시나리오가 괜찮다는 둥 연기가 늘었다 고 개소리를 친 거야!”
“사소한 걸로 소리 지르지 말자, 침 튄다.”
코앞에서 사극톤의 발성 연습을 하면 그 앞에 있는 정우는 홍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인공재해에 대한 항의를 했거늘, 씨알도 안 먹힌다.
“시끄러, 내 침은 보약이거든.”
“아밀라아제가 어떻게 약3] 돼.”
“아밀라아제는 다당제 분해효소로서
…… 됐고, 책임질 거야, 말 거야?”
“책임은 만날 지고 있는데, 뭘 또 책 임져.”
결혼 허락을 받아놓았으니, 맘껏 육체 적 교합을 이루고 있었다. 주위에서 좋 다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있음에도 일편 단심이었다. 이만하면 책임을 완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미녀가 헐벗은 채 육탄공세를 하는데도 발끈하지 않았 다. 사내로서 한 여자를 대하는 아름다 운 책임이었다.
“오늘 기분 안 좋으니까, 위로해줘.”
“주변에 좋은 호텔이 있나?”
앱으로 ‘저기 어때?’를 급하게 살펴보 았다. 각종 숙박시설 앱이 난무하고 있 는 가운데, 해킹의 위험이 있다는 사실 이 안타깝다. 들어가기 전에 전파를 감 지해서 차단하는 건 기본옵션이다. 후 일 ‘좋았냐고’ 연락 올 수 있다.
“누가 그런 거 바란대.”
“단출한 걸 원하는구나, 그럼 모텔로, 아닌가? 혹시 여관? 난 싫은데.”
“헛소리 그만하고, 나 따라와.”
하라는 정우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오붓하게 둘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 는 것도 나브진 않지만, 평범한 연인들 처럼 놀아보고 싶었다. 오늘 하루 기분 도 꿀꿀하고, 원 없이 놀면 풀릴 것 같 았다. 회사에서 드라마 실패했다고 벌 써부터 말이 나오고 있었다. 광고 의뢰 가 반으로 줄었다. 특히 탐내고 있던 CF7} 금강문주에게 갔을 때, 기가 막혀 서 말도 안 나왔었다. ‘먹지 말고 근육에 양보하세요.’라니, 콘셉트에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오늘수업 있는데.”
“언제부터 수업 들었다고.”
“알다시피 내가우등생이잖아.”
“망할 우등생이겠지.”
하라는 곧장 놀이공원으로 공간이동 을 했다. 이럴 줄 알고 , 좌표 계산까지 맞춰 놓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 수준도 6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공간이동 마법 이 여러 방해 요소가 있기는 해도, 정확 한 좌표가 있으면 이동이 가능했다. 여 담으로 방송 스케줄을 맞추는 데 공간 이동은 제격이었다.
단, 정우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윤정이보다 못하네.”
“방송 때문에 바빠서 그런 거지, 노력 하면 9레벨도 가능하거든. 그러는 넌?”
이 나이에 중급 마도사면 어딜 가도
대우를 받는다. 그런데도 타박을 받다 니 조금 억울하다. 불평이 터져 나올 만 하다.
“나야 궁극에 이르렀지.”
“?정말?”
“알잖아, 이런 거로 거짓말 안 하는 거. 증명이 필요해? 메테오 한 방 쏴줄 까?”
“?됐어!”
하라는 기겁했다.
불신도 못 하게 만드는 강압적인 화 법이다. 놀이공원 한복판에 메테오가 떨어진다고 상상해봐라. 이를 대수롭지 않게 거론하는 정우의 마인드에 살짝 소름 돋았다. 여하튼 굉장한 인간이긴 하다.
‘이 인간 대체 못하는 게 뭐야?’
마법학과에 같이 입학한 시간을 감안 하면 경이롭다는 말도 부족한 성취다. 무공도 끝을 모르는데, 마법도 이제는 차이가 컸다. 예전부터 천재라는 소리 를 들었지만, 정우에 비하면 여전이 애 송이 였다.
‘사람 기죽이는데도 천하무적이라니 까. 그런다고 내가 기죽을 거 같아. 어 쨌든 넌 내 남자라고.’
정우는 출구 앞에서 기다렸다.
하라가 매표소에서 자유이용권을 끊 어 왔다. 그러고 보면 같이 놀이공원에 온 게 처음이다. 하라의 들뜬 얼굴에서 즐거움이 피어 나오고 있었다. 보통 사 람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가지고 있으면 서도 의외로 누리지는 못했다.
“강박관념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 니었냐?”
“마음이 매번 똑같을 수는 없잖아. 그 리고 이런 건 원래 남자가 하는 거라 고!”
이러다가 결혼하면 손가락 까닥하지
않는 거 아냐? 라는 의문도 생길 수는 있으나.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 정우는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아도 의지만으로 모든 걸 완벽하게 되돌릴 수 있다.
그건 그거고.
“헛소리, 남자 여자 구분할 필요가 어 디 있어. 아무나 먼저 하면 되지.”
“날 너무 쉽게 보지 마.”
“그런 적한 번도 없어.”
정우는 하라를 하찮은 여자로 보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왔다고 해서 편 하게만 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그 녀, 나는 나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녀 를 받아들였고, 하라와 함께 있는 이 시 간이 즐겁다. 즐겁지 않고 지루했다면 그녀와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나 받아준다고 보면 오산이다. 쓸데없 는 데 시간을 할애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하라가 매점에서 사 온 걸 꺼내 정우 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
“그만! 선을 넘지 마라.”
정우가 주춤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 자, 하라가 한 발하고 반보 더 달라붙었 다. 아예 몸이 밀착되었다고 보면 된다.
주변에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 는 눈초리가 나올 수 있다.
“놀이공원에선 다 이거 한다고. 필수 라고, 필수!”
“?싫다.”
하라는 싫다는 정우의 머리에 강제로 호랭이 머리띠를 씌우고, 본인은 토갱 이 머리띠를 했다.
정우는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런 유치한 짓을 해야만 하는 건지 심각 하게 고민을 해봐야 했다.
“나 어때?”
“그냥.”
“귀엽네, 얼굴 붉히고.”
“헛소리.”
하라가 너무 좋아한다.
‘이게 뭐라고.’
별것도 아닌데 좋아하면 어떡하지?
그간 강천과 세경을 달달 볶았던 지 난날?이 떠올랐다. 연인은 서로를 부끄 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 다. 그럼에도 또다시 강천과 세경이 호 랭이와 토갱이 패션을 한다면 갈구지 않을 자신은 없다.
‘내로남불이군.’
미안하지만 어쩌랴, 내 눈이 썩을 것 같은데.
동물보호, 안구보호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