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내로남불 ⑵
화르르르!
열기가 총관실을 달구었다.
‘그 열정을 본문에 썼으면 세계제일도
됐겠다.’
김 총관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 레 흔들었다. 문주는 예나 지금이나 쓸 데없는 곳에 정력을 잘도 낭비한다. 물 론 그런다고 정력이 감퇴되지는 않는다. 워낙 차고 넘치는 정력의 소유자였다.
‘여하튼 나로서도 좋지 않은 일이기는 하단 말씀이야.’
김 총관에게도 카드 정지는 금전적, 정신적인 피해를 양산하게 될 것이다. 카드가 정지되는 즉시 문주는 문파의 법인카드로 긁고 다닐 테고, 이를 따져 물으면 벽면에 음각을 새기게 된다. 본 문의 건전한 재정 유지와 총관의 건강 을 위해서라도 카드 정지는 되도록 막 아야 한다.
“당장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위험은 오기 전에 방비하는 거라고 했어, 늦었다고 할 땐 정말로 늦는단 말 이다!”
이호극은 전투를 제외한 일상이 굼벵 이와 비견된다. 대강대강, 설렁설렁의 표본과도 같은 사람이 십만양병설을 주 장한다고 가정해봐라, 설득력이 무척이 나 떨어졌다.
그만큼 이호극은 간절했다. 도박에 빠
진 중독자가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카드도 비슷한 마력이 있었다. 특히 백 지 카드를 쓸 때의 쾌감이란 안 써본 사 람은 모른다. 한번 골든 벨을 울리면 매 번 울리고 싶은 것처럼.
“문주님이 나서지 않아도 팽가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어허,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가서 확인을 해봐야지. 이러다가 팽가가 무 너지면 내 카드는 어쩌란 말이더냐.”
카드를 인생 토템처럼 소중히 간직하 고 있었다.
일전에 카드에 영구 보존마법과 강화
마법을 걸어달고 한 걸 보면 팽가는 카 드를 회수하기도 어려울 거다. 만일 얘 기도 하지 않고 정지라도 시키는 날엔, 이호극이 팽가를 찾아갈 게 분명하다.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게 뭔지 알아? 준 거 도로 뺏는 거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누가 봐도 적반하장이잖아, 라고 생각 하면 이호극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애 초에 주질 말았어야 했다. 호의를 보였 으면 계속 호의를 보여야 한다고 억지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호구가 아닌 이 상 당하지 않는다고? 열 받은 이호극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면 없는 돈도 대출 해서 마련해 올 거다.
‘저금통의 역할이 끝나지 않았으니, 배를 가르진 않아.’
하북팽가는 대어(大魚)를 낚기 위한 미끼다. 매력적인 미끼를 당장 배가 고 프다고 잡아먹는 건 비효율적이다. 또 한 모든 일은 납득할 만한 그럴듯한 명 분이 있어야 한다. 순리를 따르며 역행 을 시기적절하게 이용할 필요가 있다. 때에 따라서 사정이 바뀔 수 있으니, 큰 흐름은 따르되 적절한 대처는 필수다.
“팽가에서 사신이 오면 요청을 거절 하세요.”
“거절을 왜 해? 거래를 했으면 응당 도와줘야지. 되놈들처럼 인정머리 없는 짓은 해선 안 된다.”
언제부터 그렇게 인정을 따졌다고, 이 호극의 자기편의주의였다. 순전히 본인 을 위한 선택이며, 상대에 따라서 막무 가내와 염장질은 기본 옵션이다. 특히 적이었을 땐 구해주고도 보따리가 아니 라 집문서를 내놔야 할 거다.
“쉬워 보이면 매력이 없잖아요. 문주
님은 쉬운 분인가요?”
“쉽다니, 나 되게 어려운 사람이다.”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체통을 지켜 야지.”
정우의 설명에 이호극은 납득했다.
남녀문제를 봐도, 단번에 승낙하면 매 력이 감소한다. 쉬운 상대인 줄 알고 함 부로 대하기도 하고. 그럴 때일수록 본 인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거절을 해줘야 한다. 단,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무작정 거절하면 인연이 끊어질 수도 있으니 때에 따라 융통성이 필요하다.
‘여지를 줘선 안 되거든요.’
이때다 싶어 팽가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의심할 수도 있었다.
비록 예기치 못한 부상을 입고, 주변 상황마저 도와주지 않아 냉철함이 무너 지기는 했어도. 팽가의 가주는 호락호 락하지 않은 자다. 섣부른 판단은 화를 불러올 수 있기에 미연에 차단해야 했 다.
‘완전히 신뢰를 해야 통수 칠…… 크 홈. 점잖지 못했구나.’
어쨌든 팽가의 애를 태워야 보다 완 벽한 그림이 나온다. 나중에 믿었던 도 끼에 발등이 찍혔을 때의 고통을 맛보 게 해줄 요량도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선택의 결과물은 팽가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들이 어 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팽가의 존 폐가 결정될 것이다.
‘어렵기는 개뿔! 사람을 들었다, 놨다 가지고 노네.’
김 총관은 문주의 줏대 없는 행동에 한숨을 삼켜야 했다. 자신이 말을 할 때 는 들어 처먹지도 않은 철벽이 정우가 하자고 하니, 반박도 안 한다. 그 모습 이 어찌나 얄미운지, 힘이 있으면 야무 지게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 주먹이 깡 패라고 문주의 신위는 과거에 비하면 또 달라졌다. 정우와의 전투로 매번 업 그레이드가 되었다. 저 나이가 되고도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걸 보면 타고 났다고 봐야 한다.
“도움을 요청하면 내가 가도 되는 거 지?”
“안 될걸요.”
“어째서?”
“문주님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니까요.”
우리나라에서 금강문주를 모르면 간
첩이란 소릴 듣게 되었다. 그만큼 엄청 난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금강문주 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공백이 크게 다 가올 거다. 중국에서도 금강문주를 알 아보는 자들이 있을 수 있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사안이 산더미예 요.”
“설마나 혼자 하라는 거냐‘?”
“김 총관님도 계시잖아요.”
“그러는 넌?”
“결자해지라고, 사태를 수습해야지 요.”
이호극은 입맛이 썼다.
유명세를 얻고 나니, 활동의 자유가 억압빋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쓰고 있는 감투가 늘었다. 무문연합의 수장 으로서 수뇌부 회의도 열어야 하고, 촬 영도 해야 하고, 새 단체의 설립 주체였 다. 어느 하나 빠질 수도 없다.
그렇다고 정우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금강문을 위한 일이었고, 싫 지 않았다. 전에는 얻고 싶어도 얻지 못 했던 감투를 손쉽게 얻고 나니 정우의 가치를 새삼 실감했다. 전투력 못지않 은 신통방통한 구석이 많았다.
‘나중엔 독방에 갇혀 아무것도 못하는
거 아냐?,
살짝 불안해진 이호극이다. 그리되면 답답해서 살지 못한다. 한동안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억눌린 충동이 폭발 할 땐 감당하기 어려울 터. 그땐 스스루-도 장담하지 못한다.
“제가 없는 동안 백금단을 살펴주세 요.”
“그 여물지도 않은 놈들을 어따 쓰라 고.”
“공식적인 행사에는 선전 효과가 있 을 거예요.”
“얼굴 마담으로 쓰자고? 그건 무인이
돼서 할 짓이 아니지.”
“그래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백금단은 혹금단과 용도가 다르다.
빛과 어둠처럼 공식적인 행사에는 백 금단이 필요하다. 백금단은 독무무문과 중소무문의 무인으로 구성되었다. 문주 의 직속 친위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의 메 시지를 전할 수 있다.
‘희망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거 드 ’
독문무문이나 중소무문은 대문파에 비하면 인재풀이 부족하고, 실력도 떨 어진다. 이들에게 무문연합은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백금단은 희망의 씨 앗을 심어줄 계기가 될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해도.’
백금단의 훈련은 혹독하다. 혹금단으 로 인해 연일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 금강문주까지 보태진다 고 상상해봐라. 실력은 상승할지 몰라 도, 삶이 행복하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무인은 무력으로 증명한다. 백금단이 활약을 할 때마다 금강문을 바라보는 세간의 인심은 좋아질 수밖에 없다.
강 피디가 제작한 프로그램이 방영되 었다.
방영 전부터 금강문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크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 었다. 과연 어떤 콘셉트로 방영될지, 단 편적으로 내보낸 장면만으론 연상이 되 지 않았다.
1차, 2차, 3차 예고편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강 피디 의 방송 기술과 기법이 신의 경지에 이 브렀음을 증명했다. 어떤 식으로 편집 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지를 꿰뚫 고 있었다.
-금강문주의 일상.
세간의 주목도와는 달리 제목은 소소 했다.
다른 방송에서 했던 인간극장과 다르 지 않은 콘셉트처럼 보였다. 대다수의 사람들도 방영 전엔 비슷한 생각을 하 고 있었다.
-딱 보면 모르냐, 우리랑 다르지 않다 고 보여주려는 거지.
-금강문주도 알고 보면 보통 사람이
라는 거잖아.
-잘난 사람들은 꼭 이런 식으로 대중 의 환심을 사려고 한단 말이야.
-보통 사람 컨셉이면 식상한데.
유명인이 방송에 나와 실제 생활을 보여주며, 나도 당신들과 다르지 않다 고 주장하는 프로그램이 한때 유행을 이끌었었다. 그러나 방송에서 보였던 장면들이 실제가 아닌 짜인 각본임을 안 사람들은 실망했다. 연인 콘셉트로 나온 커플도 알고 보니 방송용 비즈니 스였던 게 밝혀지자 원성이 높았다. 차 라리 그럴 바엔 대놓고 비즈니스 관계 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낫다고 봤다.
-비교를 할 걸 흐fl! 금강문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
-그분은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자 희망이라고!
-딴따라와 문주님을 같은 급으로 보 지 말라고, 그분 덕분에 우리가 살고 있 는거야
-맞아, 보지도 않고 지랄 좀 하지 마!
방영 전부터 설왕설래, 갑론을박이 각 종 커뮤니티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대다수가 금강문주에 호의적이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커뮤니티에서는 반론 도 만만치 않았다. 금강문주의 유명세 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찬반론을 떠나 금강문주의 화 제성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시작 전 부터 이러니 동시간대 방영 프로그램까 지 파급력을 고려해야 했다.
총 10부로 제작된 프로그램이 방영되 자.
-이거 누가 인간극장이라고 했어!
-완전 끝내준다!
-가식은 개불, 거침없잖아
-보통 사람은 절대 저렇게 못해!
-특별한 사람도 못하지, 저걸 어떻게 해
-영화네, 그것도 블록버스터 영화!
금강문주의 거침없는 일상은 사람들 의 쌓여 있는 불만을 터트리고, 원초적 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나도 저 렇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 다. 마치 오늘만 살고 내일은 없다고 외 치는 것처럼-
-막 나가는 것 같은데, 정상적으로 돌 아가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운은 무슨, 다 생각을 하고 행동하시 는거라고!
-그럼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잖 아
-알고 보니 천재야, 천재!
분명 전후 재지 않고 행동한다. 그런 데도 결과를 놓고 보면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 한두 번이면 우연으로 치부할 테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끝이 나니 각 본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케이 브 공략까지 담긴 실제 영상이 돌아다 니고 있어 각본설을 불식시켰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삼형제가 불쌍 하냐. 그.그.그
-불쌍하다면서 왜 웃어, 변태냐!
?웃긴 걸 어떡해! 그나저나 아들이고 자시고 가차 없네!
-그게 금강문주님의 매력이잖아!
-그래도 삼형제가 너희들보다는 잘산
다
3부에 나온 금강문주와 삼형제의 대 련은 큰 화제를 남겼다.
아들이라도 무인으로 대하는 금강문 주의 단호함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자 식이라고 싸고돌고 감싸기만 하는 현 세태와는 확연히 구분 지었다.
간혹 삼형제가 실력도 없으면서 아버 지의 후광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 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깔끔하게 해소 했다. 일례로 삼형제는 무림대회에서 실력으로 상위권에 올랐다. 당시의 대 결을 본 사람들이 보지 않은 사람들을 질타했다.
-그런데 총관실이 더 좋지 않았냐?
-그러게! 문주님은 평소에도 굉장히 검소한가 봐.
-총관이 재정을 관리하니까, 그렇지.
-아니지, 문주님은 식신이잖아. 엄청 먹던데 당연히 총관한테 잘 보여야지.
-그건 인정, 식비만 해도 재정이 거덜 나겠더라.
-문주님이 투잡 쓰리잡! 열일 하는 것 도 이해가 된다.
일상 속의 소소한 에피소드, 스펙터클 한 광경이 조화롭게 편집되어 시청률을 발아들였다. 케이블임에도 동시 간대의 모든 시청률을 잡아먹고 30퍼센트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새겼다. 새로운 방 송국으로 이적한 강 피디의 역작이라는 말이 나왔다.
-금강문주는 일상이 예능이고, 영화 네.
-가만히 놔두어도 웃기잖아.
-진짜 금강문주는 희귀 아이템이라고.
강 피디는 실패가 없어.
-금강문주하고 하면 나도 실패 안 하 겠다.
“어떻게 할 거야?”
“뭐가?”
“문주님 때문에 난 망했다고.”
“그걸 왜 나한테 와서 그래.”
정우의 옆구리를 잡아챈 하라가 휘어 감으며 칭얼댔다. 말을 할 때는 귀에 대 고 속삭이는데, 고막의 온도가 상당히 올라가고 있었다. 간혹 뱀처럼 날름거 리는 혓바닥이 귓불에 닿을 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
“너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따져!”
“문주님한테 가서 따져야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다 계획적 인 거잖아.”
“그럴 리가, 난 전혀 모르는 일이라 고.”
하라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정우의 태 도에 열불이 터졌다. 이건 누가 봐도 의 도적인 고의다. 하물며 이처럼 고단수 의 방법을 구상해낼 수 있는 사람은 정 우분이다. 머리에도 근육이 들어차 있 을 것 같은 아저씨가 생각해낼 수가 절 대 아니다. 방송으로 이미지 포장이 잘 되어서 모를 분, 하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생긴 대로 무식했다.